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포제서 [Possessor] (2020)

giantroot2023. 5. 25. 23:35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두 번째 영화 포제서는 전형적인 BSF/호러 영화의 콘셉트에서 시작한다. 타인의 인격을 빼앗아 살인을 저지르는 청부살인업자라는 설정은 SF나 호러 장르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기 드문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격 해킹을 다루는 방식에서 포제서만의 개성이 드러난다. 포제서의 인격 해킹은 주술이나 마법 같은 비논리적으로 기운 방법론이나 데이터로 치환한 전뇌 같은 중간자적인 매개체를 활용한 방법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간의 신체/의식을 연결해 바꿔치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막상 신체를 관장하는 정신이 어떻게 동작하는지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모순된 정체성에 놓여 있는데, 브랜던은 정체성 연기와 혼입 몽타주, 그리고 질감이라는 도구로 이 모순된 미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충돌, 갈등을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는 주인공 타샤 보스 (안드레아 라이스보르)가 침투한 흑인 여성 홀리 버그먼이 화장실에서 머리에 금속 임플란트를 꽂고 기계를 맞추는 클로즈업 숏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관객을 움찔하게 하는 이 고어 숏은 브랜던의 데뷔작인 안티바이럴에서 시드 마치 (칼렙 랜드리 존슨)가 바이러스 검사를 위해 집에서 면봉을 코를 깊숙이 찔러넣는 클로즈업 숏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표한 두 영화에서 브랜던 크로넨버그는 신체를 스스로 훼손하는 자학을 자신이 아닌 이물질/타자와의 접속을 시도하는 도구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로서 자해는 타샤가 홀리의 신체를 빠져나오려고 시도할 때 자신을 총으로 위협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다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학을 통해 홀리 신체에 본격적으로 적응한 타샤의 첫 행동은 다름 아닌 표정 짓기다.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연습한 눈물은 암살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암살에 성공한 타샤가 신체에서 탈출하려고 할 때 눈물이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눈물은 무엇을 뜻할까? 어떤 행동 숏이 영화 속에서 대구를 이룬다면 그 대구는 연계된 의미를 형성한다. 타샤는 눈물을 타자의 신체에 안착하기 위해 쓴 뒤, 그 신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한번 쓴다. 즉 타샤는 눈물이라는 감정 표현을 신체를 출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타샤가 시도한 눈물 흘리기는 그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연습이자 탈출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이 장면은 그 점에서 감정 표현이 심리 표출이 아닌, 어떤 정체성 확인의 도구로 기능하는 세계에 있다는 걸 관객에게 주지하고 있는 셈이다.

 

