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실리아 [Celia] (1989)

giantroot2022. 4. 25. 00:59

앤 터너의 [실리아]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죽음 이후를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다루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데 [실리아]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받아들임은 ‘괴물’이다. 실리아는 자던 도중 괴물 손이 창문을 침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비명 소리에 달려온 엄마랑 함께 실리아는 ‘괴물’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보게 된다. 요컨데 [실리아]는 죽음 이후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에 매달리는 여자 아이에 대한 영화다. 그렇다면 실리아는 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실리아]는 포크 호러로 분류되는 영화지만, 실상은 포크 호러라는 장르에서 기대할만한 폐쇄적인 시골 공동체나 광기어린 소수 종교 집단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영화다. 오히려 이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호주 중산층 교외다. 자연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문명이라고 할만한 곳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등장인물도 그렇다. 주인공 실리아네 가족들은 예의바른 중산층이고, 새로 이사온 태너 가족나 실리아를 괴롭히는 스테파니네 가족들도 그런 예의바른 중산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고함이 오갈때도 이들은 교양인으로서 품위를 크게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안온한 중산층 세계는 어떤 강박관념과 긴장으로 가득하다. 이런 강박관념과 긴장의 징후는 동화의 인용에서 시작한다. 영화 도입부 직후 실리아는 학교에서 호비야라는 음침한 내용의 실존 동화를 듣는다. 이 동화가 구연되는 동안, 앤 터너는 극중극 형식으로 동화 내용을 재연해서 보여준다. 이 재연 시퀀스는 여러모로 중요하다. 첫번째로 실리아 자신의 집착과 공포가 본인 입장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맥락과 존재감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입부 실리아 방 창문에 들어온 괴물 손의 정체가 이 재연 장면에서 처음으로 밝혀진다는 점이 그렇다. 두번째로 이 구연 시퀀스가 이후 꾸준히 반복될 영화관 시퀀스랑 맞닿아 있다. 호비야 재연 장면과 극중 상영되는 영화 장면 모두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음침하거나 폭력적인 내용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실리아의 시점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 구연이 끝난 후 실리아는 동화책 선물 받기를 원하지만 얻지 못한다. 대신 친구 헤더가 받아서 건네주는데, 실리아가 원하는 것들은 전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후 이 영화가 주인공의 욕망이 좌절되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실리아]가 이 불만족과 좌절을 실리아가 속해있는 역사/사회적 맥락과 프로이트풍의 원형적 가족 갈등과 연결시킨다. 요컨대 [실리아]는 매카시즘-가부장에서 발버둥치려는 미성년-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 매카시즘-가부장이 친아버지 레이나 존 버크로 대표되는 공권력으로 구체화되어 있다는 건 당연하다.

 

판타지 장르에서 프로이트풍의 가족 관계와 갈등, 성장, 정치사회적인 관점을 융합하는 작법은 장르 영화에서 비교적 흔한 작법이라 (일례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가 거의 유사한 작법을 사용했다.) 굳이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 역사의 토끼 사냥이 매카시즘과 연결되는 직유도 장르 영화에서는 흔한 작법이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영화에는 기이할 정도로 친할아버지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리아는 물론이고 아버지 레이나 부인 팻조차 친할아버지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실리아]는 가부장 전통을 잘 언급하려 들지 않는다. 레이가 아버지를 언급하는 순간은 딱 한 번이다: 바로 옆집에 이사온 앨리스 태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집을 지었으며 참새 사냥을 갔다는 얘기를 할때다. 이 다음 대사는 앨리스 집은 그냥 벌판이었다는 내용인데, 레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상징하는 어떤 지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앨리스를 은연중에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레이는 옛 호주 가부장 개척가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고, 우월감을 드러내고 있다.

 

레이의 이런 가부장 계승 심리는 이후 레이가 태너 가족이 공산당원이라는 걸 알고 실리아를 혼낼 때 아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편이다. 심지어 일본인에 대한 혐오를 섞어 표출하니 놓치기 힘들 것이다. 다만 이 대사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데, 레이가 실제로 분노하는 대상은 실리아가 아니다. 실리아는 매개체일 뿐, 레이는 실리아의 친할머니 (즉 레이의 어머니)에게 분노하고 있다. 일본은 물리쳐야 했던 악이지만, 그 악보다 너희 할머니 같은 협력자가 더 문제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건너 뛴 분노라 할 수 있다.

 

레이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로는 실리아가 가족 사진을 가져와 태너 가족에게 보여주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실리아의 할머니는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였고 레이의 청년 시절도 어느 정도 좌파 운동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다 앨리스랑 싸운 후, 레이는 실리아 나이만 했을때 지옥을 겪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레이는 2차 세계 대전을 거쳐 매카시즘 시대에서 가부장의 자리를 차지한 후, 자기부정에 가깝게 한때 자기가 속해 있었던 좌파/여성의 역사를 삭제하려고 한다. 이 삭제는 태너 가족이 떠나게 하는 ‘밀고’라는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런 레이 역시 회색 지대를 오가기도 하는데, 실리아가 소유한 토끼 처분에 대해 존 버크랑 말싸움을 벌이는 시퀀스가 그렇다. 이때 레이는 토끼 강제 소개령에 대해 딸의 반응을 염려했는지 꼭 지켜야 하냐는 반응를 보인다. 만약 [실리아]가 매카시즘에 대한 흥미로운 태도를 보였다면, 매카시즘과 반 매카시즘의 대결 뿐만이 아니라 매카시즘 찬동자들의 회색지대를 묘사하는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런 회색지대에 대한 묘사는 모성을 묘사할 때 잘 드러난다. 특히 실리아의 앨리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리아의 할머니가 죽자 앨리스가 이사 온다는 설정 자체가, 앨리스 자체가 실리아의 결핍을 채워주러 등장한 존재라는 걸 명백히 하고 있다. 앨리스는 그 점에서 사상적인 새엄마인 셈이다. 가부장에 대한 실리아의 분노 역시 대안적인 모성 관계를 삭제하고 에로스의 관계로 강제로 치환하려는 아버지 레이의 시도에서 촉발된다. [실리아]가 원형적인 가족 내 갈등이 어른거리는 성장극임에도 프로이트의 이론과 거리가 멀다면, (아들이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를 적대시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나 (딸이 아버지를 욕망하고 어머니를 적대시하는) ‘엘렉트라 컴플렉스’ 같은 가부장 위주의 에로스적 긴장관계가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에로스는 폭력과 달리 아이들 시점에 맞춰 오프 스크린 신음 소리로 암시될 뿐이다.

