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당나귀 EO [EO] (2022)

giantroot2024. 12. 31. 21:11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 EO는 번쩍거리는 붉은 조명 아래에 있는 두 피사체에서 시작한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 카산드라이며 엎어져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서커스 당나귀 EO. 카산드라는 당나귀에서 인공호흡을 하듯 숨을 불어넣는 행동을 하고, 그 순간 EO는 되살아나는 척 연기한다. 붉은 조명이 꺼지고 관중들이 환호한다. 다시 붉은 조명으로 점멸하고, 저속 촬영된 샷에서 카산드라는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춘다. 그다음 샷에서 EO는 가만히 있지만, 카메라는 EO 주변을 회전하고 마침내 EO의 얼굴이 좌우로 반복해 흔들리는 장면을 포착한다.

 

이 오프닝에서 스콜리모프스키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당나귀라는 동물을 영화적 주체로 삼을 수 있을까? 그저 감독인 자신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영화적 주체인 척 살려내고 흉내 내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이 영화에도 동물이 등장하는 대다수 영화가 그랬듯이 동물 조련사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스콜리모프스키의 질문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동물을 움직이게 하느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당나귀 EO는 인간이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없는 동물의 심리를 이해한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이해 불능과 모호함을 그대로 둔 채 시선과 연출이라는 개념을 돌출시키고 그 낯섦을 관객이 재고하게 만드는 영화다.

 

당나귀 EO에서 관객이 가장 자주 마주하게 될 샷은 바로 EO의 눈과 얼굴 클로즈업 샷일 것이다. 영화에서 얼굴과 눈의 샷은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샷이기도 하며, 카메라로 대표되는 시선의 주체를 정립하는 샷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나귀 EO에서 EO의 얼굴과 눈 샷에서 어떤 정형화된 감정과 리액션을 읽을 수는 없다. 영화 초반부, 고철 처리장으로 쓰레기를 나르는 EO는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 다양한 중장비 기계들과 자신을 향해 짖어대는 개를 본다. 하지만 EO는 그저 보기만 할 뿐이다.

 

이 장면뿐만이 아니라, EO가 하는 행동 대다수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카메라가 그것을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샷은 카메라로 찍어야 성립한다. 그 샷에 무엇이 어떤 형식으로 담겨 있느냐에 따라 샷의 성질이 결정된다. 영화 대다수에서 샷은 인간의 시점을 기반으로 인간 캐릭터의 관점에 맞춰 찍혀져 왔다. 하지만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를 찍을 때 동물이 보는 것은 찍을 수 있어도 그 관점에 대해서는 인간의 관점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달리 말해 동물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화적 모순을 품고 시작하는 장르다. 인간을 통해 타자화된 동물 주체의 관점을 인간의 매체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는 동물 영화로서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던 영화다. 브레송은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세속에서 일어나는 수난을 지켜보고 감내하는 자로서 당나귀를 시네마토그래프 모델로서 배치했다. 발타자르는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서고 앉고 누울 뿐이다. 그는 자의적으로 연기하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말에 도달하면, 역설적으로 그런 대상화되고 수동적인 모델로서 발타자르는 작중 어느 인간 캐릭터도 도달하지 못한 숭고함의 영역에 들어선다. 틸다 스윈턴이 상찬했듯이 발타자르는 '연기하지 않고 완전히 드러내기 때문에 이상적인 연기자였으며, EO 역시 그 길을 따른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당나귀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세운 것 역시, 브레송의 성취를 다른 식으로 재해석해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브레송의 영역에서 다시 생각하는 부분은, 불가해한 세계 그 자체다. 우선 스콜리모프스키는 몽타주라는 영화적 문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요청한다. 당나귀 EO를 볼 때 관객은 실제로는 확신조차 할 수 없는 가상의 심리적 서사를 무심코 작동시키다가 다시 고쳐봐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EO가 서커스를 떠날 때 카산드라가 슬퍼하는 샷과 EO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샷 간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서로 연관성 없는 샷과 샷 간의 시너지 효과를 주목한 쿨레쇼프 기법의 논리가 따르면 이 샷들은 EO와 카산드라가 동시에 이별을 슬퍼하는 샷 연결일 것이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반문한다: 그 연결을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당나귀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데?

