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 [The Pleasure of Being Robbed] (2008) / 사프디 형제 단편선 (2006~2012)

giantroot2020. 10. 17. 00:49

2018/01/10 - [Deeper Into Movie/리뷰] - 굿타임 [Good Time] (2017)

조시 사프디의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아빠의 천국]으로 사프디 형제라는 이름으로 창작 활동하기 전, 조시가 먼저 만들었던 장편 영화다.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이 영화는 앤디 스페이드라는 사업가의 아내 케이트가 운영하는 케이트 스페이드 핸드백 광고용 프로젝트가 확장된 결과물이라고 한다. 요컨대 CF 영화인 셈이다. (실제로 핸드백 클로즈업이 자주 등장한다.) 조시 역시, 시나리오를 쓰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게 분명한데, 구조가 상당히 헐겁기 때문이다. 서사 역시 엘레노어라는 도벽이 있는 여자가 뉴욕과 보스턴을 오가면서 여러가지 물건을 훔치고, 도중에 만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는 에피소드 형식을 띄고 있다. 후반부에 전개 방향이 바뀌긴 하지만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헤븐 노우즈 왓] 이후 사프디 형제 영화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다.

미국 독립 영화계에서 흔한 멈블코어 장르의 영화라 볼 수 있지만, 사프디 형제(와 로널드 브론스타인)은 이 장르에 대해서 균열을 가하는 쪽에 가까웠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헤븐 노우즈 왓]이나 브론스타인의 [프라운랜드]처럼 장르에 침을 뱉는 수준의 반 멈블코어 영화까진 가지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낯선 인물을 멈블코어 장르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영화다. 엘레노어는 [헤븐 노우즈 왓]의 할리처럼 마약 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숙자까지는 아니지만, 도벽 증상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하지만 조시는 엘레노어를 문제 있는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은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을 보면서 엘레노어가 온갖 수단으로 '훔치는' 걸 관찰하게 된다.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가 그랬듯이, 조시는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이 소매치기나 절도를 행하는 손 이미지의 은밀한 긴장이라 본다.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의 흥미로운 점은 그런 관찰에 비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반부 이전까지 엘레노어는 한번도 절도 행위로 경찰에 잡혀가지 않으며, 물건을 도난당한 사람들은 서사에서 사라져버린다. 심지어 애완동물이 가득 담긴 가방처럼 도난당한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도 보인다.엘레노어가 도벽을 제외하면 상당히 밝고 사교적인 성격이라는 점도 한 몫한다. 이 의도적인 생략은, 후일 사프디 형제가 만들 영화들에서 보일 사실주의의 틀을 비집고 나오는 캐릭터의 내면에 기반한 초현실주의를 암시케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후술하겠지만 조시는 영화 후반부에 동물원 시퀀스에서 이런 초현실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핍진성 같은건 버리고 오로지 욕망과 충동의 흐름으로 밀고가는 영화다. 영화는 이런 욕망과 충동의 흐름을 '산보' 나아가 '여정'으로 묘사한다. 종종 등장하는 뉴욕 지하철을 기다리는 엘레노어의 숏에서 눈치챘겠지만,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산책하는 '거리의 산보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끌고간다. 엘레노어의 산보가, 뉴욕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이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분석하면서 도입한 '산보' 개념과 닿아있기도 하다. 이런 산보는 뉴욕을 벗어나는 여정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좋은 예로, 조시 본인이 연기한 캐릭터가 면허가 없는 엘레노어에게 운전을 가르치면서, 훔친 차로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가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조시는 존 카사베츠가 그랬듯이 최소한의 상황과 설정으로 즉흥적인 연기의 주고받음으로 흘러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다만 이런 즉흥성이 종종 지나치다는 생각도 드는데,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가 포착하는 숏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연결하는 몽타주는 모티브가 된 카사베츠의 영화들과 달리 다소 두서없고 불분명하다는 느낌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적인 인물을 내세워 집중력을 잃지 않는 로널드 브론스타인과 달리 조시 사프디는 서사를 꾸리면서도 로맨티시즘과 초현실주의로 서사를 일탈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그런 일탈이 서사 대다수를 차지해버리니 '의미'를 부여하는게 좀 과대해석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다소 초현실적인 엘레노어의 절도 행위 역시 카메라로 포착한 뉴욕의 소외된 자하고 조응하기엔, 지나치게 달콤한 질감이라는 점도 단점이다. 요컨대 아직은 초짜의 서툰 티가 나는 영화다. 후반부 경찰이 등장하는 전개도, 다분히 '끝'을 맺기 위해 만들어진 티가 난다.

그럼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엘레노어의 '일탈'이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엘레노어는 계속해서 '일탈' 행위를 지속할 거라는 쓰디쓴 관점에 있다. 단편 [우리는 동물원에 간다]를 의식한듯한 자기반영적인 전개도 그렇지만, 조시는 엘레노어의 아름답지만 불안정한 상황을 진짜 북극곰이 인형옷을 입은 북극곰으로 대체되어 노는 어설프지만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환상' 시퀀스와 경찰에서 풀려난 뒤로도 일탈을 지속하는 '현실' 시퀀스로 이어서 보여준다. 이 관점은 [헤븐 노우즈 왓] 이후 사프디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씁쓸함과 맞닿아 있다. 그 점에서 [도난 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아름다움과 불안정함의 경계선상에 선 사프디 형제의 인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볼 수 있는 영화다.