 

앤 터너는 이런 가부장-에로스 관계와 모성-결핍 채움 간의 대립을 포옹이라는 제스처로 표현하고 있다. 토끼라는 소재가 단순히 매카시즘 직유 이상으로 흥미로워지는 지점도 포옹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포옹의 거부는, 가부장이 여성에게 무엇을 강요할 때 일어난다. 존 버크가 실리아에게 개를 선물하고 실리아가 뛰쳐나가는 장면이라던가 앨리스가 레이의 애정 행각을 거부하는 장면이라던가 레이의 간통 시도를 알아차린 팻이 레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실제적인 정치적 활동이나 저항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는 걸 생각해보면, 소극적 저항으로 포옹의 거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팻의 이런 포옹에 대한 거부는 팻의 캐릭터성을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팻은 일견 매카시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편의 간음 상대였던 앨리스에 대해 복잡한 심경으로 연대를 표하기 때문이다. 후술할 실리아의 살인을 숨기는 장면에서 정점에 도달하는데, [실리아]의 모성-여성 연대가 체제 밖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실리아가 가부장 아버지에게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가 반-문화적이라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공산당, 일본 노 가면, 호비야, 토끼... 전부 기독교을 중심으로 연합국의 승전에 취해 외부 이민자들을 탄압한 매카시즘 호주 사회에서 거부하는 이미지들이다. 요컨대 실리아는 자신을 지키고 왜곡된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매카시즘이 금기시하는 이미지들에 집착하고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가장 중요한 대항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극중극 영화다. 앤 터너는 가상의 필름 느와르/범죄 영화를 아이들이 감상하고 흉내내는 시퀀스를 꾸준히 넣고 있다. [실리아]에는 동심의 부드러움이 아니라 폭력성에 주목하는 영화인데, 작중에 등장하는 필름 느와르/범죄 영화는 어찌보면 호비야 보다도 그런 폭력성을 잘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영화 상영 앞에 붙은 호주 선전 뉴스릴은 그런 폭력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녔는지에 대한 부연인 셈이다.

 

실리아가 존 버크를 호비야로 착각해 우발적으로 쏴죽인 후 경찰이 부모님과 실리아를 탐문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장면은 철저히 실리아의 주관적인 시점 숏에서 상기한 흑백 B 영화처럼 제시되기 때문이다. 실리아는 ‘살인’이라는 자신의 이해 범주에서 벗어난 사건을 픽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데, 이런 받아들임은 실리아가 호비야 동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현실에 간섭하지 않은 채 실리아의 내적 논리를 설명하는 상징에 머물렀던 호비야 동화랑 달리, 이 B 영화로 왜곡된 탐문 장면은 반대로 진짜로 일어난 현실을 왜곡하고 있기에 섬뜩하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리아는 호비야 동화의 이분법적인 인식에 기반해 호비야=매카시즘을 적대시하고 마침내 살인을 계획한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알게 된 후, 그전까지 이어왔던 실리아의 “나쁜 호비야를 제거하자”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은 붕괴한다. 와중에 실리아를 사로잡은 또다른 이미지인 B 무비가 현실의 관점을 대처하려고 하지만, 실리아는 그 관점의 변화가 일으킨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

 

이렇게 사건은 어머니 팻에 의해 실리아의 범죄가 덮어지면서 끝나고, 가부장 레이는 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도입부 레이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레이가 한번도 울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자. 실리아는 친어머니를 경멸하고 실리아가 간절히 원했던 대리-할머니를 에로스의 영역로 끌어내려 욕망하려고 했던 가부장에게 자신도 모르게 처벌을 내린 셈이다. 프로이트식 가족 갈등은 여기서 마무리 되고 학교로 돌아온 실리아는 그토록 싫어했던 스테파니를 위해 거짓으로 기도하게 된다. 실리아는 팻이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이라는 ‘타락’을 배우게 된 셈이다.

 

결말은 일종의 제의다. 이제 할머니의 환영도, 태너 가족도, 토끼도 없는 채석장에서 실리아는 스테파니 일당과 어울린다. 이들은 버크 순경의 살인마를 잡아서 모의 재판을 벌인 뒤, 사형에 처하는 놀이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 살인자 실리아가 결코 스테파니에게 고백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거짓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걸 실리아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리아에게는 공범자와 거짓된 관계 밖에 없다. 이 황량하고도 우울한 결말은 매카시즘이 아이들에게서 빼앗버린 것이 동심 그 이상이었으며, 그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리아]는 그 점에서 냉전과 매카시즘 속에서 아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광기’와 ‘환영’, 그리고 ‘거짓말’ 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는 독특한 판타지 심리 성장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