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7 - [Deeper Into Movie/리뷰] - 뼈 [Ossos / Bone] (1997)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피 [O Sangue / The Blood] (1989)
2016/06/24 - [Deeper Into Movie/리뷰] - 행진하는 청춘 [Juventude em Marcha / Colossal Youth] (2006)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과 [뼈]를 제작할때 자신이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이 맞지 않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뼈]를 제작할때만 하더라도 페드로 코스타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35mm 혹은 16mm 필름만이 더 큰 세계로 나갈수 있는 통로였으며 아직 국제적인 입지가 단단하지 않았던 페드로 코스타는 피터 그리너웨이처럼 소니의 지원을 받아 HD 카메라를 쓸수도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등장한 도그마 선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새로이 등장한 DV라는 캠코더 형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하모니 코린과 라스 폰 트리에, 토마스 빈터베르 같은 새로운 세대들은 캠코더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네마의 시작이였다.
그렇기에 [뼈]에서 [반다의 방]으로 넘어오면서 너무나도 많은게 달라져버렸다. [행진하는 청춘]에서도 간단히 언급하긴 했지만, DV 캠코더의 등장한 페드로 코스타에게 어떤 기회였던게 분명하다. 더 이상 인물들은 누군가를 연기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인공적인 조명기기는 확 줄어버렸다. 간단히 말해 [반다의 방]은 페드로 코스타의 관심이 디지털 캠코더의 기동성을 이용해 어떻게 폰타야나스의 현실과 영화광적인 매료를 혼합해 (다큐픽션) 보여줄 것인가를 보여준 첫 영화다.
[반다의 방]은 [뼈]에서 조심스럽게 언급되었던 마약에 대한 암시는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영화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아무런 설명없이 반다와 반다의 여동생 지타가 마약을 하는 장면으로 '던져진다'. 우리는 이들이 마약을 하며 수다를 떠는 장면에서 어떤 일상의 피로함을 찾아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발표된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레퀴엠]이 마약하는 장면을 극단적인 컷 분할과 배분으로 쾌락을 극대화해 보여줬다면, 페드로 코스타는 청개구리처럼 그 행위들에게서 집요하게 쾌락을 지워내고 행위만을 반복한다. 반다와 지타에겐 마약은 과일을 파는 행위나 다름 없는 일상의 일부인 것이다.
이처럼 [뼈]의 여주인공을 맡은 반다는 폰타야나스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 반다는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자신의 방에 있거나 잠을 자거나 마약을 한다. 그리고 반다의 방 반대편에는 반다가 간신히 인지하는 마약판매상이 살고 있다. (이들은 만나지 않는다.) 반다는 가끔 그 방을 나와 곧 사라질 폰타아냐스에 과일을 팔러 돌아다닌다. 2시간 5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 구조는 반복되거나 변주되는데, 후반부 폰타야나스가 재개발로 무너지면서 이 구조는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다.
[뼈]부터 페드로 코스타는 설명을 대폭 축소해버리고 어떤 구조를 반복하거나 조금씩 변주하는 형식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사무엘 베케트나 포스트 펑크를 연상케하는 작법을 구사하고 있다. [뼈]에 삽입된 포스트 펑크 밴드 와이어의 곡은 그 점에서 페드로 코스타의 작법을 함축한 음향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와이어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잔인할 정도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구조를 과묵하고 집요하게 반복해 쌓아올리고 약간의 변주를 넣는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반다의 방]를 이루고 있는 두 구조는 폰타야나스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다. [뼈]와 [행진하는 청춘]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 페드로 코스타는 집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페드로 코스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집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내왔는데, 흥미롭게도 [반다의 방]의 반다는 폰타야나스 3부작의 주인공 중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그 반다의 방을 중심으로 삼아 가지를 치며 뻗어나간다. 어찌보면 참 솔직한 제목이다.
반다 뿐만이 아니라 반다의 어머니 레나, 동생 지타, 새아빠와 어린 남동생까지 반다의 가족은 폰타야나스에서는 빠듯하긴 해도 그럭저럭 뿌리를 내린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뿌리는 얼마 안 있어 뽑힐 예정이다. 반다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지만, 반다가 과일을 팔러 돌아다니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전작들의 방황하는 주인공들과 닮아있다. 유치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반다와 폰타야나스 주민들은 마치 [라스트 오브 어스]나 [폴아웃] 시리즈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등장하는 생존자들 같다. 파괴된 공간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는 모습 말이다. 더 나아가면 페드로 코스타 영화 리뷰에서 빼놓을수 없는 감독, 존 포드가 그려냈던 공동체를 언급할수도 있을것이다. (사견이지만, [반다의 방]과 [폴아웃]이나 [웨이스트랜드]는 외양과 달리 그 근원은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존 포드 말이다.)