 

이런 연결의 불확실함은 EO가 수동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액션을 취할 때도 여전히 이어진다. 당나귀 EO는 인간적인 인과관계의 정합성에 대해 무심한, 혹은 무심해지길 요청하는 영화다. 마구간에서 EO가 말과 차별 대접받고 EO가 가다가 트로피를 넘어트리는 장면이라던가 EO가 불법 동물 구금 시설에서 직원 머리를 뒷발길질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들에서 EO가 어떤 감정적인 논리나 정합성을 따라 행동했다고 보면 영화를 잘못 읽는 쪽에 가깝다.

 

특히 후자 같은 경우, 동물 학대라는 현실에 대한 인간-관객의 공분이 동물 주체로 행해진 권선징악적 카타르시스로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독의 여지가 크다. 당나귀 EO를 보는 것은 동물에게 인간적이다, 이입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버릇을 배제하고 서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당나귀의 시선에 담긴 어떤 낯섦과 더불어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인과관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속 아이들이 듣는 파도 소리를 청중으로 착각해 노래하기 시작한 눈먼 노인의 동화는, 이 영화의 태도를 설명하는 삽화인 셈이다.

 

당나귀 EO가 동물 영화에 속하면서도 여타 동물 영화나 다큐멘터리와 다른 방향성을 취하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대다수의 동물 영화에서 동물의 눈과 표정 샷과 몽타주는, 그 동물의 심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우리는 동물의 시선과 행동을 찍은 샷들에서 유사성을 확인하고 감정 이입한다. 상술한 쿨레쇼프적 효과가 동물 영화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본디 인간이 만든 기술 문명이며 영화 문법 역시 인간이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의문을 던지고 소격 효과를 노리는 부분 역시 영화라는 인간 중심적인 매체가 타자인 동물의 감정이나 심리를 포착할 수 있는가? .

 

물론 EO가 카산드라의 환영을 보는 시퀀스 같은 명백히 주체의 감정을 드러내는 몽타주가 있긴 하다. 스콜리모프스키 역시 특정한 샷과 샷 간의 연결이 관객에게 특정한 감정을 환기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달리는 말들과 갇혀서 이동하는 EO의 모습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EO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와 관계없이, 자유와 부자유 간의 대조로 관객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런 감정이 EO한테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지 않을 뿐이다. 당나귀 EO는 그 점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가진 고유한 논리를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고유한 논리를 발타자르가 그랬듯이 EO는 주인공이면서도, 서사의 추동에 있어서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캐릭터다. 브레송은 이를 주인 마리로 대표되는 인간 캐릭터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의 관찰자로 발타자르를 위치시키면서, 피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희생양을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당나귀 EO에서 인간 드라마는 파편적이고, 돌발적이다. 초반부 카산드라와의 드라마가 끝나면, EO가 만나는 사람들은 EO가 진상을 알 수 없는 사연을 지닌,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냥 거기 있었기에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도 있다. 단지 축구장에 나타났기에 승리의 상징이 된 EO의 모습은 인간의 드라마가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의 블랙코미디로 돌변하는 과정을 포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종종 인간과 동물 사이에 어떠한 벽을 형성하기도 한다. 영화는 EO의 시선에서 벗어나 카메라를 인간의 영역에 세우고, EO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특히 비토와 백작 부인의 대화 시퀀스는, 당나귀 EO가 아닌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처럼 보인다. 비토와 백작 부인의 관계는 계급과 종교, 억압된 욕망이 개입된 실내극을 연상케 하는데, 여기서 스콜리모프스키는 명백히 유럽 문학의 데카당스 전통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점에서 당나귀 EO는 그 점에서 인간 세상의 불가해함을 단순한 현실의 모사뿐이 아니라, 데카당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문화에서도 이끌어오고 있다.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서 이런 벽이 형성되면서 불가해라는 공감대가 EO와 관객 사이에서 형성된다. EO는 트럭 운전사 마테오가 밥으로 불법 체류자 여성을 유인하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볼 수 없고, 봤다 하더라도 그 인과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O는 백작 부인과 비토의 근친애적 애증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다툼을 볼 수 없고, 봤다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관객들 역시 상기한 장면들을 보면서 사건의 인과관계나 감정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당나귀 EO의 사건들은 애당초 온전한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인터뷰에서 본작의 편집 방향성은 인간과 당나귀 모두 이해할 수 없도록 잘라내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스콜리모프스키는 영화를 진행하면서 불가해한 사건과 이미지 (혹은 초현실주의)를 배치해나가면서, 인간 중심의 정합적 소통이 아닌 다른 의미의 소통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당나귀 EO에 등장하는 인간 드라마들은 일차적으로 현대 유럽 (인간) 사회의 정경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차적으로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인간 존재의 요소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불가해함 속에서 타자는 정착할 곳 없이 끊임없이 전전한다. 하지만 이 전전은 출구나 돌아갈 곳 없는 전전이다. 카산드라랑 두 번째로 헤어진 순간부터 EO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시포스의 오디세이아에 갇힌 셈이다. 이런 퇴로 없는 여정-로드 무비로 이뤄진 당나귀 EO의 서사는 서구-폴란드를 방황하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본능만으로 전전했던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내세웠던 감독의 전작 이센셜 킬링, 나아가 정치적 난민으로서 반생을 살아온 감독의 삶하고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퇴로 없는 EO의 여정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 바로 영화의 샷과 편집만으로는 여정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동선의 단절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가장 노골적인 동선의 단절이라면, EO가 폭행당하고 난 뒤 로봇 개가 등장한 후 동물 병원으로 실려 가는 장면과 비토를 만나 백작 부인의 저택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전자 같은 경우엔 로봇 개가 EO와 같은 존재인지 여부와 어떻게 수의사에게 발견되었는지를 일부러 흐려두고 있으며, 후자 같은 경우엔 비토가 타고 왔던 승용차가 트럭 뒷좌석으로 바뀌었지만 이에 대한 아무런 부연 설명을 붙여두고 있지 않다. 당나귀 EO에 등장하는 각 장소-시퀀스 사이에는 돌아갈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있고, EO는 그 장벽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계속 나아가다 이탈리아에 도달한다.

