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TAR 타르 [Tár] (2022)

giantroot2023. 7. 10. 21:55

토드 필드의 TAR 타르는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몰락 비극 서사를 다루는 영화다. 인물이 내적 결함으로 몰락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이지만 그 몰락의 과정이 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 지휘자 리디아 타르의 몰락기는 온갖 문학적 상징성과 알리바이로 가득하다. 리디아 타르는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남성의 영역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또는 정체성 정치의 성공 사례로 내세울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자로서 타르는 현실의 남성 권력자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비서를 하대하며, 학생들을 조롱하면서도 성적으로 유혹하려는 타르의 모습은 분명 미투 가해자로 언급할 수 있는 해로운 권력자다. 토드 필드는 음영을 명백히 드리우지 않는 작극술로 타르 캐릭터를 어떤 관점으로 봐도 성립할 수 있도록 노련하게 구축한다.

 

하지만 그런 노련하지만, 정석적인 캐릭터 작법보다, TAR 타르가 논쟁적인 영화가 될 수 있는 지점은 따로 있다. 타르가 무시한 이물성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토드 필드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TAR 타르가 영화 후반부까지 타르 본인이 속한 클래식 업계, 정확히는 서구 상류층 세계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라는 걸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공간으로만 보자면, TAR 타르는 베를린과 뉴욕 맨해튼이 세계의 전부라 가정하려고 하는 영화다. 설정상 타르는 해외에서 음악 연구를 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장소를 타르의 대사와 결과물인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타르가 뉴욕 이외의 장소로 악단을 이끌고 다른 장소로 연주회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어떤 지점에서 TAR 타르는 뉴욕 맨해튼과 베를린이라는 거대한 실내로 이뤄진 실내극이다. 비록 실내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전용 비행기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TAR 타르에서 인물이 거니는 공간은 근현대 서구 건축이나 미술이 이뤄놓은 총화와도 같다. 타르의 집과 작업실이 대표적이다. 서구 문명이 교양의 척도로 삼았던 최소주의 아파트 ()과 고전주의풍 아파트 (작업실)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타르가 속한 현실의 클래식 업계가 어떤 미적 가치로 소비자에게 어필하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클래식은 기본적으로 이물을 허용하지 않는 우아함을 최우선 가치를 내세우는 장르다. 이는 영국 록 음악가 자비스 코커가 팝 음악에 대해 "팝 음악은 싸구려 전율에 관한 것이다. 최초 그것은 덧없고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었고 누구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으리라 보았다. 그러나 팝은 어느 순간에 특정 감정을 구체화할 줄 안다.”라고 했던 것과 대조된다. 클래식은 몇백 년 이상 존속해왔고 존속할 우아한 감흥을 다루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 감흥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의 미감이 필요하다. 그 일정함이 자본가의 미학과 재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TAR 타르에서 주인공 리디아 타르가 사는 세계는 시청각적으로 완벽하게 자본가의 역사와 미학으로 무장된 교양의 천당이며, ‘싸구려 전율혹은 이물을 용납지 않는 세계다.

 

타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본인이 이를 시간을 지배한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토드 필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물적인 요소들이 타르의 지배와 권력, 정신을 서서히 없애기 때문이다. TAR 타르는 단정한 부르주아적 프레임으로 구축된 타르의 권력 토대에 소음이나 오물로 대표되는 이물성을 첨가하면서 권력의 붕괴를 끌어낸다. TAR 타르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처럼 이물적인 소음이 외화면에서 내화면으로 침범해 주인공을 호명하는 영화다. 단 깨달음의 실마리였던 메모리아의 소음과 달리, TAR 타르의 소음은 비명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점, 타르의 업보로 상징되는 캐릭터와 관련 있다는 점, 주인공 타르를 괴롭히고 붕괴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명백히 호러 장르 작법에 가깝다. 소음은 이내 무균적인 타르의 공간에 침입해온다.

 

이 이물적 침입자가 단순히 소음 같은 소리적 형상이 아닌 시각적 형상으로도 등장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레임 단위로 숨겨둔 크리스타의 유령이라던가 작업실 옆집의 치매 노인이나 타르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담긴 크리스타나 프란체스카의 메일/문자, 타르를 반대하는 시위자들 같은 시각적인 형상으로 변주되며, 시시각각 타르의 부르주아적인 미감과 시간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파괴하고 추악한 면을 인정하라고 압박한다. 그 점에 있어서 토드 필드가 단순히 캐릭터와 드라마를 중시하는 드라마티스트로서의 야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준다. 이 이물로서 소음의 복수극은 타르가 모든 걸 잃고 작업실에서 아코디언을 뜯으면서, 자신이 그 소음이 되어 발광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물적인 시청각 요소들에 대한 타르의 공포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로는 폐허 아파트 지하실에서 개와 마주하는 시퀀스가 있다. 타르는 어린 여성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자신이 결코 가까이하지 않을 장소로 가지만 거기서 만나는 것은, 욕망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이때 토드 필드가 주목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공간의 폐허성이 만들어내는 위협이다. 그 누구라도 살지 않을 법한 물과 어둠 같은 이물적인 요소들은 지금까지 타르가 안락하게 여겨왔던 공간들의 이미지와 대치하면서 붕괴의 위험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가장 불가해하고, 니콜라스 뢰그의 공포 영화 쳐다보지 마라의 마지막 난쟁이 살인마와의 조우를 연상케 하는 이 시퀀스는, 그러나 동시에 희극적인 시퀀스이기도 하다. 쳐다보지 마라의 존은 상실의 고통 끝에 죽음과 어리석음에 잡아먹힌다는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하지만 권력자로서 욕망을 휘두르는 쥐RAT 타르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발버둥과 이후 이어질 기만적인 거짓말 밖에 없다.

