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제임스 그레이는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이 범죄물을 만든 것은 단지 투자가 잘 되서였다고 밝힌 바가 있다. 확실히 그는 범죄물을 만들때에도 어떤 멜로드라마적인 중력으로 인물들을 축축히 젖어들게 하는데 훨씬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족을 떠난 큰아들은 범죄자로 다시 돌아와 화해를 시도하지만 모든 걸 잃고 홀로 남겨지거나 ([리틀 오데사]), 아버지를 고발하거나 ([더 야드]) 잃고 ([위 오운 더 나잇]) 범죄 세계의 고리를 끊었던 주인공에서 우리는 그레이만의 쓸쓸한 멜로드라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범죄물에서 볼 수 있던 일탈이 주던 쾌감은 가족 공동체의 숙명적인 파국 앞에 숙연해지고, 제임스 그레이는 그 과정을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제의로 승화시켰다.
[투 러버스]는 그 점에서 매우 분명한 변곡점이었다. 전작들과 달리 인물들은 더러운 일에 손대지 않지만 가족의 사업과 사랑은 여전히 강하게 주인공을 이끄는 중력으로 남아있고, 총소리 대신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과 공기, [이창]식 사진 찍기와 엿보기, 쓸쓸한 모래사장이 인물의 심리를 표현했다. 어느 누구도 죽지 않기에 이 젖어버린 원형적인 멜로드라마는 도리어 가슴 시리게 관객들을 자극했다. [이민자]는 어찌보면 [투 러버스]에서 관객을 매혹시켰던 고독과 슬픔의 원형을 찾으러 올라간 영화다.
제임스 그레이 커리어 최초의 역사극인 [이민자]는 무성영화의 시대이자 그의 조상들이 미국에 도착했던 1920년대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그레이는 약간의 변주를 가해 주인공을 폴란드계 이민자로 삼고 있는데, 마리옹 코티야르가 맡은 에바는 고풍스러운 여성 수난 드라마에 어울릴법한 캐릭터다. 에바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의지력이 강하지만, 영화가 시작할 무렵엔 적막한 비탄에 빠져 있는데 사랑하는 동생인 마그다가 이민국 심사대에서 결핵이 발견되어 구류된 상태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그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질 상황에 처한 에바는 손을 내미는 브루노라는 남자를 만나 보드빌 쇼걸로 시작했다가 매춘까지 나아간다. 그저 동생을 꺼낼수 있다는 한 줌의 희망으로 살아가던 에바는 어느날 브루노의 사촌, 마술사 올란도를 만나게 된다.
[이민자]의 시작은 멀리서 자유의 여신상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인물의 뒷모습이다. 망망대해에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에서 줌 아웃을 하면 우리는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가 자유의 여신상과 이민선을 보고 있는걸 발견한다. 이 장면에서 이 사람이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는,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배가 도착하는걸 보고 있는 것일까?
이때 시선의 구도를 잘 살펴보면 이 남자는 자유의 여신상 등 뒤에 배치되어있다. 적어도 배에서는 이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배가 바라보는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넘어와야지 이 남자가 뭔지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옷은 여신상과 대척된 검은 색이라는 점에서, 그레이는 이 남자를 자유의 여신상과 대조되는 존재로 배치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자유의 여신상과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미장센은 [이민자]가 이루는 권력 관계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된다. 우리는 에바의 눈으로 브루노가 에바와 다름 없는 이민자이며, 그 역시 자유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온 이민자 여성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걸 알게 된다. 브루노는 그가 착취하는 여성들과 지위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단지 좀 더 영악하게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가 에바에게 자신과 자신의 여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라. 브루노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과 여성들이 수평적인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브루노 입장에서는 당연한게,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브루노와 익명의 이민자 여성들은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기만이다. 브루노의 강변에는 젠더적인 문제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브루노의 못남과 악함은 그런 기만을 통해 자기합리화를 하며 자신 밑에 있는 여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에 나온다. 그레이는 브루노의 기만을 에바가 살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이유로 고전적인 수난을 당하는 부분으로 드러낸다. 에바는 그레이가 밝혔듯이 "집단을 향한 절박한 소속감"을 자기 이모부에게 드러내지만, 이모부는 에바가 정조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에바에게 모욕을 주고 쫓아낸다. 사실상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다를바 없는 재재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자 계급인 한기에게 맞춰져 객체화되던 선화와 달리, 에바가 주체를 잃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 순간 에바가 겪어야 하는 차별의 고통과 슬픔은 브루노나 올란도 같은 남성들에게 걸러진 것이 아닌, 온전히 에바만의 것이다.