 

이 불가해함과 퇴로 없음은 서사적이기도 하지만, 시각적이기도 하다. 당나귀 EO는 붉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다. 당나귀가 붉은색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프레임 전반에 드리운 붉은 색은 당나귀의 관점에서 본 불가해한 (인간) 세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당나귀 EO의 붉은색은 다른 색들을 빼앗고 번쩍거리면서 스크린 속 세상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물든다. 감독의 전작 딥 엔드의 붉음이 자극적인 성적 에너지와 종국에 도달할 우발적 파국의 징조를 담고 있다면, 당나귀 EO의 붉음은 타자가 본 인간 세상 그 자체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는 색깔이다.

 

이런 불가해함 그 자체를 드러내는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나귀 EO의 초현실주의적인 샷 대다수는 인공적이고 미래파적이다. 숲속에 EO를 비추는 저격용 레이저 사이트, 빙글빙글 날개를 돌리면서 새들을 떨어트려 죽이는 풍력 발전기, 어디론가 부산히 움직이는 로봇 개, EO를 검진하기 위해 동원되는 붉은 조명의 의료 기기스콜리모프스키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이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파시즘의 길에 빠져든 일부 미래파주의자랑 달리 그저 경탄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는 인공적인 것을 당나귀-동물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얼마나 폭력적이고 동시에 기이하게 느껴지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인공적인 것들은 EO를 비롯한 유기적인 것에 폭력적이며 나아가 대체하려는 습성을 보인다. 특히 로봇 개는 EO와 대비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O가 폭행당한 뒤 등장하는 이 인공체-로봇 개는 마치 빈사 상태에 빠진 유기체-EO의 존재를 잠시나마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당나귀 EO의 초현실주의는 인공성에 대한 위압적인 낯섦과 존재의 유약함을 동물의 눈으로 환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불가해한 요소를 하나로 묶는 이미지로 스콜리모프스키는 원 형태의 순환 이미지를 제시한다. 당나귀 EO에서 종종 등장하는 원 이미지는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세상의 순환을 보여준다. EO의 여정은 일상의 순환이 붕괴하고 거기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EO는 카산드라와 함께 공연하며 지낸다. EO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을 하지만 동물보호법으로 서커스를 강제로 떠나면서 순환에서 추방당한다. 이 일상이 영구적으로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은 서커스 해체 후 새로 세워진 마구간에서 말이 순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 자리엔 더 이상 EO가 순환할 코스는 없는 것이다.

 

이 순환 속에서 EO가 카산드라를 떠올리고 자신이 있던 장소에서 탈출하는 장면들은 좀 더 살펴볼 여지가 있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고 서사 진행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는 EO가 얼마 안 되게 적극성을 띠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EO가 카산드라랑 재회한 후, 카산드라를 쫓아가는 시퀀스부터 보자. 카산드라는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등장한다. 이 말은 카산드라는 EO를 데려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농장에서 카산드라가 EO를 다시 만났을 때 몇 가지 행동한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 당근 머핀을 먹이는 것, 춤을 추는 것.

