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이 내게 들려준 시
영화가 가장 닮은 문학 장르는 의외로 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과관계로 진행되긴 하지만, 영상이 우리 머릿속에 틀어박히는 방법은 추상적이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굴비 엮듯 엮여서 하나의 뜻으로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시 읽는 방식과 비슷하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은 그런 영상의 추상성과 시적 감흥을 극대화시킨 영화이다.
[벌집의 정령]은 한 편의 영화에서 시작한다. 1940년 스페인의 카스티야 고원 시골 마을에 [프랑켄슈타인]이 상영된다. 두 자매인 아나와 이사벨은 그 영화에 흠뻑 빠지고, 아나는 언니인 이사벨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진짜 죽었는지 물어본다. 그러자 이사벨은 "프랑켄슈타인은 안 죽었어. 난 그를 봤지"라고 대답해준다. 이후 아나는 그 말을 믿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탈영병을 만나게 된다.
빅토르 에리세는 몇가지 단서만 남기고, 영화 속에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테레사가 편지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누구한테 보내는 건지 잘 모른다. 가족의 과거 역시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다. (적어도 스페인 내전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영화는 우리가 해석할만한 여지와 단순한 정보들을 남겨놓고 모든 설명들을 제거해버린다.
대사가 무척 적은 영화이기도 하다. 대부분 긴 침묵과 짧은 대화로 채워져 있으며, 몸짓 역시 절제되어 있다. 그 대신 영화는 대사 대용으로 밀도높은 이미지로 채워넣는다. 여기서 촬영감독 루이스 쿠아드라도가 시력이 없어져가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잡아낸 촬영이 빛을 발한다. 그가 촬영한 영상은 지독하게 아름다운 구도와 색감을 지니고 있으며, 영화의 미학을 대부분 책임진다. 이렇듯 산문성의 제거와 대사의 제거, 그리고 회화적인 이미지로 인해 영화는 굉장히 시적이고도 신비로운 감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런 차분하고 담담한 연출에 힘입어 영화의 이야기와 캐릭터들 역시 매우 조용하고 느릿느릿하다. 초중반엔 일상적인 이야기와 아나의 신비한 모험을 이야기하다가, 탈영병 등장 이후 빠르게 결말로 치닫는다. 그 속에 있는 인물들 역시 조용하기 없다. 크게 떠들고 놀 법한 두 자매는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고, 부부는 (사이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말을 거의 나누지 않는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는 종종 죽음의 상징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꽃 대신 아이을 던지는 프랑켄슈타인(다른 영화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이사벨의 죽음 놀이, 불을 건너뛰는 아이들, 총살당하는 탈영병...
비록 모호한 분위기의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가 주는 감흥마저 모호한 것은 아니다. 아나는 순수한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 자신만의 프랑켄슈타인이라 할 수 있는 탈영병과 사심없는 우정을 나누지만, 그런 우정은 비정한 현실로 인해 끝나버린다. 아나는 그 현실을 견딜 수 없어 아버지를 피해 도망가고 진짜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게 된다. 비록 환상이라는게 명백하지만, 이 장면에서 둘은 지독히도 쓸쓸해보인다.
그리고 다음날 아나는 발견되고, 어른들은 아나가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꺼라고 말한다. 언니가 구라로 한 "영화는 거짓말이야"라는 말을 믿은 순진한 소녀의 모험은 곧 이해할수 없는 어른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영화라는 환영에 빠진 아이에서 시작해, 현실에 찌든 어른이 된다는 것과 프랑코 독재 시절의 암울함에 대한 쓸쓸한 시를 바치고 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아나 토렌트의 연기로 이끌어 나간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영화를 찍을 때 5살이였던 아나 토렌트는 영화의 시적이고 불가해한 분위기처럼,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 귀여우면서도 종종 섬뜩한 매력을 발한다고 적을수는 있다. 하지만 이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무척 많다.
[벌집의 정령]은 영상시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골의 그 느린 듯한 분위기와 별다른 뼈대가 없는 이야기가 지루하고 난해할지 몰라도, 몰입도가 강한 이미지가 관객들을 잡아끈다. 그리고 좋은 시가 그렇듯, 읽는 (또는 보는) 이의 마음과 지성을 잡아채는 주제도 있다. 추상적이지만 잊을 수 없는 영화다.
P.S. 토렌트 (Torrent)라는 성에서 뭔가를 느끼신 분들은 반성하자. 물론 이 글 쓰고 있는 사람도 반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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