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giantroot2017. 5. 29. 18:13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1950년대에 영화화한 적이 있다. 이치카와 곤의 [들불]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는 감상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적는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가 고전기 스튜디오 시절 감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츠카모토가 만들었던 것보다는 훨씬 정제된 영화였을 것이다. (실제로 고어 묘사가 삭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체 츠카모토는 원작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만든 것일까?

[노비]가 내세우는 주인공 타무라 일등병은 낙오자다. 폐병에 걸렸다고 항의를 해도, 전쟁을 만들어낸 불합리한 시스템은 그의 병을 모른척 하고 내쫓는다. 그는 계속 전장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군상을 만난다. [노비]의 서사 구조는 한 점이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타무라는 전장에서 빠져나가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 이동마저도 쉽지 않다. 퇴각할 수 있다는 정보는 점점 신빙성을 잃어가고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면서 타무라는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다. 극단적인 수직 권력 관계, 폭력, 무의미한 죽음, 식인....

[노비]가 전장을 다루는 방식은 추상화다. 일부는 저예산 독립 제작을 고수하는 츠카모토 특유의 제작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 방식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의도적으로 배경을 추상화시키고 있다. [노비]에 등장하는 동남아의 정글은 문명은 커녕 전장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극처럼 추상화된 곳이다. 샷과 샷 간의 시공간은 명확한 구분이 없이 흘러가며, 인물들의 행동은 의미를 잃고 동물처럼 퇴화해 있다.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원색의 강렬한 자연, 제목의 들불, 병약한 타무라가 정신을 잃고 암전되는 장면, 디졸브와 얼굴 클로즈업 샷을 쪼개는 기법을 오가며 지옥 속 인간의 심리와 육체를 휘갈겨 그려낸다.

하지만 츠카모토는 추상화된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안다. 타무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현지인들을 조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영화의 차가운 응시를 격렬하게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구조상 상당히 초반에 등장하는데, 타무라의 불안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훔쳐보는 현지인들은 전쟁의 광기가 상관없이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숨어있던 타무라가 등장하는 순간, 이름없는 현지인 커플의 행복은 산산조각 난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한계에 도달한 이성은 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간다.

이 시퀀스 말미에 등장하는 현지인 여성의 광기 넘치는 비명은 그 점에서 무시무시하다. 츠카모토는 타무라가 현지인들에겐 무시무시한 가해자에 불과하며, 그 증거로 피해자의 악에 찬 절규를 타무라와 관객 앞에다 가져다놓는다. 이 시퀀스가 그럼에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면 타무라 역시 제국주의의 피해자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무라는 현지인 여성도 쏴 죽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짓지만, 동시에 피해자 타무라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교회는 결국 구원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고어 묘사가 있다. 전장에서 갈려나가는 병사들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고어 호러 영화와 닮아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샷들은 샘 페킨파처럼 파편화되어 흩날린다. 츠카모토 신야의 B급 정신이 전쟁 영화에 이식된 것이다. 얼핏보면 [노비]의 어법은 위험해보인다. 전쟁 영화에서 고어 영화의 피범벅을 빌러, 끔찍함을 영화적 즐길거리로 만드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는 전쟁을 쉽사리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비슷한 어법을 쓰지만 살짝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듯한 샘 페킨파와 달리, [노비]의 슬로모션과 쪼개진 샷들은 넘쳐나는 고어의 과잉을 차갑게 응시한다. [노비]의 고어 묘사가 무서운 이유는 결국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육은 그 점에서 [노비]의 고어 묘사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츠카모토가 [노비]를 현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불가능했던 고어 묘사와 인육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건 원작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노비]에서 인육이 원숭이 고기로 위장되는건 상당히 흥미롭다. 인육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이, 원숭이의 고기로 포장되면서 잠시나마 본능과 도덕이 양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육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양립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까발려진다. 줄곳 생존만을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이동하던 타무라가 분노하는 순간 역시 이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죽어가던 타무라의 양심은 다시 깨어난다. 타무라는 최후의 순간, 인육을 더 이상 먹는걸 거부하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길 거부한다.

그렇게 거부했건만 타무라는 스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서야 살아나갈수 있었다. 여기서 원작과 츠카모토판 영화와 차이가 발생한다. 츠카모토는 원작과 달리 타무라 앞에서 나가마츠가 자살하는 것에서 본편을 마무리 지은 뒤, 막간 자막에 게릴라에게 습격 당했다는 디테일을 추가하면서 오오카와가 품고 있던 회의적 시선을 강화시킨다. 당사자인 오오카와가 트라우마로 묘사하지 못했던 순간을 전후 태생인 츠카모토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노비]는 '들불'을 일본어로 음독한 제목이다. 오오카와 쇼헤이의 원작이 그랬듯이 [노비]에서도 들불은 생존과 죽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비]의 마지막 쇼트는 오오카와가 그려냈던 '들불'을 츠카모토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온 타무라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인한 거식증은 그를 괴롭힌다. 잠시 쉬러 나온 타무라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영화 내내 등장했던 불의 이미지가 유리창에 비춰지는 환영을 본다. 이때 타무라는 마치 불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츠카모토는 일본조차도 들불로 대표되는 군국주의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불안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노비]가 마지막에 보여준 불의 감옥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

*원작에 대한 정보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74669&cid=41773&categoryId=50387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