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리 코헤이는 기본적으로 과작의 영화작가다. [진흙강]과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그는 6년-9년 텀을 두고 조심스럽게 영화를 내놓고 있다. 그가 등장했던 1980년대 일본 영화계는 산업 기반의 붕괴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와중에 이타미 주조는 경박하기까지 한 템포의 풍자 코미디 영화로 흥행을 이끌고 있었고, 신인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를 통해 색정적인 얘기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연출론을 조심스럽게 숨겨넣고 있었다. 하지만 오구리 코헤이는 [진흙강]을 통해 그런 흐름과 상관없다듯이, 마치 네오 리얼리즘이나 고전기 일본 영화들을 연상케하는 1.33:1 흑백 화면의 전후 일본 배경 성장물을 들고 나타났다.
당연히 저예산에 흑백 화면으로 제작된 [진흙강]은 가히 페드로 코스타의 [피]만큼이나 불시착한 영화였지만 [진흙강]은 그런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국제적으로 먹히는데 성공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탄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까지 나가는 등 오구리 코헤이는 이 영화를 통해 꽤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감독한 [환상의 빛]으로도 유명한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진흙강]은 성장물이다. 1955년 오사카 하천에 사는 우동집 아들 이타쿠라 노부오는 어느날 하천 보트하우스에 사는 마츠모토 키이치와 긴코 남매를 알게 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타쿠라와 달리 마츠모토 남매는 어머니 쇼코와 함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노부오와 마츠모토 남매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중 노부오는 쇼코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죽음의 가시] 이후의 고도로 형식화된 오구리 코헤이 영화를 경유해 온 관객들이라면 [진흙강]의 소박한 모양새에 놀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네오 리얼리즘의 유령을 불러내듯이 인공성을 배재한 캐릭터에게 사실적인 배경을 배정하고 서사를 진행해나간다. 전반적으로 [진흙강]은 나루세 미키오의 [가을이 오다]에 영감을 받은듯한, 순수하면서도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우정을 그려내고 있다. 고레에다 팬들이라면 오구리가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방식이 이후 고레에다에게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걸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진흙강]에는 [가을이 오다]엔 없는 어떤 그림자가 있다. [가을이 오다]은 기본적으로 역사/사회적 맥락이 희박했고, 히데오와 준코의 우정은 어른들과는 무관한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흙강]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의 우정을 그릴때도 패전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할까. 영화는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와중에 참전용사였던 노부오의 아버지 신페이는 그런 영화 내 드리운 상흔을 집약해 보여준다. 미야모토와 오구리는 신페이를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으로 그리면서도, 어딘가 전후의 허무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내는데, 이 때문에 [진흙강]의 성장담을 어떤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재구성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런 상실과 허무감 같은 부분은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의 빛]에서도 쉬이 드러났던 부분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미야모토 테루의 개성이 오구리의 연출에 자연스럽게 접합되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런 상실감과 허무감이 단순히 배경으로 머물지 않고 아이들의 우정에도 스며드는 걸 포착한다는 점에서 [진흙강]은 [가을이 오다]와 다른 방식으로 놀라운 영화적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 전체의 반전으로 준비된 쇼코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장면은 그렇게 '반전'을 노리고 만든 장면은 아니지만 (복선 자체가 무수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서늘함은 도무지 잊기 힘들다. 차분히 쌓여왔던 순진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어떤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한방에 박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구리는 모든 관계가 파탄난 이후에도 뒤늦게 마츠모토 남매를 쫓아가는 노부오를 결말로 선택하면서 아이들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루세가 [가을이 오다]에서 그랬듯이, 오구리 역시 아이들의 선의를 믿고 존중해주지만, 그 선의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는 약하다는 것도 같이 보여준다.
오구리 코헤이의 연출법도 영화의 내용처럼 단순해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복잡하다. 오구리 감독은 일견 네오 리얼리즘 특유의 손이 덜 간듯한 외양과 달리, 신인 감독답지 않게 상당히 고도의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누나와 함께 이타쿠라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온 키이치가 신페이의 부탁을 받아 옛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라. 단순한 시퀀스 설정과 달리 이 장면에서 오구리 코헤이는 아웃포커스와 트래킹, 인물의 배치를 통해 아이들의 우정과 어른들의 상흔 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어떤 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술했던 반전의 순간 역시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마이클 파웰의 [저주의 카메라]가 정립한 관음증적인 시선을 역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서늘함을 안겨주고 있다. 결말 시퀀스의 흐름도 상당히 세련되게 통제되어 있다.
오구리 코헤이는 이 다음 영화인 [가야코를 위하여]까지는 이런 고도로 다듬어진 네오 리얼리즘적인 기조를 꾸준히 유지했다. 하지만 그가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6년동안 침묵한 뒤 내놓은 [죽음의 가시]는 오즈와 미조구치를 흠모한 영화적 기교로 무장한 서늘한 기운의 사적 심리극이라는, 전혀 다른 영화로 탈바꿈했다. 자신의 관심사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이 아닌, 그 순수함 뒤에 서린 어떤 서늘한 분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가시]를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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