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6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죽은 남편이 돌아와 여행을 제안한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본 뼈대는 판타지 장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도입부는 신비롭다. 장을 보고 팥죽을 만들던 주인공 미즈키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미즈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편 유스케가 서 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듯이.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안다. 심지어 친절하게 유스케는 자신이 실종되었다는걸 죽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장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이전 프레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영화는 지구의 물리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워즈]나 [그래비티]처럼 무중력을 현실로 가정한 공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무중력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중력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찍던 도중 중력을 거스르는 장면이 등장하면, 우리는 당황하며 이전 컷과 이후 컷을 따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 전까지 강하게 세워져 있던 현실의 프레임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허구의 마술이 일어난다. 그 마술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진짜 매력 중 하나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령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유령은 현실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에 인간이 등장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편집이나 샷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장르 영화의 유령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요시의 유령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를 깨닫게 해준다. 기요시의 유령들이 영화 탄생 후 무수하게 등장한 마술 중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면, 그는 숏의 구성과 연결, 사소한 소품들이나 몸짓, 그림자와 색채에서 중력과 무중력을 구성할 줄 아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술을 담당하고 있는 유스케를 보자. [절규]의 여자 귀신이 그랬듯이, 우리는 그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훌륭한 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점도 있지만 유스케의 복장이라던가 (실제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유스케의 주황색 코트였다. 옷의 색이 하나의 캐릭터화된다는 느낌이였달까. 같이 다니는 미즈키의 무채색 옷과 대조되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대사 사이에 등장하는 어떤 침묵의 간극, 무심하게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을 흘러내보내는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그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분명히 죽었을 유스케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터무니없음에 당혹해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은 전작들과 달리 절망이나 묵시록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절박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즈키가 큰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유스케의 유령을 받아들이는 것도, 오히려 그 멜로드라마적인 물기에 잠겨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스케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썼다는 기원문은 미즈키가 중력을 거르는, 어떤 영화적 현상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스케의 제안에 미즈키처럼 따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유스케와 미즈키의 여행은 일종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유스케는 자신이 없었던 지난 3년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미즈키가 체험하길 원한다. 유스케가 보여주는 이야기엔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 머물며 죽음을 인지 못하는 유령도 있으며 반대로 유령을 잊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도 있다. 즉 유스케가 어떤 영화적인 사건이라면 미즈키는 관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스케와 미즈키가 처음으로 찾아간 신문 배달을 하는 시마카게라는 할아버지를 보자. 중간의 반전으로 시마카게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며 지박령처럼 그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는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마카게가 머무는 장소다. 미즈키가 그 장소에 들어섰을 때, 관객들은 그 장소가 죽은 장소라는걸 쉽게 알아차린다. 혼자서 머물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두운 그림자, 어딘가 빛바랜 가구들... 에피소드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그런 소멸해버린 시간과 공간을 기요시가 호러 장르에서 구축했던 어법을 빌어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영화의 마법이 드러나는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시마카게가 만드는 꽃 사진 콜라쥬는 그런 마법의 일부이자 총화라 할 수 있다. 잠든 시마카게를 데려와 침대에 눕히던 미즈키와 유스케를 뒤로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꽃 사진 콜라쥬가 등장한다. 이때 다음 컷에서 카메라는 트랙인을 하면서 콜라쥬를 확대해 보여준다. 벽 한가득 차 있던 꽃 사진 콜라쥬는 화면 가득히 채워진다. 그리고 미즈키의 넋을 잃고 바라보는 리액션 컷이 붙는다.
동시에 이 장면은 유령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연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스케의 등장이 그랬듯이, 꽃 콜라쥬 역시 유스케와 미즈키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벽에 붙은 꽃들을 비추는 인공적인 조명 연출은, 마치 그가 사라지기 전에 남기는 유언처럼 조용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비록 시마카게는 외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그가 살아있던 흔적은 그렇게 현계에 남아 관객들의 멜랑콜리를 자극한다.