타샤는 왜 타인의 신체에 들어가서 눈물을 연습해야만 했을까? 타샤가 암살을 끝내고 난 뒤 등장하는 두 장면은 타샤의 연기 연습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다. 타샤는 암살 기관에서 일하는 청부살인업자다. 타샤는 암살하기 위해 타인의 신체에 잠입해 의태하는 방식을 취한다. 암살 임무가 끝나고 정체성이 보존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기관의 테스트에서 타샤는 나비 박제를 보고 죽음에 대한 불편한 기억을 떠올린다. 표면적으로 보면, 남아 있는 인간적인 감정망설임이 타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감정을 장르적인 암살자 액션 영화처럼 냉혹한 캐릭터의 인간적인/복합적인 일면 같은 캐릭터 구축이나 공감대 형성으로 쓰지 않는다. 오히려 기관의 담당자인 거더는 타샤의 존재, 나아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경고는 서사 상에서 타샤의 가족이 타샤의 무른 점때문에 위험에 휘말릴 것이라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브랜던 크로넨버그는 이 경고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집으로 가던 타샤는 멈춰서서 가족에게 전할 표정과 감정, 대사를 연습한다. 어색하고 불편한 연습 후 타샤는 집에 들어가 가족들을 맞이한다. 이 시퀀스를 통해 일반적인 아내/어머니상을 불편하게 여기지만 연기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숏은 언급했던 도입부의 표정 연습 숏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타샤는 다른 신체의 인격에 잠입할 때도, 가족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자기 얼굴과 목소리를 다듬으며 연기한다. 어느 쪽이든 타샤는 연기를 통해 자신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타샤 가족이 결말에서 맞이해야 할 위기는 인간적 감정에서 비롯된 구멍이 아닌 연기의 붕괴에 기반하고 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는 이 점에서 현대인의 자아와 정체성은 결국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대외적인 연기에 기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연기가 위태로운 경계에 있다는 건 자명하다. 타샤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시퀀스 후반부에, 타샤는 남편 마이클과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런데 타샤는 섹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임무 도중 살해 대상 목에 칼을 찌르는 회상 숏을 떠올리게 된다. 섹스를 마친 타샤는 부엌에서 마이클을 바라보는데, 마이클은 목에 칼을 찔려 피를 흘리고 있다. 타샤의 머리에서 상상된 비일상에 기반한 회상 숏이 현실의 숏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나뉘어 있던 비일상과 일상의 몽타주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이 두 숏은 일종의 혼입 몽타주라 부를만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혼입의 몽타주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격렬하게 모호함 속에서 진행되며, 자아와 타자, 나아가 인과의 경계를 흐려버린다. 후술하겠지만 브랜던은 이런 혼입으로 인한 혼란함과 흐릿한 질감을 질감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균열의 시작은 중산층 이성애자 가정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여성=타샤를, 상류층 이성애자 커플 남성=콜린의 위치에 놓는 것에서 비롯된다. 도입부에 타샤의 도구로 쓰인 홀리는 흑인이긴 했지만, 어쨌든 타샤하고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침투 대상인 콜린은 타샤랑 공통점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중산층 가정의 중년 어머니 역할을 수행 중인 타샤랑 달리 콜린은 젊지만, 가정이 파괴된, 상류층 약물 중독자 남성이다. 타샤가 마주해야 하는 위기는 외견상 완벽해 보이는 대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불안함과 이질감을 포함한 반대된 정체성을 연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은이라는 상태가 어쩐지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 바로 타샤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후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콜린은 상류층에 포섭되기 위해 IT 회사의 하급 노동자로서 자본가 예비 장인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인물이다. 본질적으로 타샤와 콜린은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감정 노동자다. 이 감정 노동자로서 연기해야 하는 사회적 정체성은 이어질 균열과 붕괴의 단초가 된다. 포제서의 갈등과 액션, 나아가 영화적 원동력은 이 닮지 않았지만 불균질하게 닮아있는 두 캐릭터의 정신이 교착하고 분열하고, 공명하면서 발생한다.

 

관객이 타샤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알게 되는 것도 콜린의 사례를 통해서다. 브랜던은 여기서 다시 연기라는 개념을 꺼내 들면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의 관음증을 인용해 비틀어놓는다. 다만 관음과 시선의 권력이 비대칭적이고 어떤 쾌감을 안긴다는 점은 이창의 영향권에 있긴 하지만, 관음자의 욕망이 사건을 관람하고 기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정체성을 연기하고 종국엔 바꿔치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더욱 불온하고 불편한 영역을 건드리고 있다. 영화는 이런 불온한 욕망이 담긴 음모를 트래킹 아웃과 패닝을 이용해 콜린과 타샤 두 사람 간의 관계 설정한 후, 외화면에 배치된 도청중인 콜린의 음성과 내화면에 배치된 타샤의 복기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압축한다. 그런데 이 복기가 끝날 무렵 타샤는 갑자기 손목의 통증을 느끼고 부여잡는다. 손은 인간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이며 후술할 타샤의 살인 방법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유지해온 위태로운 정체성이 통제가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관음과 연기의 과정을 거친 뒤 콜린은 납치되고, 타샤는 다시 한번 콜린의 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침투 과정을 묘사하는 몽타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중에서 점프라 불리는 정신 침투는 색깔과 파편적이고 추상적인 몽타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타샤의 신체 이미지가 액체화되어 다시 콜린의 신체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과정은 앞뒤 사이키델릭한 숏 속에서도 명료하게 제시된다. 여기서 브랜던 크로넨버그가 인간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방식이 드러난다: 포제서는 매우 단호하게 유물론적인 태도를 보이는 영화다.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일종의 가시적인 물질 이미지로 설정한 것부터가 그렇다. 정신을 유령/환영 이미지가 아닌, 철저히 신체에서 출발해 근원이 되는 물질 이미지로 환원하고 변이한다는 점에서, 브랜던 크로넨버그는 명백히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향권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면 이 영화에는 유달리 액체나아가 액체와 대상이 접촉하는 숏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도입부 타샤가 조종하는 홀리는 칼로 목표 대상을 살해한다. 그런데 이 순간 브랜던 크로넨버그는 흘러내린 많은 양의 피와 피에 달라붙은 홀리의 운동화와 손 숏을 삽입한다. 타샤가 휴가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했을때 거더가 이 점을 지적하면서 왜 암살 대상을 지급된 총이 아닌 칼로 살해했냐고 물어본다. 이때 타샤와 거더는 피범벅으로 된 타샤의 암살 현장 슬라이드쇼를 보고 있는데, 이 슬라이드쇼의 피 이미지는 빛과 색이 만들어내는 표현주의 이미지로 화하여 인물들을 덮어버린다. 타샤는 인물 성격에 부합해서 그랬다고 말하지만, 거더는 그 방식이 누구 성격에 부합하냐고 반문한다. 이 반문에 타샤는 대답하지 않는데,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부합하기에 칼을 쓰고 있다. 여기서 피 이미지는 정신과 신체의 중간지대 역할을 하며, 상흔을 내 피를 쏟게 하는 홀리(를 연기하는 타샤)의 칼은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신체 기관의 확장이 된다.

