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7 - [Deeper Into Movie/리뷰] - 뼈 [Ossos / Bone] (1997)
많은 이들이 칭찬했듯이 페드로 코스타의 [피]의 도입부는 간결하고 인상적이다. 천둥 소리와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두 사람. 떠나지 말라는 청년의 간청에 불구하고 늙은 남자는 청년의 뺨을 때린 뒤, 어두운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다. 분명 로케이션 촬영임에도 이 장면은 마치 매트 페인팅한 배경을 배우 뒤에다 세워놓고 찍은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인공적이면서도 어떤 화려함이 일체 배제된 이 장면에서 페드로 코스타는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놓기보다는 재구성할 의도로 이 영화를 찍었다는걸 선언한다.
[피]의 세계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이 자주 다루던 '아버지가 부재한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얘기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빈센트와 니노는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는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 이 세 사람은 곧 대안가족과 같은 기묘한 유대감을 나누게 되지만, 그런 유대감과 평온함은 아버지의 빚 문제로 찾아오는 자들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훗날 발표한 [뼈]의 등장인물들이 생기를 잃은채 식은 재처럼 덤덤히 얘기를 나누고 피로한 기색을 그대로 노출했던 것처럼 [피]의 등장 인물들을 역시 생기를 잃고 죽은듯이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들은 잠을 자거나 반쯤 깨어있거나 몽롱한 표정으로 리스본 거리를 좀비처럼 배회한다. 아버지는 갑자기 다시 등장했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나마 생기를 보이는 것 같은 채권자들 역시 몽유병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유령처럼 불쑥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와중에 아이들은 다른 이에게 속박당하거나 그 속박에서 탈출하기를 꿈꾼다. (그 속박이 어른의 세계라는건 명백하다.) 다만 [뼈]는 모호하고 성긴 이야기와 실제 빈민가에 사는 비전문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 때문에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피]는 훨씬 관습적인 이야기를 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피]의 이야기는 분명 현실적이면서도 어딘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이 꿈은 후기작들에 비해 매우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페드로 코스타와 빔 벤더스의 동반자였던 촬영감독 마르틴 셰퍼가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으로 잡아낸 이미지들은 마치 당시 영원한 침묵에 빠져있던 로베르 브레송과 이미 죽어버린 독일 표현주의와 포르투갈 뉴웨이브, 고전 할리우드 영화 (특히 발 루튼과 [사냥꾼의 밤]) 강령술이라도 하듯이 몽유병에 걸린듯한 인물들을 잡아낸다.
전반적으로 꽤나 복고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요란한 총천연색이 지배하고 있던 1989년 영화라고 믿기기 힘들 정도다. 평화로운 강변 둔치에 떠내려오는 시체와 그걸 구경하는 인파들, 어둠 속에 잠겨 있다가 디졸브되는 얼굴 클로즈업, 리스본의 야경, 복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의 인영, 부둥켜안은채 굴러떨어지는 두 남녀... 어딘가 불시착한 것 같지만 아름다운 영화적인 순간들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피]는 동시에 미완의 질문으로 남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다시 스토리로 돌아가보자. 페드로 코스타는 이 대안가족을 산산히 부서트리고 난 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소 머뭇거리는 인상을 보인다. 니노는 아버지를 자청하는 친척이 마음에 안들어 탈주를 시도하고, 빈센트는 그런 니노를 구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지만 정작 니노는 그런 빈센트와 클라라의 행동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갑자기 빈센트와 클라라의 행보를 모호하게 처리해버린다. 페드로 코스타가 선택한 결말은 도망치는 니노의 얼굴이다. 감독은 조각배를 탄 니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혼자서 운전할 수 있는지, 잘 갈수 있는지"라고 뱃사공의 입을 빌어 물어본다. 니노는 예라고 대답하고 뱃사공은 잠이 든다.
분명 어른이 부재한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인 니노의 성장을 의도한 결말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어른의 경계에 서있던 빈센트와 클라라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니노가 어디로 가는지, 라는 의문을 지울수 없다. 그저 모호한 사라짐과 브레송식 무표정함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만이 영화의 결말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뼈]의 결말이 죽음에 대한 암시와 "눈 앞에서 문을 닫는" 거부의 제스처로 단호하게 관객과 폰타야나스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그들의 메마른 일상을 영화적으로 구원할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담았지만 [피]는 버림받은 자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라는 애매한 희망을 남겨두는 것으로 일단은 만족해한다.
또한 선배 영화에 대한 강한 존경이 담긴 스타일 역시 [피]를 걸작이 아닌 데뷔한 감독의 재능있는 시작으로 머물게 하고 있다. 상기한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표현주의의 영향력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할까. 그렇기에 [피]는 페드로 코스타의 포스트 펑크적인 개성이, 강한 영화사적인 전통에 조심스럽게 숨어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비주얼적으로는 여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가 [뼈]를 시작으로 폰타야나스에 머물기 시작한 것도 답을 찾기 위해서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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