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호프만 이야기 [The Tales of Hoffmann] (1951)

giantroot2016. 7. 10. 16:28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감독에 속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인지도도 [분홍신]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영국에 남아서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호프만 이야기]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분홍신]의 성공에 고무되어 만든 영화라는게 분명한데, 발레나 오페라 같은 무대 예술을 스크린에 올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요정낭만주의의 대표주자 E.T.A 호프만이 원작을 쓰고 자크 오펜바흐가 오페라로 각색한 [호프만 이야기]는 몇가지 각색에 불구하고 꽤나 충실하게 이식되어 있다. 독일 뉘른베르크. 호프만은 린돌프와 사귀고 있는 스텔라라는 발레리나를 짝사랑하고 그걸 눈치챈 스텔라는 호프만에게 만나자고 한다. 발레 공연이 끝난 뒤, 한 선술집에서 호프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그가 겪은 세가지 사랑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기계인형 올림피아, 베니스의 고급 창부 줄리에타, 소프라노 안토니아. 

이 세 사랑의 이야기는 좌절과 실연으로 가득차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 완벽한 외견으로 호프만을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으로 표현된 고장 끝에 결국 부서지며, 고급 창부 줄리에타는 처음부터 호프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호프만을 농락한 끝에 그의 진짜 모습을 빼앗어버린다. 한편 소프라노 안토니아는 호프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재능을 소진한 끝에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액자 밖 호프만과 스텔라 (원작에서는 오페라 가수로 나오지만 영화판에서는 발레리나로 나온다.)의 사랑도 호프만의 좌절로 끝난다. [호프만 이야기]는 그 점에서 문학이 만들어진 이래로 유구히 내려온 남성의 시점에서 바라본 팜 파탈 혹은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물론 [호프만 이야기]가 소위 호러나 SF 문학에서도 시조격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유명한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사랑했다는 얘기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동안 쌓여왔던 고색창연한 근세 기계인형 이미지를 정리해, 이후 등장할 여성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으며 ([꼭두각시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형 올림피아는 여기서 따온 것일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뤄질 미지의 영역을 상상하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SF라 볼 수 있다. 또한 흑마술과 저주, 유령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줄리에타와 안토니아의 이야기는 오컬트 장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를 감상한다는 것은, SF와 호러 장르의 근원에 있는 예스러운 전통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가 이런 환상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실연담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비주얼 폭격이라 불릴만한 시각적인 양식을 구축한다. 이 양식은 단순히 무대 미술 뿐만이 아니라, 영화적 연출에도 녹아있는데 [호프만 이야기]가 단순히 오페라 녹화 영상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적인 매력으로 승화된 것도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공이 크다. 그들은 무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공간의 확장과 거기서 비롯된 동선 배치, 시야각의 변화 같은걸 마음껏 누리며 원작의 상상력을 확장한다. 세번째 안토니아 에피소드 도입부에서 안토니아가 사는 섬으로 향하는 호프만 시퀀스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장면의 공간 연출은 무대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꽤나 호사스러운 영화기도 하다. 애시당초 리얼리즘은 쌈싸먹은 얘기가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분홍신]으로 구축한 초창기 컬러 영화 특유의 색감이 입혀진 화려한 세트와 엄청난 혹사를 했을게 분명한 배우들의 연기가 디졸브와 이중 노출, 클로즈 업, 몽타쥬 등 다양한 영화적 기법과 만나면서 호화스러운 시각적 성찬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좋은 소스로 필히 감상해야 하는 영화기도 하다.

어찌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시대를 제대로 타고난 영화일지도 모른다. 1950년대 인공적인 스튜디오 세트 제작 체계가 영화계 트렌드는 [호프만 이야기]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무대적인 요소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영화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가능했다고 할까. 이후 영국 영화가 키친 싱크와 성난 청년 흐름으로 소박한 모양새로 돌아섰던걸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정말 영국 영화가 가능했던 한 시기가 응축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파웰은 이런 환상적인 모양새를 대부분 버리고 냉정하고 살벌한 톤으로 그린 [저주의 카메라] 감독이기도 하니깐 단순화시킬수 없겠지만.)

물론 파웰과 프레스버거 스타일의 발전상으로 따지자면 [호프만 이야기]는 파웰과 프레스버거 다른 영화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때문에 이 부분은 차후 이뤄질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만든 컬러 영화 대표작 [분홍신]이라던가 [흑수선] 리뷰로 미룰수 밖에 없다.) [호프만 이야기]가 영화사에 남을 시각적 성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들 커리어 후반기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두 감독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빛낸 만가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