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프라운랜드 [Frownland] (2007)

giantroot2020. 10. 25. 01:36

《아빠의 천국》 이후 로버트 브론스타인의 《프라운랜드》를 찾아서 보는 사람은 대체로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통해 거슬러 올라온 사람일 것이다. 《아빠의 천국》 이후 편집과 각본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싶어서 말이다. 사실 《프라운랜드》는 개봉 당시엔, 몇몇 영화제와 뉴욕 아트하우스 영화관을 돌다가 사라진 흔한 동네 독립 영화에 가까웠다. 심지어 "근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최우수 영화상"라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요상한 명칭을 단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흔하다를, 오독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 주목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물을 보면 오히려 아슬아슬하고 뉴욕 독립 영화계에서도 비타협적인 비주류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데뷔작으로 내놓을 생각을 하고, 어떻게든 돈과 스태프를 끌어모았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프라운랜드》는 신경증과 정신병에 대한 영화다. 브론스타인은 이미 첫 장면부터 단서를 던져두었다. 주인공 키스는 텔레비전으로 테렌스 피셔의 《프랑켄슈타인과 지옥에서 온 괴물》를 보고 있다. 보통 영화가 영화 관람을 인용할때는, 등장인물의 상태와 내면을 반영하는 단서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키스가 보고 있는 《프랑켄슈타인과 지옥에서 온 괴물》의 장면은 괴물이 절망해서 주변을 부수는 장면이다. 즉 브론스타인은 이 영화가 괴물의 절망과 좌절을 다룰 것이라는 경고를 달아둔 셈이다.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게 좋다. 《프라운랜드》는 쉬운 영화가 아니다.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 영화의 코미디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불안함을 가지고 자해를 하며 웃고 우는 광대의 그것이다. 《프라운랜드》의 자해적 블랙 코미디는 그 점에서 토드 필립스의 《조커》를 미성숙한 투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키스는 어떤 종류의 괴물인가? 키스의 로라가 찾아오면서 관객은 키스가 겪고있는 문제를 알아차린다. 키스는 과도할 정도로 자존감이 부족하고, 말을 더듬는데다 눈치가 없는 신경증 증상을 앓고 있는 남자다. 브론스타인은 이 시퀀스에서 서사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키스의 신경증을 데드 타임 숏으로 표현한다. 키스는 로라를 달래려고 하지만, 이 시도는 로라가 던진 핀이 키스의 팔에 꽃히는 참사로 끝난다. 이때 클로즈업 되는 핀의 숏은 영화의 불편한 감수성을 잘 압축하는 숏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장르 호러 영화는 아니지만, 브론스타인은 고어 이미지의 불편하고 폭력적인 감수성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이 영화는 《말끔히 면도한 Clean, Shaven》으로 유명한 로지 케리건의 지지를 받았는데, 케리건이 뉴욕 출신이며 《말끔히 면도한》이 고어와 정신분열 묘사로 유명해진 영화라는걸 생각하면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떤 걸 발견했는지 알 수 있다.

여러모로 키스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주인공이다. 우선 키스의 직장은 방문 세일즈맨이다. 그 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일을 하고 있으니 어떤 장면이 나올지 예측이 될 것이다. 키스 주변의 인물들도 키스의 문제를 받아주기엔 한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샌디도 그렇지만, 전자 음악가 지망생인 동거인 찰스는 자기 건사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다. 영화의 형식 역시 키스에게 불리하다. 형식상으로는 《프라운랜드》는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멈블코어 영화다. 하지만 키스에게 필요한거는 대화가 아니라, 이해다. 이러니 《프라운랜드》의 멈블코어가 공포로 가득차는 건 당연해진다. 《프라운랜드》는 이해가 없는, 의미가 사라진 폭력적인 대화로 가득찬 영화다. 이 영화에 대화가 이뤄지는 장면은, 역시 자살 충동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로라에게 키스가 푹 자라고 충고하는 장면 뿐이다.

브론스타인은 전형적인 멈블코어 영화에 내재한 중산층 백인 지식인의 안락함을 경멸한다. 경멸한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게, 멈블코어 장르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우디 앨런 영화의 신경증도 어느정도 공감을 살 수 있는 수준에서 멈췄다면, 브론스타인은 그 공감대와 거리마저 제거하고 관객들에게 묻는다. "자 너희들이 애써 외면해왔던 캐릭터가 있다. 이런 짜증나는 캐릭터도 이해하고 공감해줄수 있냐"고. 브론스타인의 경멸은 뉴욕 변두리를 떠도는 2-30대 청춘의 현실로도 이어지는데, 키스의 동거인 찰스가 주인공이 되어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시퀀스가 그렇다. 여기서 브론스타인은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가 그랬듯이 현학적인 헛소리로 '소통'이 '불통'에 이르는 과정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찰스와 시험 응시자가 계단참에서 '시험으로 대표되는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싸우는 장면은 《네이키드》에서 밤거리를 쏘다니던 자니가 경비원과 기나긴 현학적인 대화하는 장면과 닮아있다.

