일본영화 18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

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Good Morning] (1959)

2012/10/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 / Tokyo Story] (1953)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이나 [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영화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다. [동경 이야기]로 스타일의 완성한 오즈는 [이른 봄]부터 초기작들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를 자처했던 [부초]랑 동시기인 [안녕하세요]는 전후에 만든 [태어나기는 했으나]에서 다뤘던 아이들로 다시 돌아온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태어나기는 했으나]의 느슨한 리메이크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녕하세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문물이었던 텔레비전이다. 이웃집 신식 문물을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 Journey to the Shore] (2015)

2013/08/26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죽은 남편이 돌아와 여행을 제안한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본 뼈대는 판타지 장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도입부는 신비롭다. 장을 보고 팥죽을 만들던 주인공 미즈키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미즈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편 유스케가 서 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듯이.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안다. 심지어 친절하게 유스케는 자신이 실종되었다는걸 죽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장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이전 프레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낀..

하모니움 [淵に立つ / Harmonium] (2016)

[하모니움]의 도입부를 장식하는건 스즈오카 부부의 딸 호타루의 풍금에 맞춰 울러퍼지는 메트로놈의 음이다. 그리고 음에 맞춰 조각조각난 타이틀 '늪에 서다'라는 타이틀이 붙어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마치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산산조각나 사라지는 것처럼 맞춰진 오프닝 시퀀스는 불길함을 안기기 충분하다. 후카다 코지는 당돌하게도 다음 시퀀스로 오즈 야스지로가 세계 영화계에 남긴 유산 중 하나인,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을 이어간다. 하지만 [하모니움]의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불편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밥상에서 나누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죄에 관한 대사도 그렇지만, 침침한 조명과 다소 스산한 기운이 스며든 스즈오카 가족의 식탁엔 활기참이나 친밀함은 없다. 오즈의 밥상을 의도적으로 ..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 [女が階段を上る時 / 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1960)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살펴보면 소위 물장사하는 여성들 (게이샤나 마담)을 다루는 영화들의 비중이 꽤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이 생각보다 포괄하는 폭이 다양하다는걸 생각해보면 (이전에 리뷰했던 [가을이 오다]라던가.) 물장사하는 여자들을 다루는 영화의 비중이 높다는건 나루세 미키오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곧장 말해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과 관련된 멜로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며, 물장사 연작들은 그런 관심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도쿄 뒷골목 시대에 뒤떨어진 게이샤들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줬던 [만국]이나 [흐르다]랑 달리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의 배경은 도쿄 긴자 '라일락'이라는 바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은 케이코는 남편을 잃고 긴자 바..

진흙강 [泥の河 / Muddy River] (1981)

오구리 코헤이는 기본적으로 과작의 영화작가다. [진흙강]과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그는 6년-9년 텀을 두고 조심스럽게 영화를 내놓고 있다. 그가 등장했던 1980년대 일본 영화계는 산업 기반의 붕괴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와중에 이타미 주조는 경박하기까지 한 템포의 풍자 코미디 영화로 흥행을 이끌고 있었고, 신인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를 통해 색정적인 얘기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연출론을 조심스럽게 숨겨넣고 있었다. 하지만 오구리 코헤이는 [진흙강]을 통해 그런 흐름과 상관없다듯이, 마치 네오 리얼리즘이나 고전기 일본 영화들을 연상케하는 1.33:1 흑백 화면의 전후 일본 배경 성장물을 들고 나타났다. 당연히 저예산에 흑백 화면으로 제작된 [진흙강]은 가히 페드로 코스타의 [피]만큼이나 불시착한 영화였..

가을이 오다 [秋立ちぬ / The Approach of Autumn] (1960)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미키오 필모그래피를 봐도 매우 희귀한 축에 속하는 영화다. 성인 남녀간의 애정이라던가 여성, 특히 게이샤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그간 나루세 미키오의 작풍과 달리 어린 아이, 그것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쁜 놈일수록 더 잘 잔다]랑 동시상영했다는 점, 이후 나루세가 잘 다루던 게이샤나 성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다시 이어진걸 보면, 나루세 자신도 이 세계가 자신이 계속 머물 세계는 아니라는건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커리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다]의 각본은 카사하라 료조가 쓴 [도회지의 아이]를 원작으로 나루세 자신이 개작해 만들어졌다. 이야기는 ..

인정 종이풍선 [人情紙風船 / Humanity and Paper Balloons] (1937)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일본 외에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원래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영화들은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영역이긴 하지만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알려지지 않은데에는 역사적 비극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젊은 나이에 중일전쟁 때문에 징집되었고, 전사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27편의 영화 중 지금 볼 수 있는 건 3편뿐이다. [인정 종이풍선]은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대극 영화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이 영화 이전에도 외팔이 무사 탄게 사젠을 주인공으로 삼은 [백만냥의 항아리]라는 사무라이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리고 사라진 영화들 중에서도 사무라이 영화는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믹했던 전작과 달리 [인정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そして父になる / Like Father, Like Son]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Like Father, Like Son 8.4감독고레에다 히로카즈출연후쿠야마 마사하루, 오노 마치코, 마키 요코, 릴리 프랭키, 니노미야 케이타정보드라마 | 일본 | 121 분 | 2013-12-19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극히 정갈하고도 고도의 양식미를 보였던 [환상의 빛] 이후 반대로 다큐멘터리적인 뿌리로 회귀해 즉흥적인 구조를 취해 영화를 만들어왔으며 [아무도 모른다]까지 그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런 그가 [걸어도 걸어도]로 한번의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즉흥성은 줄어든 대신 그가 항상 존경을 표해왔던 나루세 미키오나 야마다 요지 같은 선배 영화 감독들의 홈드라마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난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걸어도 걸어도] 이후 고레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