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더 홈즈맨 [The Homesman] (2014)

giantroot2016. 5. 27. 01:09

(누설이 있습니다.) 

배우 토미 리 존스의 감독 생활은 현재까지 서부극의 영역에 천착해 있다. 엘머 크레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한 감독 데뷔작 [라스트 카우보이]는 늙어가는 카우보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였고, 감독으로써 재능을 확인시켜준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은 [바벨]과 [21그램]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아리아가가 써내리고 죽은 멕시코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텍사스 보안관을 주인공으로 삼은, 현대에 이식된 서부극이었다. 본인이 텍사스 출신이기도 한 토미 리 존슨은 자신의 연출작에서도 그 강건하면서도 내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사는 '미국인'의 전형을 연기해왔다.

그 점에서 [더 홈즈맨]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와 같은 영화다. 글렌던 스와트와웃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더 홈즈맨]은 서부 개척 시절, 네브라스카에 살아가는 메리 비 커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어떤 남성들보다 강한 생활력으로 목장을 운영하던 메리는 어느날 정신병력이 있는 여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여자들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해가던 메리는 길에서 목이 매달린 채 죽어가던 총잡이 조지 브릭스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송 임무를 맡기게 된다.

[더 홈즈맨]은 시기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의 서부극들에게 영향을 받은 영화다. 이는 토미 리 존스가 본인이 연기하는 조지 브릭스를 봐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지는 못난 캐릭터다. 첫 등장도 그렇게 멋있지 않으며, 그가 영화 내내 보이는 행태는 "주접 좀 그만 떨어라..." 싶을 정도로 속물적이며, 자기 안위에만 신경을 쓴다. 

물론 이런 유형의 "멋있지 않고 약간 주접스러운 무법자" 캐릭터들은 고전 서부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지만 (원작이 1988년에 발매된 걸 생각해보면 좀 더 수정적인 흐름에 연관을 지어야 되겠지만.), 그런 주접스럽고 못난 행동가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연출과 연기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의 말도 제대로 못타는 늙은 카우보이의 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캐릭터들과 다소 다른 타입이지만 그의 연기는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다. 코믹 릴리프에 그치지 않는, 자신만의 생존방법이 남들에게 주접스러움이라는걸 잘 알면서도 그걸 고수하다가 변화를 겪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할까.

이런 못남의 강조는 힐러리 스왱크가 체감온도보다 높게 열연한 메리라는 캐릭터하고도 대조된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 마을 공동체에서는 잉여 취급 당하면서도 못난 사람들에게 일갈을 날리며,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메리는 어찌보면 조지보다도 훨씬 고전적인 품위를 지닌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리없이 메리의 입장에서 영화를 따라가게 된다.

메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홈즈맨]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여성이다. 메리가 바라본 서부 개척 시대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 없다.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로 대표되는 세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채 살아가며 메리는 그런 여성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떠나지만, 정작 자신도 어떤 공허함을 지우지 못한다. 각각의 사연들은 꽤나 멜로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지만,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의 승패가 이런 멜로드라마틱한 사건에 어떤 디테일과 연기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 이 세 여성의 고통과 참담함은 단순하게 소모되지 않고 관객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켈리 레이차드의 [믹의 지름길]처럼 완전히 여성의 눈에 맞춰져 전개되는 서부극은 아니다. 오히려 조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서부 여성 수난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미 리 존스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망가졌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여성들과 그 여성들과의 교류를 통해 변해가는 캐릭터들을 통해, 존 포드의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보였던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충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을 존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를 향한 존중은 영화 중후반부에 이뤄지는 반전에서 강력하게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인공의 교체라는 꽤나 위험한 수를 뒀음에도 우리는 메리가 조지에게 마음을 열였음에도 왜 그런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메리 역시 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마음 속의 고뇌와 고통을 안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나 우직한 태도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먹히는 연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조지를 주인공 삼아 이뤄지는 후반부 이야기는 토미 리 존스의 전작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처럼 무법자가 바치는 애도와 추모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조지는 호텔에 불을 지르고, 병든 여자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무뢰한이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이전의 비굴함과 다른 어떤 고전적인 품위가 깃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 품위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와 자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비루한 몰골로 출발한 [더 홈즈맨]은 결말로 갈수록 고전 서부극이 가지고 있던 위엄과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문명과의 화해로 이뤄지지 않는다. 여관 종업원을 향한 조지의 뜬금없는 청혼과 종업원의 유보는 문명과 그의 관계를 압축하면서도 결국 그가 문명에 머물지 못할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제시된 프레이밍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가는 무법자를 담고 있으면서도, 강이라는 경계를 통해 서부와 문명, 애도하는 자와 애도하지 않는 자 간의 경계를 긋고 있기 때문이다. 서부를 "저주받을 악마"라 부르면서도 조지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이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조지는 메리의 묘비명을 잃어버리지만, 우리는 그가 추도를 멈추지 않을거라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결말을 통해 조지는 위엄을 잃지 않은 서부의 증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존 포드의 무법자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