그런 주체를 표출하는 영화적인 연출이 매우 무성영화 시절 멜로드라마적 전통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되겠다. 마리옹 코티야르는 유럽 무성영화 여배우들을 연상케하는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인상을 이용해 종종 감정선을 드라마틱하게 표출하는 연기를 선보이곤 하는데 (일상복을 입은 프리마 돈나 연기를 선보였던 자크 오디아르의 [러스트 앤 본]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민자]는 코티야르의 가능성을 잘 뽑아낸 영화들 중 하나로 기억될듯 하다. 성당에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살기 위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죄일까요?"라고 울먹이는 에바의 얼굴과, 그 에바의 얼굴을 잡아낸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는 [잔 다르크의 수난]의 마리아 팔코네티 같은 무성영화 배우들이 선보였던 극적인 아름다움을 뽑아내고 있다.
[이민자]에 이르면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인물들을 작용하던 '중력'이 아예 극적 장치로 드러난다. 바로 올란도의 마술이다. 올란도가 공중에 떠오르는 마술을 부리는 장면은 그동안 제임스 그레이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가장 갈망하던 욕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범죄물에 속해있을때 은밀하게 숨겨져있던 그레이만의 어법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에바가 올란도에게 이끌리는 이유도 그런 공중 부양으로 대표되는 중력을 거스르는 삶에 매혹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란도는 브루노 없이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그 방법을 자신이 가르쳐주겠다고 에바에게 말한다. 스릴러를 의도치 않음에도 이 과정은 의외로 서스펜스가 강한데, 인물들이 갈망하는 '자유'와 '소속감'이 정말로 이뤄질것인지 (올란도는 그 가벼운 행태 때문에 어떤 확신을 주긴 어려운 존재다.) 부터 시작해 이미 쌓여진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중력을 거스르는 삶에 대한 매혹은 우연한 실수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영화는 다시 브루노와 에바의 관계로 돌아간다. 역설적이게도, 브루노가 모든 걸 잃고 몰락한 순간부터 브루노와 에바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에바는 자신을 망가트린 브루노를 이해하고 도우려고 하며 브루노는 그런 에바의 행동을 통해 뼈저린 아픔과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관계의 역전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 다시 고해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실은 이 장면에서 에바의 고해는 브루노가 듣고 있었다. [투 러버스]에서 로날드가 아파 누워있는 미셸에게 하는 이야기를 레너드가 훔쳐듣는 장면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감정이 깊어지거나 변하는 어떤 순간을 엿보기/엿듣기를 통해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엿듣는 자는 엿듣기를 통해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을 강화시킨다. 레너드가 엿듣기를 통해 미셸에 대한 상처의 디아스포라를 강화했던 것처럼, 브루노는 에바가 여성으로써 겪었던 수난을 고백하는 과정을 엿들으면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제임스 그레이는 로버트 맥기의 용어를 빌리자면, 한 씬 내의 행동과 감정의 단위인 비트를 섬세하게 조작해 어떤 통합된 감정으로 이끌어내는데 재능을 발하고 있다. [투 러버스]의 레너드의 리스트컷을 만지는 산드라의 손이 그랬고, [이민자]에 발에 입을 맞추는 장면과 어둠속에 침잠한 여인의 표정이 그렇다.
물론 브루노의 참회가 진심이 아닐수도 있다. 그가 영화 내내 보여준 기만에서 비롯된 악행이 강하기 때문에, 참회를 한 이후에도 일부러 에바를 괴롭히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엔 충분하다. 지금까지 그레이의 예술적 동반자를 해온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런 부분까지 잡아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민자]의 마지막은 그런 기만으로 가득찬 브루노마저도 받아들이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거울을 이용한 프레이밍이 노골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거울이 등장하지 않는 멜로드라마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라는 멜로드라마의 전통을 의식한것은 틀림없다.) 마침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 바다로 나아가는 자와, 자신의 죄를 인정하러 떠나는 자의 쓸쓸한 퇴로를 묘사하는 미장센엔 어떤 중력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다. 익숙한 가족의 품이 아닌,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는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레이의 차기작 [잃어버린 도시 Z]이 모험물이라는 점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한 선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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