하지만 [반다의 방]의 구조는 [뼈]와 달리 [라스트 오브 어스]보다는 [폴아웃]이나 [웨이스트랜드]에 가깝다. 한마디로 [반다의 방]의 폰타야나스는 오픈 월드 게임처럼 '열려있다'. 전작 [뼈]의 인물들을 얽매던 형식적인 서사마저 삭제되었기에 반다의 동선이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반다는 더 이상 코스타가 짜준 동선이 아닌, 자신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페드로 코스타는 디지털 캠코더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그 리듬을 잡아낸다. 물론 오픈월드 게임이 그렇듯이 현실세계의 무한함을 통채로 옮겨놓은건 아니지만, 그건 매체의 특정상 어쩔수 없는 것이니 생략한다.
[뼈]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 연기를 아기 얼굴에다 뱉어내는 장면 보고 실제로 한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는 어느 관객의 말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뼈]에서 완성시킨 방법론을 [반다의 방]를 통해 폰타야나스의 삶에 배인 찌든 때를 매우 리얼하게 잡아낸다. 실제로 있는 낡은 공간부터 시작해 반다가 기침을 하다가 이불에다 침을 뱉어내거나 마약을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손길을 치밀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배치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찌든 삶의 흔적들도 잡아낸다.
반다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명징한 에피소드와 대화로 이뤄진다면, 마약판매상과 주변 인물들 이야기는 대단히 추상적으로 진행된다. 이들은 반다와 달리 폰타야나스가 파괴될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가구를 가져다 놓고 마약을 하는 등 도무지 떠날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초중반부 그들의 행동은 평범한 내러티브 영화에 익숙한 사람은 물론이고, 파편화된 서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당혹할 만큼 한 점으로 잘 응집되지 않는다. 그저 어둠속에서 중얼거리거나 추상화된 프레임에 갇힌다. [행진하는 청춘]의 렌토 에피소드가 그랬듯이 페드로 코스타는 그 에피소드가 어떤 일관된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알면서도 그걸 집어넣는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고 폰타야나스 재개발이 진전되면서 나란히 흘러가던 이 두 구조는 변하기 시작한다. 먼저 마약판매상은 폰타야나스를 완벽하게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에 맞춰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씩 폰타야나스를 떠나간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인물들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집어 넣는다. 대표적으로 목발을 짚은 청년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픽션 영화처럼 철저히 계산된 구도의 미장센으로 찍혀져있기에 묘하게 그 인물의 유언처럼 느껴진다. 여튼 그들이 떠나는 장면에서 [뼈]의 마지막 장면이나 [행진하는 청춘]의 유령처럼 등장하거나 불쑥 등장하는 인물의 동선을 찾아낼수 있다.
반다의 방 역시 폰타야나스 재개발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반다의 행동은 변하지 않지만, 폰타야나스 재개발로 집을 잃은 청춘 몇몇이 반다의 방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흑인 청년이 반다의 방을 찾아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흘러가던 두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고정된 카메라에 침대에 누운 반다와 그 앞에 앉은 흑인 청년은 앞으로 흘러갈 인생과 현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 이 영화나 [행진하는 청춘]이 그 난해한 모양새와 달리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런 자기고백에 담긴 어떤 삶의 에너지를 잡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반다의 방 시퀀스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반다는 언제나 그랬듯이 일하러 나가고, 반다의 동생 지타는 남동생을 데리고 논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대사 없이 굉음을 내며 울려대는 방 바깥의 불도저와 포크레인 소리와 남동생이 우는 소리를 동시에 들려준다. 이 말미는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이 매우 밀도높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다. 페드로 코스타는 이 결말을 통해 "반다의 방"은 언젠가 외부의 굉음에 깔려 사라지겠지만 (실제로 [행진하는 청춘]에서 반다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주한지 오래다.) 반다의 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반다의 방]은 [행진하는 청춘]에 비하면 뭔가 덜 정제된 영화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긴 러닝타임도 그렇지만 [반다의 방]은 시각적으로도 방법론적으로도 픽션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기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뼈]나 [피], [행진하는 청춘]에서 드러난 매혹적인 빛과 그림자, 소리의 마술이 [반다의 방]에서는 밀려나고, 대신 실제로 있는 빈민가의 구질구질한 가난과 일상을 날것으로 턱하고 내놓는 느낌이랄까.
다시 말해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꽤나 복잡한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끄집어냈던 [행진하는 청춘]과 달리 [반다의 방]에서 "실제"로 있던 가난의 정경들에서 영화적 힘을 끄집어내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지 않나는 의구심을 지울수 없다. 사실 [반다의 방]에서 제일 인상깊은 시퀀스들은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에 입각한 시퀀스들이다. 반다가 기침을 하다 침을 뱉어내는 장면이라던가 마약을 하는 장면이라던가, 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 장면들은 인물들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관객들은 거기에 푹 잠기게 된다.
반대로 [반다의 방]에서 정교하게 구성된 허구적인 시퀀스들은 그 테크닉에 비해 다소 소극적으로 머물러있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물론 이후 페드로 코스타가 10년 이상을 추구하게 될 스타일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라던가 구질구질한 폰타야나스의 일상이 붕괴되는 과정을 과묵하지만 장엄하게 그리면서, 디지털 캠코더의 자유로움을 만끽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반다의 방]을 지지할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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