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움]의 도입부를 장식하는건 스즈오카 부부의 딸 호타루의 풍금에 맞춰 울러퍼지는 메트로놈의 음이다. 그리고 음에 맞춰 조각조각난 타이틀 '늪에 서다'라는 타이틀이 붙어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마치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산산조각나 사라지는 것처럼 맞춰진 오프닝 시퀀스는 불길함을 안기기 충분하다.
후카다 코지는 당돌하게도 다음 시퀀스로 오즈 야스지로가 세계 영화계에 남긴 유산 중 하나인,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을 이어간다. 하지만 [하모니움]의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불편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밥상에서 나누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죄에 관한 대사도 그렇지만, 침침한 조명과 다소 스산한 기운이 스며든 스즈오카 가족의 식탁엔 활기참이나 친밀함은 없다.
오즈의 밥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드는 후카다 코지의 악의는, 곧 토시오라는 캐릭터로 연결된다. 점잖고 친절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토시오는 속내를 쉬이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이 점은 곧 후반부에 드러나는 토시오의 죄와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당연한 벌이라 생각하는 뒤틀린 심리하고도 연결된다. 그 점에서 토시오의 침묵은 균열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야사카 소타로가 등장하는 샷은 후카다 코지가 선배 감독 중 누굴 존경하고 인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다. 소타로의 첫 등장 샷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유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샷처럼 낯설고 음기로 가득차 있다. 이 샷에서 소타로는 표정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데다 그를 감싸고 있는 빛은 지나치게 환한 나머지 위화감이 든다.
다만 유스케가 이내 친밀함을 드러내며 미즈키에게 과거를 환기시킨다면, 소타로는 친밀함을 극도로 인위적으로 표출하면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 인위적인 친밀함을 걷어내보면 소타로는 무도덕한 짐승이다. 그리고 이런 짐승성은 종종 성적인 긴장감이나 서스펜스로 드러나기도 한다. 소타로가 목욕하고 나오던 도중 풍금 연습하던 아키에와 호타루를 마주치는 장면이라던지 물놀이 도중 토시오를 협박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점에서 소타로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의 에노키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후카다 코지가 다음으로 꺼내든 카드는 바로 종교다. 한국 영화와 달리 현대 일본 영화에서 기독교인을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는 꽤 힘든 편인데, [하모니움]은 그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다. 오프닝에 슬쩍 대두된 종교적 죄의 개념은 이내 교인인 아키에와 소타로의 관계를 통해 회개와 속죄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처음엔 소타로를 낯설어하던 아키에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소타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는 애정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은 곧 죄의 경계를 위태하게 배회하게 되고 그 결과는 파국이다. 후카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가 아키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키에의 감정은 열려있다.
소타로가 아키에에게 죄를 털어넣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클로즈 업을 많이 쓰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시퀀스는 유달리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를 활용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소타로의 클로즈업 샷이 압도적이고, 아키에의 리버스 샷은 비중이 적다. 하지만 아키에의 표정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늘 열려있기에 안정감을 주지만 소타로의 고백은 미심쩍음을 남긴다. 심지어 그의 고백과 참회가 진짜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 점에서 후카다 코지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이 영화의 성패는 캐릭터의 투명성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츠츠이 마리코, 아사노 타다노부, 후루타치 칸지 등 세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도 빼놓지 말아야 되겠지만.
[하모니움]은 이처럼 소타로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고 보이는 순간조차도 소타로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우리는 소타로가 호타루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소타로는 호타루가 장애인이 되버리는 첫번째 파국 이후 사라진 뒤 영화가 끝날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후카다 코지는 첫번째 파국 직후, 시간을 뛰어넘어 구조를 반복한다. 낯선 자가 철공소에 도착하고 그 낯선 자가 다시 한번 파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타카시가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두번째 파트는 소타로가 등장하는 첫번째 파트하고는 거울쌍을 이루고 있다. 타카시가 소타로의 아들이라는 점, 악기에 능한 소타로와 그림에 능한 타카시가 호타루에게 접근하는 점, 진상 폭로 시퀀스 등이 그렇다. 하지만 첫번째 파트에 남아있는 상흔과 이상 심리는 두번째 파트를 서서히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하모니움]이 인상적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이런 죄의식과 불안을 조금씩 꺼내서 비정형적인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에 있다. 반복과 대칭을 이루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후카다 코지는 고조되어야 할 폭로의 순간을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처리한다던가, 평범한 일상을 아슬아슬한 서스펜스와 욕정으로 채워넣는 식으로 엇박자를 놓는다.
롱 샷으로 정욕이 끓어오르는 소타로와 무심히 던져진 야외 섹스하는 커플의 신음 소리, 흰 옷을 벗고 붉은 셔츠로 돌아가는 소타로, 식물인간이 된 호타루를 감시 카메라로 살피며 밥을 먹는 토시오, 갑자기 토시오에게 뺨을 맞고 당황해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 타카시가 그렇다. 토시오가 소타로와 타카시에게 프레스기로 구멍을 뚫는 과정을 가르쳐주는 장면은 그 점에서 영화 전체의 리듬감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멍이 점진적으로 커져가듯이, [하모니움]의 영화적 리듬은 점진적이지만 낯설게 반복되며 죄의식으로 빠져든다.
두번째 파국이자 호타루의 진짜 죽음을 다루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영화는 아예 환영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아키에와 토시오는 마침내 소타로가 사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소타로를 찾아가던 도중 아키에는 타카시에게 복수를 위해 그를 도구로 쓰겠다는 의도를 거리낌 없이 나타낸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건 풍금을 연주하는 아이와 흰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다. 이 샷 자체는 그동안 쌓여왔던 비틀린 상황과 달리 불현듯 등장해, 마치 유령이 다시 도래한 느낌마저 줄 정도다. 하지만 후카다 코지는 잔인하게도 그 평온을 깨트려버린다. 이제 남은건 진짜 파국 밖에 없는 것이다.
아키에와 호타루가 자살을 시도하는 결말 역시 그런 불현듯 등장하는 환영과 그 환영을 깨트리는 잔인한 현실의 대조로 이어져 있다. 후카다 코지는 이 순간부터 거의 시적 이미지로 영화를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좀 진부한 이미지를 과하게 밀어붙인거 아닐까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자체로는 꽤나 허망한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죄를 대속하고 죄 있는 어른만 남아버린 현실. 여기서 후카다는 매정하게 영화의 막을 내린다. 마치 진짜 파국 '이후'를 상상해본적이 없다듯이. 과연 후카다 코지는 그 파국 이후를 다룰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하모니움]의 비정한 결말은 요사이 일본 영화에서 보기 드문 진득한 독기를 지니고 있다는건 확실하다.
'Deeper Into Movie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전범죄 [Indagine Su Un Cittadino Al Di Sopra Di Ogni Sospetto /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1970) (0) | 2016.11.14 |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 Journey to the Shore] (2015) (0) | 2016.10.24 |
자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0) | 2016.09.04 |
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 / The 400 Blows] (1959) (0) | 2016.08.17 |
마지막 국화 이야기 [殘菊物語 / The Story Of The Last Chrysanthemums] (1939) (0) | 2016.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