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슬러입니다
격투 종목 자체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 사실 누군가의 패배로 끝나게 되는 스포츠라는 것에 그렇게 많이 열광해 본 적이 없다. 좀 불편하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더 레슬러]는 속된 말로, 구닥다리스럽다. 그의 대표작 [레퀴엠]에서 보여줬던 세련되고 음울한 편집 및 촬영술도, 정교하게 구성된 시나리오도 없다. 1980년대 프로 레슬링 대스타였던 랜디 램은, 이제 한물간 스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링 위에서는 스타지만, 링 밖에서는 그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망가진 사내일 뿐이다. 잘 풀리지 않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경기할 기회가 찾아온다.
솔직히 보기 전만 해도, 이 영화가 허세로 밀고 갈까 걱정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뒤에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랜디 램은 분명 과거엔 스타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시대에 뒤쳐졌는지 역시 쓸쓸히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점들이 어느정도 자신이 자초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사랑도 해보고, 딸에게 화해도 해보지만 세상 일이 그렇듯 잘 되진 않는다.
그가 링으로 끊임없이 복귀하려는 이유도 현실에서는 찾지 못한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있는 프로 레슬링이 마냥 달콤한 곳도 아니다. 모두 짜고 하는 거지만, 보러 온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을 학대하는 짓도 주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한다. 아르노프스키는 이런 현실들을 한 치도 망설임 없이 담담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영화는 장르성을 존중하면서도 나름의 진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전혀 닮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레퀴엠]으로 회귀한다. '집념과 집착'이라는 테마로. 다만 이 영화의 랜디는 [레퀴엠]의 주인공들 보다 희망이 있는 편이다. 현실에서 밀려나긴 마찬가지지만 홀로 파멸해간 [레퀴엠]의 주인공과 달리 그에게는 관객이 있으며, 링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역시 [레퀴엠] 때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아르노프스키의 성숙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할까.
단순하지만 성숙한 이야기에 맞춰 영화의 스타일 역시 신중해졌다. 영화는 시종일관 랜디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일상과 삶의 주름, 그리고 격렬한 레슬링 현장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담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술적인 세련됨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여서 소리와 화면의 아귀가 맞지 않음과 교차 편집 등 다양한 테크닉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레퀴엠] 식으로 찍혀졌다면, 분명 영화적 자위질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더 레슬러]는 소품과 음악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활용한 영화이기도 하다. 랜디 램이라는 인물이 80년대에 빛났던 스타였던 만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소품들은 굉장히 1980년대적이다. NES, AC/DC, 낡은 인형, 오래된 차, 반짝이 옷, 낡은 공원... 이런 소품들은 곧 2000년대라는 현실과 대비되면서 영화의 처연함을 강조시킨다. 딸 집에 붙어있던 밴드 뱀파이어 위크엔드의 앨범 표지, 콜 오브 듀티 4...
마지막으로 미키 루크를 언급해야 되겠다. 물론 아르노프스키의 공도 크지만,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이 영화의 힘은 대부분 미키 루크에게 나온다. 말 그대로 그는 자신의 실제 삶과 고통을 스크린 속에 박아 넣는다. 망가진 몸과 얼굴, 쓸쓸한 표정, 그럼에도 종종 흘러나오는 자신이 옛날엔 잘 나갔다는 자부심 등 랜디 램 캐릭터와 훌륭하게 연결된다. 당연히 연기 테크닉도 훌륭하며 나무랄데 없다. 마리사 토메이와 에반 레이첼 우드도 훌륭하다.
[더 레슬러]는 아르노프스키의 또다른 도약을 알려주는 영화다. 물론 [레퀴엠]이나 [천년을 흐르는 사랑]처럼 거대한 야심은 없지만, 그에 비견가는 캐릭터에 대한 존중심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다. 그와 미키 루크는 낡은 '재기에 도전하는 운동 선수'라는 장르 속에서 다양한 도전을 했으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훌륭하다.
마지막 장면, 스크린엔 환호 소리만 남아있다. 그 환호 소리를 위해 랜디와 레슬링 선수들은 노력하고 인생을 바친다. 여전히 스포츠는 좋아하진 않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열정과 땀, 눈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 모든 경기는 끝나기 마련이지만, 다시 보러 올 관객들을 위해 그들의 노력은 계속 될 것이다.
PS.아르노프스키는 진정 천재일 것이다. 그냥 이 감독이 한없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PS2.주제가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이 불렀다. 이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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