이렇게 빛을 조절해 다른 시공간에 속한 것 (유령)을 불러와 어떤 아름다움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은 유스케가 두 번째로 데려가는 곳인 중년 부부의 음식점 에피소드에서도 이어진다. 음식점에서 일을 돕던 미즈키는 우연히 집안에서 피아노를 발견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미즈키는 후지에에게 갑작스러운 제지를 받게 되고, 후지에와 후지에 여동생 마코의 사연을 듣게 된다. 후지에가 괴로운 과거를 얘기할 때 영화는 관객이 알아차리기 힘든 속도로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한다. 후지에가 사과하고 싶다고 털어놓는 순간, 미즈키와 관객 눈 앞에 마코가 나타난다. 이제는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다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마코는 유스케와 같은 시공간에 속해있다가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미즈키는 놀라지 않는다. 미즈키는 마코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템포에 맞게, 천천히”. 마코가 피아노를 칠 때, 어두웠던 방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서서히 다시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코는 환하게 웃는다. 마코가 환하게 웃는 순간 우리는 소녀가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 후지에의 마코는 사라지고 없다. 마코가 떠난 방엔 빛과 두 사람의 눈물로 채워진다.
상기했듯이 기요시는 유스케의 등장을 평범하면서도 낯설게 처리하면서 유령이 어디서 왔는지를 상기하게 했다. 그렇다면 유령이 자신의 얘기를 마무리한 뒤엔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 먼저 전에 등장한 시마카게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있다. 시마카게의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사라지는 장면은 평범한 일상을 마무리하듯이 어느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마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코는 후지에의 고백 속에서 뭘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 공간에 계속 머물며 죽은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시마카게와 달리, 마코는 후지에의 염원이 불러낸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원하는걸 이룬 마코는 환한 웃음과 함께 밝은 빛이 채워지면서 불현듯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기요시는 각 유령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을 파악하고, 어떻게 사라질지 연출하고 있다.
후지에와 마코 에피소드가 끝나고 기요시는 문득 여행을 갑자기 중단한다. 유스케가 토모코라는 애인이 있다는걸 안 미즈키는 유스케와 다투던 도중 돌아가서 물어보겠다고 뛰쳐나온다. 그 다음 샷에서 미즈키는 자신의 집에서 잠이 깬다. 이때 기요시는 시마카게가 사라진 이후의 공간을 보여주던 방식으로 미즈키의 집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 자체는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을 환몽 구조로 보여주는 흔한 시퀀스이지만, 신문들과 고지서가 보여주는 물질성과 현실성은 영화 내 맥락에서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유령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헛된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무언의 주장이랄까.
토모코와의 대화 끝에 미즈키가 유스케를 부르는 장면은, 미즈키가 유스케의 유령이 절대로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결론 끝에 나왔던 거 아닐까. 그 점에서 미즈키의 집에 등장했던 죽은 식물들과 고지서들은 시마카게의 낡은 꽃처럼 유령과 얽혀있던 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같은 어조임에도 이전에 쌓인 성찰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의심을 품고 있던 관객들조차 이 영화의 세계가 유령이 어떤식으로 살아가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유스케가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유스케와 함께 마을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미즈키는 마을 아이에게 영계로 이어지는 폭포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행방불명된 타카시와 남아있는 카오루의 사연이 등장한 이후, 미즈키는 다시 폭포로 갔다가 죽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여전히 영화 속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등장하지만 이전 장면들과 달리 긴장감으로 차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딸과 비슷하거나 어린 배우가 아버지를 연기하는 부조화도 그렇지만, 유스케를 원망하며 미즈키를 다그치는 미즈키의 아버지는 [절규]나 [회로]에 나왔던 유령처럼 무언가 서늘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그동안 미즈키가 만나왔던 유령들과 달리 유스케처럼 온전히 미즈키에게만 속한 유령이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어쩌면 인간인 네가 이 여행을 올 필요가 없었다고 현실을 재차 각인시켜준 존재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우며 소중한 딸인 미즈키에게 상처를 주는 남편 따윈 잊어버리고 출발하라는 유혹이랄까.
하지만 미즈키는 기요시의 남자들과 달리, 그 유령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미즈키는 이미 여러 명의 귀신과 토모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여행이 3년 동안 비어 있었던 어떤 순간을 채우고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다음 컷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시퀀스에서 우리는 미즈키가 맞이해야할 유스케와의 기나긴 이별 준비 시퀀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사하고도 큰 연관관계도 없는 시퀀스임에도 기요시는 풀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감상적인 음악을 깔면서 유스케와 미즈키가 시골 마을에서 일상을 보내는 과정들을 몽타쥬로 연결해 보여준다. 직전에 등장하는 유스케가 빵 봉지를 잘 못 뜯는 신은, 유스케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암시로 받아들일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신은 직전 신과 이후 신과도 전혀 연관이 없고 의미도 언뜻 파악하기 힘들다. 기요시는 놀이터에서 유스케가 멀리 어딘가를 보는 걸 미즈키가 그걸 바라보게 세팅을 한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 촬영을 한다. 음악이 고조되며 두 사람이 거의 일직선이 되었을 때, 기요시는 미즈키의 바스트 샷으로 넘어간다. 미즈키가 유스케를 바라보고 있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때, 기요시는 달에 구름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이 끝날 때, 앞 뒤 신과 연결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기요시는 인간인 미즈키와 유령인 유스케 간의 어떤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여행이 끝나야만 하는 것임을 드러내게 한다.