 

타샤가 콜린의 몸에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는 타샤의 일상 시퀀스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몇몇 신의 변주는 데칼코마니에 가까울 정도인데 지인들이 음담패설을 하는 장면이라던가 커플 간의 섹스 장면이 그렇다. 이 과정 속에서 타샤는 콜린의 삶을 연기하지만, 그 누구도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혼란을 느끼는 사람은 오로지 콜린의 몸에 있는 타샤뿐이다. 균질한 형식 (이성애자 커플의 생활 양태)과 대조적인 질료 (이성의 신체)라는 함정에 걸려 자아가 교착 상태에 빠져들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알겠지만 빈번히 등장하는 고층 건물 숏과 타샤가 사는 무개성한 주택 구역 숏, 일렬로 배치된 콜린의 직장 환경 등 포제서는 철저히 도시 문명 이미지에 기반한 영화다. 그리고 이 도시 문명이 내재하고 있는 자기복제성을 등장인물들의 일상과 관계, 심리적 배경에 반영한다.

 

본격적인 분열은 타샤가 콜린의 삶을 연기하면서 발생한다. 콜린의 직업은 데이터 채굴 기업에서 영상 이미지를 확인하고 분류하는 일이다. 타샤는 일하기 위해 일하는 걸 연기해야 하는 이중의 덫에 사로잡히는데, 설상가상으로 콜린이 확인해야 하는 영상은 성관계 영상이다. 여기서 콜린을 연기하는 타샤는 갑작스러운 혼란에 빠진다. 이후 콜린과 에이바의 친구들이 하는 대사와 섹스 도중 등장하는 젠더 전복적인 신체 이미지 숏을 생각해보면 콜린이 자신의 일을 지겹고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과 타샤가 어떤 관점으로 성관계 영상을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콜린 자신의 불안정함과 서로 공명해 혼란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나타난 허공에 뜬 이물질 숏은 붕괴의 전조인 셈이다.

 

