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심플 맨 [Simple Men] (1992)

giantroot2014. 2. 5. 13:09


심플맨

Simple Men 
6
감독
할 하틀리
출연
로버트 존 버크, 빌 세이지, 카렌 실라스, 엘리나 뢰벤존, 마틴 도노반
정보
드라마, 공포, 코미디 | 영국, 이탈리아, 미국 | 105 분 | -

할 하틀리은 왜 몰락했을까? 물론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감독에게 몰락이라고 단어를 붙여주는 건 굉장한 모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를 비롯한 괜찮은 배우과 작업하며 미국 영화를 이끌고 갈 거라고 기대받은 감독의 현재는 그렇게 밝질 못하다.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헨리 풀]의 정점으로 할 하틀리는 위트 스틸먼과 함께 제임스 그레이,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소피아 코폴라, 데이비드 O. 러셀 같은 이름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처럼 주류에 투신한 것도 아니였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영화를 만들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비평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젠 그를 그토록 사랑했던 칸 영화제에서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가 왜 몰락했는지는 조금 미뤄두고 먼저 창작의 절정기에 만들었던 [심플 맨]을 보자. [심플 맨]의 시작은 바로 '움직이지 마Don't Move'다. 눈을 가린 경비원은 여자가 한 치 앞도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빌은 경비원이 가지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목걸이를 보는데, 경비원은 '이건 절 보호하는 부적이에요.'라고 말한다. 빌은 그 부적을 빼앗으면서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경비원은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고 '당신이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할 하틀리는 이 대사들을 통해 90년대 미국 청춘들의 현 위치를 정립한다. 그들은 움직일수도 없고, 보호같은건 필요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는 선언은 어찌보면 빌과 데니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빌이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세상에 배신당하고 범죄자가 되어 절망한 빌이 데니스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전개는 비슷한 '탈선' (그들의 아버지는 야구 선수이자 극좌 테러리스트다.) 의 길을 걸었던 베이비 부머-히피 세대이자 아버지 세대를 찾아가는 정신적인 여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 하틀리는 히피 세대에 대해선 그리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롱아일랜드로 들어서기 직전 빌은 " 모험과 로맨스는 없어. 오직 고통과 욕망 뿐이야."라고 선언한다. 빌의 선언은 베이비 부머 히피에 대한 믿음보다는  이미 "모험과 로맨스"를 추구했던 히피 혁명은 실패로 끝난채, 속물적이고 안락한 여피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퇴락적인 반동만으로 가득차버렸다라는 감독 자신의 선언에 가깝다. 그를 입증하듯이 아버지의 집에 가봤을때 남아있는 건 잿더미가 된 잔해 뿐이라는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즉슨 모험과 로맨스의 시대는 한창 전에 끝난 반동의 시대에 살아가는 1990년대 청춘들의 표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 역시 계속 미뤄질 수 밖에 없다. 데니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있는 엘리나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고 하지만 엘리나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숨어다니다가 '나도 같이 도망가기로 했으나 잘 모른다. 그러니 나에게 부탁하지 마라. 아마 나 역시 버리고 벌써 여길 떠났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엘리나의 말은 아버지 세대가 미래에 대한 아들 세대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엘리나는 아버지 윌리엄을 아들의 이름인 빌으로 부른다. 둘은 도망가고 있는 범죄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다르다. 아버지는 계속 이상주의적인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 도피한다면 아들은 거기에 냉소하고 이상을 버리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마침내 아버지가 등장했을때도 우리는 그 초라함에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은채 새로운 여자와 함께 배를 떠날 준비를 하며, 아들들에게 그 모험조차 거짓이였노라고 (아버지는 테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성공하지 못하고 죄를 뒤집어 썼을 뿐이다.) 고백한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엄숙한 좌파적인 선언조차 추레한 롱아일랜드 시골 부둣가에서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프레임 속에서 허겁지겁 진행된다. 할 하틀리는 이를 통해 극적이고 이상화된 혁명의 환상을 부정한다.

대신 할 하틀리는 엉뚱하게도 1990년대 청춘의 "모험과 로맨스"를 아버지로 가는 여정 '도중'에 등장시킨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사랑을 부정하려고 했던 빌은 우연히 들른 케이트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때도 빌은 그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움직일수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그는 자신의 감정에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이어지는 케이트와 빌의 로맨스는 거칠거나 화끈하지 않다. 심지어 터질만한 사건이 (옛 남편의 등장, 케이트를 짝사랑하는 남자 등등) 등장하는데도 하틀리는 재빠르게 그 싹을 잘라버리고 다시 일상의 무덤덤함에 밀어넣는다. [국외자들]을 패러디한, 소닉 유스의 'Kool Thing'이 흘러나오는 유명한 댄스 씬이 그렇다.  하틀리는 로맨스의 열정 대신 덤덤한 톤으로 세상사의 복잡함과 그에 대한 시니컬함을 쿨하게 늘어놓는 방식으로 로맨스를 전개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젠체하는 태도가 막상 영화를 보면 그리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틀리는 태도는 그렇게 취하고 있어도 나름대로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정해놓고 있다. [심플 맨]의 식어빠진듯한 로맨스 묘사는, 혁명이 끝난 뒤를 살아가는 슬랙커 청년들에게 사랑도 뜨거운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지루함에 파묻힌 놀랍지 않은 일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에도 가치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빌이 마지막에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케이트를 선택하는 것에서 귀결된다. 로맨스와 모험을 믿지 않는, 단순한 남자이더라도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위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할 하틀리의 [심플 맨]은 슬랙커 세대의 영화다. 만약 그가 1990년대 미국 인디 영화의 기수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초기 고다르를 연상시키게 하는 자의식 넘치는 연출과 현학적인 대화들과 달리, 그 속에 담긴 소박한 진심이 슬랙커 세대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9.11 테러가 터지고 슬랙커 세대들도 사회에 들어서면서 할 하틀리 역시 방향을 잃은 것 같다.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서, 그의 단순하고도 낙천적인 무덤덤함은 공포 속에 잊혀져 버렸다. 테러리스트가 농담으로 받아들여질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는 과연 슬랙커 세대의 시간축에 멈춰선 화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움직일 것인가. 나로써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슬랙커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될만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