그렇기에 후회를 안고 원념이 되어가는 타카시를 성불 시키고, 우주와 시간, 사랑에 대한 다소 장황하고 직설적인 고백이 이어진 뒤 미즈키와 유스케는 섹스를 하게 된다. 실종 직전 부부관계가 그렇게 원만했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이 시퀀스에서 미즈키와 유스케는 마치 신혼여행에 온 부부처럼 몸을 섞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여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증명하듯이 그들은 마지막 행선지인 유스케가 사라졌던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닷가는 솔직히 절경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동아시아 (한국이라면 강원도) 어딘가에 내려서 해변가로 가는 버스 티켓 한 장 얻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어업 도구들과 배들이 널려있는 그런 곳. 기요시는 그런 일상적인 풍경을 애써 지우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적한 풀밭에 배우들을 앉혀놓고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빛과 풀들을 묘사한다. 거기서 유스케는 덤덤히 아름다운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상기했듯이 [해안가로의 여행]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다.
어찌보면 미즈키가 떠나지 말고 여기 계속 있어달라는 지극히 신파적인 고백은, 이야기와 서사가 끝난다는 사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무언가를 얻거나 잃은 캐릭터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 어딘가는 서사마다 다르다.) 우리는 그곳을 따라갈수 없다. 작가 혹은 절대자가 서술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저 우리는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결말은 스파이크 리의 [그녀]에서 사만다가 시어도어에게 더 넓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고 고백하며 떠나가는 결말과 닮아있다.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에서 비롯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이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어떻게 사과할줄 몰랐다고 말하는 유스케의 말에 "원하는건 이뤘어."라고 대답하는 미즈키의 말이 그렇다. 무언가 원하고 있었기에, 불현듯 등장했다는걸 깨닫고 그것과의 여행에서 원하는걸 찾아냈기 때문이다. 유스케가 사라지는 장면은, 상술했던 마코나 타카시가 불현듯 사라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서 충만한 감정을 발견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미즈키는 유령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방식을 이미 충분히 체득했기에, 그 사라짐을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밝은 햇빛을 잠시 만끽할 뿐이다.
스파이크 리는 비물질계로 떠나는 자들을 배웅한 물질계의 두 남녀가 밝아오는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화를 마무리지었다. 기요시는 거기서 조금 더 보여준다. 미즈키는 남편이 돌아오길 고대하며 쓴 기원문을 태운다. 그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성냥곽은 두 개의 시계가 그려져있다. 마치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움직여 온 미즈키와 유스케의 여행을 상징하듯이. 그리고 미즈키는 짐을 들고 프레임 오른켠 앞으로 전진해 사라진다.
미즈키가 사라지는 방식은 유령이 사라지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미즈키는 프레임 안에서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프레임을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난다. 그것이 인간이 사라지는 방식이라고 기요시는 생각했던 것일까. 음악이 흐를때 우리가 볼 수 있는건 이별을 맞이하며 바라봤던 해안가다. 그 순간 이 해안가는 한 유령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프레임 밖의 '더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다. 이때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은 너무나 우아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여행을 정리하는듯한 움직임이라고 할까. 거기서 기요시는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 전작들에서 편린으로 등장했던 유미주의가 완연하게 꽃을 피운다. 이 영화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의심없이 그대로 가져온다고 꼬투리 잡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큐어]나 [회로], [절규]에 내세울 정도로 좋아한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삶과 영화를 좀 더 사랑하는 방식을 배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령이 어떤 시공간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극적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영화 언어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인 힘이 나온다고 할까. 그런 부분에 설득당했기에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겨둔 해안가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Deeper Into Movie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객 섭은낭 [刺客 聶隱娘 / The Assassin] (2015) (0) | 2016.11.24 |
---|---|
완전범죄 [Indagine Su Un Cittadino Al Di Sopra Di Ogni Sospetto /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1970) (0) | 2016.11.14 |
하모니움 [淵に立つ / Harmonium] (2016) (0) | 2016.10.14 |
자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0) | 2016.09.04 |
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 / The 400 Blows] (1959) (0) | 2016.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