타샤 자신이 붕괴하는 과정은 신체 이미지의 어긋남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브랜던은 콜린인 채로 에이바와 섹스를 연기해야 하는 타샤의 몸에 남성기가 붙어있는 (매우 젠더 전복적인) 숏으로 자아 붕괴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암시한다. 신체 기관의 이질감은 곧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이질감, 나아가 정신의 이물감으로 표현한다. 브랜드 크로넨버그는 이런 이물감을 메타포를 통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암살 성공 이후 콜린의 반항으로 타샤가 주도권을 잃고 정체성이 녹아내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콜린은 정말로 녹아내린 듯한 타샤의 피부 껍질을 뒤집어쓴다. 직후 브랜던은 빠른 몽타주로 타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억 이미지를 산발적으로 배치하고, 기억 이미지의 주체를 타샤에서 타샤의 껍질을 뒤집어쓴 콜린으로 대체한다. 이때 타인이 남긴 피부와 피부의 질감은 정신과 신체의 중간지대인 피-혈관에 닿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 점에서 브랜던은 명백히 바디 호러 장르를 경유해 인간 정신, 정체성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포제서의 결말은 자아의 붕괴를 넘어선 관계의 붕괴다. 콜린은 타샤의 남편 마이클을 인질로 잡고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가 옳긴 기생충이 하는 생각이 과연 기생충의 것인지 숙주 타샤의 것인지, 마이클 네가 타샤랑 결혼한 건지 아니면 기생충하고 한 것인지. 사고 주체의 선행 순서가 헷갈리는 순간, 타샤의 환영이 콜린 앞에 다시 등장한다. 타샤는 자신이 마이클을 사랑했지만, 확신이 안 선다고 말한다. 그런데 타샤는 오히려 마이클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발언을 한다. 이때 숏은 흐릿한 필터를 끼운 투샷 클로즈업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잡아낸다. 타샤의 자아가 이전에 껍질처럼 변했던 걸 생각하면, 어떤 새로운 구성물이 비어버린 타샤의 껍질을 채웠으며 콜린의 자아와 타샤의 자아가 우선 순위와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순간부터 콜린은 타샤가 암살을 수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다. 마이클을 칼로 내려쳐 살해하고 입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겨 빠져나오려고 한다. 타샤가 콜린을 연기했던 것처럼 마치 콜린이 타샤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타샤의 아들 아이라가 칼로 콜린의 목을 찌른다. 곧이어 콜린이 아이라에게 총을 쏘는데 다음 숏에서 콜린의 옷을 입은 타샤가 총을 쏘고 있다. 주도권은 다시 타샤로 돌아오고 대칭된 형태로 누워있는 콜린과 아이라 시체 사이로 서로가 내뿜는 피가 서로 섞여드는 클로즈업 숏과 부감 숏의 연속으로 시퀀스는 종료된다. 이때 두 신체에서 나와 맞닿는 피는 마치 두 자아가 혼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관계의 붕괴를 다루는 이 시퀀스에서 브랜던은 한 인물이 구축한 행동 양식을 다른 신체에 포개는 방식으로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게 한다. 그러면서 콜린도 타샤도 아닌 두 자아의 혼입이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를 암시케 한다.

 

타샤가 깨어난 이후 거더가 아이라에게 침투한 사실이 밝혀진다. 타샤가 무기로 칼을 선호했고 총을 쓰지 않았던 걸 다시 떠올려보면 칼로 목을 찌른 거더의 행동은 명백히 타샤의 자아를 주체로 돌려놓기 위해 한 행동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영화는 초반부 기관의 테스트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를 수행하는 타샤는 초반부랑 달리 더 이상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를 그만둔 것처럼. 여기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에, 타샤의 신체로 돌아간 자아한테 붕괴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재구성되었는지는 상상의 여지로 남긴다. 다만 타샤의 자아가 콜린의 자아랑 충돌하면서 다른 무언가로 변화되었음은 명백하게 제시된다.

 

하지만 변화의 과정보다도 변한 타샤의 자아에 대해 거더가 표현하는 만족감은 훨씬 냉혹한 진실을 찌르고 있다. 거더는 타샤를 차기 후임으로 점 찍은 상태고, 그들이 일하는 암살 기관은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다. 여러 사건을 거쳐 새로이 재구성된 타샤의 자아는 그런 냉혹한 기술 자본주의에 걸맞은 인간상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포제서가 첨단 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바디 호러라 할 수 있다면 균질한 생활 양식 속에서 끊임없이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현대인의 존재 양태, 그런 상황에서 형성된 자아가 겪는 혼돈과 교착, 붕괴와 재탄생 같은 과정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동기와 논리에 따라 진행되고 귀결되기 때문이다.

 

전작 안티바이럴이 그랬듯이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모호한 시공간과 도회 문명을 기반으로 일견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병리적인 양태를 띄고 살아가는 자들의 욕망과 감정, 정체성을 탐사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인공적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연기하고 탐닉해야 하는 이질적인 존재다. 그런데 이런 존재들을 궁극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첨단 기술 자본주의다. 두 영화의 주인공이 실질적으로 기업의 하수인이라는 점은 그 점에서 중요하다. 브랜던이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보다 좀 더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면, 규격화된 삶의 양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하수인들의 자아와 신체를 소모하며 성장하는 21세기 첨단 기술 자본주의의 양태가 바디 호러를 비롯한 장르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제서는 그 점에서 브랜던의 문제 의식이 심화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