우리는 동물원에 간다 [We're Going to Zoo] (2006, 조시 사프디)

조시 사프디는 이 영화를 만든 후 "좀 가식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라캉의 거울 단계에 비유했다. 아마 이 비유는 영화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의미로 받아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동물원에 간다] 그 자체는 두 남매가 동물원에 가다가 히치하이커랑 친해진다는 단순하고 귀여운 영화기 때문이다. 단지 구조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목적보다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서사 구조를 어느정도 벗어나고 있다. 조시는 이 영화에서 남매의 시선에서 다소 돌출적인 성격의 히치하이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한다. 이런 관찰을 통해 다소 딱딱하고 퉁명스러웠던 남매도 누그러든다.

이런 과정에 집중하며 인물을 관찰하는 영화의 태도가 딱히 새로운건 아니다. 지겹게 언급될 존 카사베츠나 마이크 리를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다만 흥미로운 숏가 있다. 남매가 동물원에 들어가는게 실패한 뒤, 등장하는 동물들의 숏이다. 이 숏의 주체가 남매가 아니라는게 분명하기 때문에 대체 누굴 위한 숏일까/누구의 시점으로 이뤄진 숏일까, 의구심이 든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가 종종 사적인 경험을 토로했으며, 상술한 인터뷰의 라캉의 거울단계 얘기를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분명 경험했을 어쩔수 없는 '아까움'에 대한 다독임 ("그래도 가는 동안 즐거웠잖아") 이 아니었을까?

외로운 존의 지인들 [Acquaintances of a Lonely John] (2008, 베니 사프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There's Nothing You Can Do] (2008, 조시 & 베니 사프디)

로맨티시즘의 기운이 보이는 조시 사프디랑 달리 베니 사프디의 단편들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외로운 존의 지인들]은 케빈 스미스의 [점원들]을 연상케하는 편의점 배경의 코미디다. 베니 본인이 연기하는 존은 집에서 나와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 직원인 친구랑 노닥거리면서 존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몇명은 불쾌하고 몇명은 우스꽝스럽다. 전형적인 편의점 영화의 형식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건, 괴상한 인물들의 돌발적인 행동이다. 존의 지인과 손님들은 다양한 행동으로 존을 당혹케하거나 종종 소통으로 이어진다. 이런 괴상한 인물들의 돌발적인 행동에서 발생하는 신경질적인 웃음은 형제의 동료인 로널드 브론스타인하고 닮아있지만 무게감은 브론스타인보다는 덜하다. 반면 조시랑 공유하고 있는 지점도 있는데, 편의점에 들락날락거리는 컬러풀한 뉴욕 시민들에 대한 관찰이 그렇다. 이 시민들에 소외된 자가 있는건 당연하다.

공동 감독했지만 베니가 주역인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역시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4분이라는 길이 때문에 '즉흥 행위'에 가깝다. 버스 내 난동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특이점은, 감독 이름을 지우고 보면 유튜브에 자주 보이는 대중 교통에 등장한 진상들을 보여주는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의 카메라는 2000년대 후반 보편화된 '사건의 목격자/기록자로써 스마트폰'을 의식케한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프디 형제의 동료들이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비추는 숏에서는 이 영화가 얼마나 '연출'되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 점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현실과 픽션 간의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검은 풍선 [The Black Balloon] (2012, 조시 & 베니 사프디)

이 영화는 알베르 라모리스의 1956년 단편 [빨간 풍선]의 오마주다. 라모리스는 [빨간 풍선]에서 대사 없이 빨간 풍선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사건들과 마주치는 모습을 담아냈다. 이 사건은 순수한 모험의 쾌감이기도 했고, 아이들의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빨간 풍선]은 그 점에서 유성 영화만이 가능한 '음향은 있지만 대사는 없음'를 기조로 색채와 운동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도구와 강렬한 관찰로 빚어낸 걸작이었다. 하지만 사프디 형제는 이 이야기를 뉴욕으로 끌고 오면서, 대사를 쏟아낸다. 자칫하면 실패한 오마주로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제법 영리하게 오마주를 수행해냈다.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 풍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이런 뉴욕의 풍경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조감하는 관찰자로써 '검은 풍선'이 있다. '검은 풍선'이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 속 인물들은 뉴욕의 허세와 위선, 쓰레기장, 해체된 가정, 이민자 부자의 어려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프디 형제는 원작이 색채와 운동으로 빚어낸 상징적인 시라는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검은 색이 어떤 사회적 상징과 의미를 지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검은 풍선]의 검은색은 흑인으로 대표되는 소수 인종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도구로써 이용당하는 약자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느쪽이든 검은 풍선은 터질것 같은 위태로움으로 뉴욕을 '횡단'한다. 이 횡단의 사운드트랙으로 프로그레시브 밴드인 Gong이 작곡한 절망적인 분위기의 'Zero the Hero and the Witch's Spell'이 깔리면서 강렬한 시청각적 심상을 제공한다. 검은 풍선이 차 유리창을 깨고 풍선을 날려보내는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원작과 다른 묘한 미적 쾌감을 안겨준다. 움직이면서도 무력하게 조감할 수 밖에 없던 검은 풍선이,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비록 하늘 높이 날아가서 터지는 것이라 해도 '해방감'으로 가득하다는건 변치 않는다. [검은 풍선]은 그 점에서 [헤븐 노우즈 왓]의 전초전과도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