 

소음 그 자체가 되어 베를린과 맨해튼에서 쫓겨난 타르는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로 향한다. 그곳에서 위키백과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타르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리디아 타르, 아니 린다 타르의 집은 맨해튼이나 베를린에서 볼 수 없었던, 미국 서민들이 사는 목제 주택이다. 이때 타르가 뿌리를 잃은 (혹은 내버린) 자라는 사실은 대사로도 명백히 제시된다. 자신이 부정해왔던, 혹은 억압했던 이물적 소음의 고발로 추방된 타르는 자신의 방에서 어렸을 적 순수하게 음악에 몰두했던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필드는 박제되고 낡아버린 비디오 이미지를 통해 지금껏 이물적이라 치부하고 내버려 둬왔던 과거의 뿌리를 타르가 다시 반추하도록 유도한다.

 

타르가 미국을 떠나는 방식은, 이전처럼 비행기의 직접적인 제시가 아닌, 공항으로 데려다 줄 기차역 숏으로 제시된다. TAR 타르가 제일 이상해지는 부분은 그렇게 미국을 떠난 타르가 동남아시아 (아마도 필리핀)에 당도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영화는 철저히 이물적 공간에 짓눌린 타르라는 구도로 진행한다. 동남아시아 시퀀스의 모든 숏에서 타르는 풀 숏이나 롱 숏으로 배경의 일부처럼 그려지며,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역시 위압적인 톤이 죽어 있다. 그렇게 짓눌려 있음에도 타르는 이 세계에서도 권력자의 속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할리우드 영화 촬영 도중 도망친 악어를 언급하는 대사나 오케스트라 형태로 배치된 마사지룸 시퀀스는 그 함의가 노골적이라 따로 분석이 필요 없을 정도다. 타르는 동남아시아라는 이국에서도 완전히 힘을 잃지 않은 백인 문화 권력자다. 타르는 이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완전히 동남아라는 이물적인 세계에 배합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결말은 그 미심쩍음을 더욱 증폭시킨다. 타르는 몬스터 헌터라는 게임 사운드트랙 연주회 영상의 타이밍에 종속된 지휘자가 된다. 타르는 이 일을 생존을 위해 받아들인 건 명백하다. 타르가 몬스터 헌터를 언급하는 부분은 여성 작곡자라는 키워드뿐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물적인 요소들은 서로 어긋난 메시지를 송출하고 있다. 타르가 연주하는 몬스터 헌터작품의 부제는 월드, 연주하는 곡 제목은 친구와의 만남이다. 얼핏 보면 타르는 또 다른 세상,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서 있는 이물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서는 타르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EDM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일단 이 배에 타면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비장한 게임 도입부 내레이션과 달리, 정작 그 불가능함을 대하는 타르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트래킹 아웃으로 몬스터 헌터코스프레를 한 관객들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 트래킹 숏에는 타르 자신의 오만함이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 결말에서 타르 개인의 감정과 심리를 확인할 숏은 부재한다. 몬스터 헌터연주회 청중에겐 말러 연주나 뉴요커 행사의 청중과 달리 리액션 숏이 등장하지 않는다. 타르와 몬스터 헌터연주회 청중은 일견 수평적인 트래킹으로 융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몬스터 헌터사운드트랙 연주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타르가 대신 지휘하게 된 투자자를 들이박지도, 집주인에게 분노하며 고함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화면에서 비장하고 웅장하게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을 알리는 게임 내레이션은 이내 정당한 감정선을 부여받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워진다. 몬스터 헌터로 대표되는 팝 컬처의 음향과 동남아시아 문명은 이물적이지만, 위협적이지는 못하다. 이는 TAR 타르가 작중 이물성에도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TAR 타르의 엔딩은 내레이션 말마따나 타르에겐 신세계다. 문제는 이 신세계가 지금까지 타르가 속한 구세계의 이물성과 달리, 타자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타르를 천천히 파괴한 기존의 이물성과 달리, 또 다른 이물성인 팝 컬처는 영상에 맞춰 타르의 음악적 시간을 통제할 뿐 예술적 가치를 재고하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몬스터 헌터청중들은 타르가 어떻게 이 몬스터 헌터무대에 섰는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타르의 몰락과 재기의 발버둥이라는 결과와 행동을 증언하는 상징과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TAR 타르가 도입한 이물성이, 일견 다채로운 팔레트와 정교한 활용과 달리 최종적으로 타르를 처벌하는 기능적인 요소로만 쓰인 후, ‘팝 컬처비서구라는 토드 필드 자신에게 타자에 속하는 이물성에는 경계를 긋고 차별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