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336

TAR 타르 [Tár] (2022)

토드 필드의 『TAR 타르』는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몰락 비극 서사를 다루는 영화다. 인물이 내적 결함으로 몰락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이지만 그 몰락의 과정이 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 지휘자 리디아 타르의 몰락기는 온갖 문학적 상징성과 알리바이로 가득하다. 리디아 타르는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남성의 영역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또는 정체성 정치의 성공 사례로 내세울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자로서 타르는 현실의 남성 권력자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비서를 하대하며, 학생들을 조롱하면서도 성적으로 유혹하려는 타르의 모습은 분명 미투 가해자로 언급할 수 있는 해로운 권력자다. 토드 필드는 음영을 명백히 ..

포제서 [Possessor] (2020)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두 번째 영화 『포제서』는 전형적인 B급 SF/호러 영화의 콘셉트에서 시작한다. 타인의 인격을 빼앗아 살인을 저지르는 청부살인업자라는 설정은 SF나 호러 장르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기 드문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격 해킹을 다루는 방식에서 『포제서』만의 개성이 드러난다. 『포제서』의 인격 해킹은 주술이나 마법 같은 비논리적으로 기운 방법론이나 데이터로 치환한 전뇌 같은 중간자적인 매개체를 활용한 방법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간의 신체/의식을 연결해 바꿔치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막상 신체를 관장하는 정신이 어떻게 동작하는지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모순된 정체성에 놓여 있는데, 브랜던은 정체성 연기와 혼입 몽타주, 그리고 질감이라는 ..

실리아 [Celia] (1989)

앤 터너의 [실리아]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죽음 이후를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다루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데 [실리아]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받아들임은 ‘괴물’이다. 실리아는 자던 도중 괴물 손이 창문을 침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비명 소리에 달려온 엄마랑 함께 실리아는 ‘괴물’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보게 된다. 요컨데 [실리아]는 죽음 이후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에 매달리는 여자 아이에 대한 영화다. 그렇다면 실리아는 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실리아]는 포크 호러로 분류되는 영화지만, 실상은 포크 호러라는 장르에서 기대할만한 폐쇄적인 시골 공동체나 광기어린 소수 종교 집단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영화다. 오히려 이 영화의 배..

사랑받는 방법 [Jak być kochaną / How to Be Loved] (1963)

뒤에 만들게 되는 『사라고사 매뉴스크립트』나 『모래시계 요양원』과 달리, 보이체크 하스의 『사랑받는 방법』은 명료한 서사와 순차적인 플래시백라는 비교적 익숙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카자미에시 브란디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성우로 성공한 펠리시아가 프랑스 파리로 가면서, 전쟁 당시와 이후를 배경으로 있었던 비극적인 연애담을 다루는 이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 굴욕적인 선택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성의 멜로드라마를 그려낸다. 이런 멜로드라마를 통해 하스는 민족주의 저항이라는 민족 집단이 가진 환상 뒤 현실을 감내해야 했던 소시민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먼저 눈에 띄는 지점이 있다면, 파편적이고 추상화된 공간과 숏을 활용해 영화 전체를 기억의 순간들로 구성된 영화적인 신체로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 영화..

사마에게 [من أجل سما / For Sama] (2019)

1990년대, CNN이 걸프 전쟁을 생중계하면서 세계인들이 전쟁을 감각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실 영상으로 전쟁을 감각하는 방법은 이전부터 뉴스 릴 같은 방식이 있었지만 CNN은 종군 기자에게 생중계 방송 카메라를 들려줬고, 사람들은 현장에서 채집된 전쟁의 이미지를 안방에서 즉각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CNN의 중계는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주는데 치중한, '자극적이고 편향된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바야흐로 갱 오브 포가 예측했던 '게릴라전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CNN 쇼크는 많은 창작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었고, 그 중엔 ' 극장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도 있었다. 오시이 마모루는 '비디오 이미지'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플롯으로,..

프라운랜드 [Frownland] (2007)

《아빠의 천국》 이후 로버트 브론스타인의 《프라운랜드》를 찾아서 보는 사람은 대체로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통해 거슬러 올라온 사람일 것이다. 《아빠의 천국》 이후 편집과 각본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싶어서 말이다. 사실 《프라운랜드》는 개봉 당시엔, 몇몇 영화제와 뉴욕 아트하우스 영화관을 돌다가 사라진 흔한 동네 독립 영화에 가까웠다. 심지어 "근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최우수 영화상"라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요상한 명칭을 단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흔하다를, 오독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 주목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물을 보면 오히려 아슬아슬하고 뉴욕 독립 영화계에서도 비타협적인 비주류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데뷔작으로 내놓을 생각을 ..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 [The Pleasure of Being Robbed] (2008) / 사프디 형제 단편선 (2006~2012)

2018/01/10 - [Deeper Into Movie/리뷰] - 굿타임 [Good Time] (2017) 조시 사프디의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아빠의 천국]으로 사프디 형제라는 이름으로 창작 활동하기 전, 조시가 먼저 만들었던 장편 영화다.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이 영화는 앤디 스페이드라는 사업가의 아내 케이트가 운영하는 케이트 스페이드 핸드백 광고용 프로젝트가 확장된 결과물이라고 한다. 요컨대 CF 영화인 셈이다. (실제로 핸드백 클로즈업이 자주 등장한다.) 조시 역시, 시나리오를 쓰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게 분명한데, 구조가 상당히 헐겁기 때문이다. 서사 역시 엘레노어라는 도벽이 있는 여자가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면..

단 한번뿐인 삶 [You Only Live Once] (1937)

(누설이 있습니다.) 나치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넘어간 프리츠 랑은, 자신의 독일 시절 영화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M〉이나 〈메트로폴리스〉로 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의외로 다가올 것이다. 이런 시큰둥함을 단순히 독일 시절에 대한 환멸로 정리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프리츠 랑은 미국으로 넘어가서 자신의 영화 작법을 완전히 바꾼 케이스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선 랑은 〈문플리트〉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메트로폴리스〉나 〈피곤한 죽음〉, 〈스파이더〉 같은 판타지나 모험 활극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랑이 할리우드에서 시작하기 위해 끌고온 자신의 유산은 〈M〉이나 〈마부제 박사의 유언〉 같은 범죄 영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미국 시절 랑의 영화를 ..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