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의 중요성
에릭 로메르의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은 평범한 프랑스인의 삶을 쫓아간다. 평범한 지식인 주인공 장은 오랜 옛 친구를 만나고, 그를 통해 모드라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주변을 얼쩡거리기만 할 뿐 솔직하지 못하게 굴다가,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5년 뒤 어느 해안가에서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난다.
이 영화에는 단순한 스토리에 비해 대사가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그 대사도 상당히 지적인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현기증 나게 재미없을것 같지만, 의외로 전혀 그렇지 않다. 보다보면 굉장히 유려하면서도 쿡쿡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다. 이는 에릭 로메르가 현학적인 대사을 어떻게 이야기 및 연기자의 흐름에 집어넣을 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대사들은 일종의 주석이며 결코 주가 아니다.
이런 지성적인 대사 쓰기 및 인용은 곧 등장 인물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파스칼의 "자신이 이길 확률이 단 10%에 불과해도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 도박을 걸라"는 영화의 핵심 격언을 이용해 장이라는 남자의 우유부단함과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 까발림은 아이러니와 풍자, 그리고 대비로 이뤄진다. 장은 처음엔 모드의 집에서 머물기 싫다고 빨리 떠나려고 했다가, 갑자기 행동을 번복하고, 그녀 집에 머무른다. 이런 이중성은 영화 내내 계속되며, 결국 그는 모드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하고 딴 여인과 결혼한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에 대한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에 비해 모드는 자신에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며, 지적이며, 아름답다. 모드의 아름다운 모습은 솔직하지 못한 장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아이러니와 풍자를 강화시킨다.
아이러니와 풍자, 까발리기가 넘쳐나지만, 에릭 로메르는 예의 바르게 등장 인물들을 다룬다. 보통 영화 같았으면, 모드가 장의 뺨 따귀 날리고 17과 19사이 진법을 날릴 법한 상황에서도 정중한 거절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심지어 냉소주의로 난도질 할 법한 부정적인 캐릭터인 장 역시 존중 받고 있다. 이런 캐릭터 접근은 효과적이다. 영화의 농담과 지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에릭 로메르는 그리 튀는 부분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영화 문법을 구사하지만, 세트 촬영 대신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등 동료 누벨바그 영화인들의 영향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잘 알려진 스타 배우 대신 아마추어 배우를 쓴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현학적인 접근을 하던, 편하게 보던,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은 재미있는 영화다. 우선 내용이 재미있으며, 아이러니와 풍자 모두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상미는 독특한 향취를 품고 있다. 에릭 로메르라는 감독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지금 한국 예술영화계의 트렌드 중 하나인 홍상수 류(홍상수 자신을 포함해서) 영화의 모티브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 이중성, 성적 관계...) 그런데 질퍽한 홍상수 류 영화와 달리 에릭 로메르 영화는 산뜻하다. 문화의 차이일까? 아님 그냥 감독의 취향 차일까?
PS1.다음엔 아주 괴작(...)이나 B급 영화를 찾아 볼까 한다. 명작을 보는 게 질렸다는 게 아니라, 왠지 그런게 무지 떙긴다.
PS2.리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건 좋은 건지 아니면 안 좋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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