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일본 외에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원래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영화들은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영역이긴 하지만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알려지지 않은데에는 역사적 비극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젊은 나이에 중일전쟁 때문에 징집되었고, 전사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27편의 영화 중 지금 볼 수 있는 건 3편뿐이다.
[인정 종이풍선]은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대극 영화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이 영화 이전에도 외팔이 무사 탄게 사젠을 주인공으로 삼은 [백만냥의 항아리]라는 사무라이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리고 사라진 영화들 중에서도 사무라이 영화는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믹했던 전작과 달리 [인정 종이풍선]은 틈틈히 집어넣은 유머를 제외하면 놀랄만큼 쓸쓸하고 비장한 영화다.
카와타케 모쿠후미의 가부키 [츠유코소데무카시하치죠]를 원작으로 한 [인정 종이풍선]은 사무라이의 죽음으로 막을 연다. 쪽방에서 살던 사무라이가 가난을 못 이기고 자살한다. 마을이 술렁이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애도보다는 술을 마실 수 있을거라는 흥분감에 사로잡혀 있다.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무라이 운노 마타쥬로는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고위 사무라이인 모리 산자에몬에게 승진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정작 산자에몬는 그를 귀찮아한다. 한편 마타쥬로 옆집에 사는 이발사 신자는 도박을 좋아하지만 야쿠자 두목인 야다고로 켄시치에게 찍혀 돈 문제로 쩔쩔매고 있었다. 어느날 신자는 켄시치가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모리의 딸 오코마를 발견하고 무작정 오코마를 집으로 데려와버린다.
납치극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정작 [인정 종이풍선]에서 납치극은 의외로 후반부가 되서야 나온다. [인정 종이풍선]에서 중요한 것은 마타쥬로와 신자의 일상이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 따윈 모른다듯이 마타쥬로와 신자의 일상을 나열한다.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되기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나아가 [인정 종이풍선]이 지지하는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먼저 사무라이인 마타쥬로를 살펴보자. 마타쥬로는 비루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같은 건 없다듯이 오로지 상급 사무라이에게 인정 받기 위해 굽신굽신거린다. 마타쥬로는 생계를 위해 종이풍선을 만들며 현실을 살아가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품위와 명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마타쥬로의 한심하게 쩔쩔매면서도 위신을 찾아대는 모습은 분명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에서 그렸던 류헤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리고 그는 그 체면을 버리지 못한다.
오누키가 만드는 종이풍선은 그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소품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마타쥬로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던 종이풍선은, 체면 밖에 남아있지 않는 마타쥬로의 공허한 삶과 더불어 후반부 오누키의 절망감을 드러내는 상징적 도구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종이풍선에 둘러쌓인채 다다미에 앉아있는 마타쥬로를 담은 컷은, 훗날 오즈가 정립한 다다미 샷에서 느껴지던 정갈하면서도 초탈한 일본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분명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반대로 신자는 그런 체면이나 위신 따윈 모른다듯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첫 등장은 잠에서 막 깨어나 지주인 스케조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다. 그는 음주가무와 도박을 즐기며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어쩔 수 없이 지주인 스케조와 야쿠자 켄시치에 고개를 숙이며 살지만, 그런 자신에 대해 자격지심은 커녕 훌훌 잊어버리고 긍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신자의 삶은 신자와 신자 친구들로 대표되는 서민들의 삶이기도 하다. 방식 심지어 영화의 기둥이 되는 오코마 납치 사건 역시 신자에게는 저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저질렀다는걸 분명히 하고 넘어간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야마나카 사다오는 납치 사건도 매우 가벼운 희극조로 처리함으로써 신자의 캐릭터에 쓸때없는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다.
신자 뿐만이 아니라, [인정 종이풍선]은 사무라이 계급을 일구고 있는 체통과 위신에 대해 상당히 풍자적인 태도로 거리를 두고 있다. 산자에몬의 딸 오코마는 이미 산자에몬의 의중과 전혀 상관없이 산자에몬의 부하 사무라이에게 눈이 꽃힌 상태이며, 모리는 체통에 매달리는 쪼잔하게 쩔쩔매는 속좁은 사무라이로 그려진다. 야다고로 일파에 이르면 말이 필요없을 정도다.
마타쥬로는 어떤가? 그 역시 사다오의 풍자적인 시선에서 벗어날수 없지만, 저들보다는 좀 더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먼저 신자랑 되도록 얽히지 않으려고 하고 승진에 목을 걸때 사다오 감독은 시침 뚝 떼고 마타쥬로의 한심함을 부각시킨다. (4대 카와라사키 쵸쥬로의 추레해보이는 연기도 한 몪한다.) 하지만 승진이 좌절된 뒤, 납치 소동을 거하게 벌인 신자가 어울려 술을 마시던 마타쥬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체통과 위신을 벗고 마음껏 모리를 비웃는다. 이때 마타쥬로의 표정은 신자조차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다. 강요된 체통과 의무에서 벗어났을때 비로소 인간다워보이는 아이러니는 분명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과 야마나카가 고수하고 있던 좌파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정 종이풍선]은 후반부 술집 장면을 기점으로 소극으로 끝날 수 있던 이야기를 급작스러운 비극으로 선회한다. 신자에게 한방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켄시치는 신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마타쥬로는 거짓말을 알아챈 아내 오타키에게 칼을 찔려 죽는다. 우리는 마타쥬로가 왜 죽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술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던 마타쥬로는 평소 마타쥬로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며, 집에 돌아가자마자 평상시 거짓말만 하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은 들통나버렸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도피하던 현실에게 허무하게 죽는다.
마타쥬로의 죽음이 허무함과 사무라이 계급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다면, 신자의 죽음은 놀라울 정도로 울컥하는 비극과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납치 사건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준의 문제가 아니였다는 점이 비애와 비장미를 한층 더 한다. 오코마는 마타쥬로가 잘 보호하고 있었고, 집에 돌아온 오코마는 아무런 문제없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신자의 죽음은 단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도중 신자가 이전처럼 비굴하게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면'과 '위신'을 깎아먹어서다.
비겁하고 치졸한 이유지만, 신자는 그 비겁함과 치졸함에 대해 절대로 머리를 굽히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그들에게 한방 먹일수 있다는 객기일수도 있지만, 그에게 돈 받고 합의하라는 스케조와 켄시치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객기 그 이상의 분명한 지조가 담겨 있다. 특히 결말의 신자의 눈빛은 잊기 힘들다. 야마나카 사다오가 분명히 닥쳐올 죽음을 생략하기에 이 비장함은 더욱더 처절해진다. 그것은 일본 제국 시절의 오만은 절대 아니며 오히려 그 오만에 저항하는 평범한 사람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분노이다.
마타쥬로의 죽음으로 떠들썩한 (하지만 신자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거리 뒤로 보이지 않는 수로에 종이 풍선이 떨어져 흘러간다. 좁고 어둡고 지저분해보이는 수로로 흘러가는 이 종이 풍선의 모습은 마타쥬로인가? 아님 신자인가? 아니,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다. 어찌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감독 자신일수도 있다. 확실한 건 이 컷은 마음이 아플 정도로 슬프다. 감독의 유언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인정 종이풍선>이 이 야마나카 사다오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면 다소 애석할 듯하다. 그것은 패배자의 슬픔은 아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말한다. 부디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십시오. -야마나카 사다오, 1938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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