 

그런데 이 세 가지 행동은, 자세히 생각해보면 동물보다는 인간 문명에 기반한 행동에 가깝다. 동물에겐 인간과 달리 구체적인 날짜나 생일 개념이 없으며, 당근 머핀 역시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전 시퀀스에서 농장 일꾼이 주는 생당근은 먹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근 머핀을 받아서 먹는 EO의 행동은 어떤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외적으로 춤추는 건 동물들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카산드라가 추는 춤은 본능적 행위보다는 예전에 함께 했던 공연 예술로서의 춤을 상기시키는 쪽에 가깝다. 그렇기에 EO가 농장을 탈출해 카산드라 (혹은 마그다)를 울면서 쫓아가는 것은 단순히 동물이 애정을 줬던 주인을 쫓아가는 것보다는, 절박하게 카산드라로 대표되던 어떤 가치를 좇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O가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카산드라를 떠올리는 순간은 그 점에서 중요하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이 순간 보여주는 것은 햇빛이 나뭇잎에 비쳐 들어오는 샷이다. 이 샷들은 EO의 얼굴 샷에 디졸브 되며 펼쳐지는데, EO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여전히 확언할 수 없다. 다만 EO가 지금 자신이 속해 있는 순간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카산드라가 EO를 부르는 샷이 등장한 후 여기에 반응하듯이 EO가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백작 부인 저택의 현관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 순간 불가해한 세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EO의 욕망에 반응한 것처럼 보인다.

 

밖으로 나온 EO가 도달한 곳은 댐이 있는 다리다. 여기서 우리는 폭포처럼 쏟아졌다가 거꾸로 올라가는 물줄기를 보게 된다. 상술했던 EO의 여정이 순환적인 여정이라고 가정 한다면 이 거꾸로 올라가는 물줄기는, EO의 여정이 끝에 이르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처음이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된 카산드라랑 서커스라고 한다면, EO는 어떻게 처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면 주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죽음을 통해서다. 도살장에서 이뤄지는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충격적이면서도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EO는 도살장 앞에 서 있다. 어떻게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거기까지 갔는지는 늘 그래왔듯이 EO 자신조차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EO가 마주하는 것은 가축들이 만드는 거대한 흐름이다. 어찌 보면 삶의 역으로 향하는 이 흐름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끝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인간이 섭취하는 식품 일부가 되는 살해 현장이다. EO가 맞이할 최후는, 아마 비토가 말했던 살라미 소시지일지도 모른다. EO는 그 흐름을 따라가다가 종종 저항하다가, 어둠으로 들어가면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어둠엔 붉은 조명도, 인공물도, 인간도 없다. 심지어 동물들과 EO 자신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음향으로 끝을 고하는 것도 어찌 보면 모든 것을 가리는 어둠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이 결말은 당나귀 발타자르당나귀 EO의 차이점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브레송의 발타자르에겐 순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발타자르는 중간에 마리를 떠나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간 후 다시 마리에게 오지만, 브레송은 그 동선이 만들어내는 순환성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진 않았다. 브레송이 주목한 것은 카메라 앞에 선 당나귀-모델이 세상이 주는 수난에 어떻게 반응하고, 떠돌아다닌 끝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였다. 반대로 스콜리모프스키의 EO는 거쳐 가는 사람과 장소들이 하나의 점을 이루고 그 점들이 이어져서 거대한 순환의 동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여정은 도살장에서 도축되면서 끝난다. 발타자르의 죽음이 세상의 악의가 만들어낸 순교자의 우발적인 죽음이라면, EO의 죽음은 원의 시작점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세상 그 자체의 퇴로 없음과 불가해함, 폭력성을 드러내는 죽음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나귀 EO는 표현이나 연기를 할 수 없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서사 영화를 찍는다는 화두를 가지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영화다. 하지만 관념은 기본적으로 물질적으로 잡히지 않는 무언가이며, 유물론적인 매체인 영화가 다루기엔 어려운 무언가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인간인 자신은 동물 EO가 구체적으로 어ᄄᅠᆫ 논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동물의 관념을 끝내 찍을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그 고백 위에서 이해 불가그 자체를 영화적인 원동력으로 삼아 당나귀의 시선을 따라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간의 경계를 흐트러트리고,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타자와 불가해한 세상을 그려낸다. 그 점에서 당나귀 EO는 좋은 의미로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표출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