차라리 이 영화의 직계 선조는 멈블코어보다는 신경증을 다루는 영화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브론스타인이 영화 발표 후 언급한 감독은 존 카사베츠, 프레드릭 와이즈만, 조지 로메로다. 다소 알쏭달쏭한 프레드릭 와이즈만 언급은 (아마도 대상을 바라보는 기계적이고 건조한 관점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제외하더라도 존 카사베츠와 조지 로메로는 《프라운랜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프라운랜드》는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의 후계라 할 수 있는 영화다.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에서 카사베츠는 신경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비호감'적인 기행으로 현실과 충돌하는 중년 여성의 초상을 자유분방한 연기와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프라운랜드》 역시 감독이 친척 장례식장에서 만났다는, 키스 역의 도어 만이 보여주는 폭발적이면서도 예측불허하게 흘러가는 연기에 기초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고 난 뒤, 서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처럼 도어 만의 연기는, 정말로 연기를 한 것일까? 아니면 본인의 우울증과 신경증을 투영한 것인가? 싶은 부분이 있다. 다만 캐릭터 조형과 질감면에서는 조지 로메로의 《마틴》의 영향력이 강하다. 표면적으로는 흡혈귀 영화인 《마틴》은 반전 도형식 장르 활용 ('과연 마틴은 흡혈귀인가?')과 더불어 피츠버그라는 지역 영화의 정체성에 기반한 지저분한 질감으로 포착한 현실 묘사로 위축되고 소외된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기도 했다. '남성성'의 위축이라는 관점에서 브론스타인은 《마틴》에서 흥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16mm 필름으로 찍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다만 브론스타인은 표현면에서는 이미지와 음향을 추상적이면서도 자극적으로 조합하는, MTV 이후 세대의 감독에 속한다는 점에서 로메로하고는 노선을 달리한다. 브론스타인이 합류한 이후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면, '편집'과 '음향'을 꼽고 싶다. 캡틴 비프하트의 앨범 수록곡에서 빌려온 제목처럼, 《프라운랜드》은 음향이라는 요소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는 영화다. 찰스가 전자 음악가 지망생이기 때문에, 그가 만드는 전자음들이 배경 음악처럼 등장한다. (음악 팬들이라면 온갖 포스트 펑크 뮤지션 인용에서 브론스타인의 음악 취향을 알수 있을 것이다.) 이 음악들은 좋은 의미로 자극적이고 신경질적이다.

그리고 이런 음향이 《헤븐 노우즈 왓》, 《굿타임》이나 《그녀의 내음》 같은 뉴욕 독립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촬영감독 션 프라이스 윌리엄스가 촬영한 형광빛의 색감으로 가득한 화면과, 날카롭게 져며진 숏과 결합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혹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키스가 정신붕괴를 일으켜 아무데나 방황하며 사고를 치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 점에서 무시무시한 지옥도다. 카메라는 중심을 잃어버린 핸드헬드로 멀미에 가까워지면, 음향 연출은 잡음에 가까워지며, 도어 만의 연기는 진짜로 사고 친걸 찍은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워진다. 사프디 형제가 《프라운랜드》에 흥미를 보이고 브론스타인을 끌어들인 것 역시, 음향과 촬영, 편집 기술, 그리고 이를 종합해 만들어내는 심리 묘사와 불안함의 감각 아닐까 싶다.

《프라운랜드》의 끝은 그런 지옥도에서 빠져나와 동터오는 폐허에 기진맥진한채로 홀로 남은 자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양가적이다. 키스는 이해해주거나 이해해줄 자를 끝내 찾지 못하고 버림받았다. 지독한 절망의 수렁에 빠져있는 셈이다. 그러나 키스는 자살하지 않고 동터오는 아침을 맞이한다. 그 아침 해의 빛 이미지가 아름답기 때문에, 《프라운랜드》는 절망 속에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결국 키스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고, 계속 고통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브론스타인은 말한다. 냉정한 관찰이지만, 브론스타인은 그럼에도 키스의 삶은 항상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거친 티가 나지만 《프라운랜드》는 문제적인 인물을 관찰하는 집중력에 있어서 흥미로운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많은 대중들에게 환대받지 못했고, 브론스타인은 무명의 늪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빠의 천국》 이후 사프디 형제랑 같이 작업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단독 영화는 아직도 없는 상태다. 브론스타인이 《프라운랜드》 후속작에서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희망을 선택할것인가라는 대한 답은, 지금 당장은 기다려야 할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