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설이 있습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시작엔 대사가 없다. 손목을 다친 여자가 공항에서 누구를 향해 손짓을 한다. 여자가 반기는 누군가가 누군지 관객들이 궁금해하면 카메라는 곧 남자를 보여준다. 하지만 남자는 카메라 쪽에 있는 여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여자는 남자 곁에 있던 타인의 관심을 끌어 간신히 만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만남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영화의 여주인공인 베레니스 베조의 대표작인 무성영화 복원작 [아티스트]에 대한 파르하디의 농담인걸까?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 장면만으로는 우리는 이 캐릭터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 연인? 부부? 아님 그 아무것도 아닌 관계? 그리고 그 베일에 쌓인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여러차례의 시도 끝에 서로 만나지만 실제적인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의문을 뒤로 하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인물들은 차로 옮겨가면서 대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던 중 여자는 차를 빼다가 실수로 뒤에 쿵하고 부딪힌다. 그리고 빗물을 쓸어내는 와이퍼 CG가 쓰인 타이틀 (Le Passe 과거)이 뜬다. 이 장면들엔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해서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난 충돌을 다룰 것이며, '과거'에 흘러내리는 빗물들을 쓸어내는 이미지를 통해 과거와 그 잔향에 대해 다룰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영화가 계속 되면서 우리는 두 남녀를 둘러싼 인물들을 소개받는다. 마리를 엄마라 부르는 세 남매, 마리의 새로운 남친 사미르... 이혼 수속을 준비하는 마리와 아마드는 얼핏보면 아이를 두 명 낳은 후 완전히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혼 법정에서 사실 마리와 아마드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루시의 반항이 그 평범하게 보이는 풍경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루시의 폭로와 이혼 법정을 기점으로 관객이 기본적으로 탐지할 수 있는 영역의 진실이 아닌, 그 아래를 파고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파고드는 과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루시가 어머니 마리에게 반항심을 갖는 이유가 현 남친인 사미르와 사미르의 혼수상태에 빠진 전 부인 셀린에 대한 문제라는걸 알게 된다. 하지만 셀린이 자살시도한 이유에 대해서 루시와 마리가 말하는 진실은 다르다. 루시는 사미르와 마리의 관계가 셀린을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마리는 셀린이 원래부터 불안정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해 원래부터 셀린이 불안정했다는 마리의 말이 맞다는게 드러나지만, 루시는 사실 자신이 셀린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울면서 고백한다. 비단 루시와 마리 뿐만이 아니라, 영화는 '셀린의 자살시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다른 이들도 조금씩 관여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영화를 진행한다. 심지어 마리네라는 '이방인'인 아마드조차도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는 밝히지는 않다.)
궁극적으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과거의 역공학'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역공학 (혹은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특정한 기계의 내부 설계구조를 알 수 없을때 안을 뜯어서 제품의 제조과정과 기술을 파악하는 기술을 말하는 것인데,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마리의 가족-참고로 이 영화의 관계의 중심은 여성 위주로 돌아간다. 단적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세 아이들은 아버지가 모두 다르다.-이라는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그 문제를 역으로 해체해 그 문제의 동력과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 재미있게도 영화의 결말 부분엔 푸아드가 나무에 걸린 헬리콥터를 재조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동기로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을 대응하는지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이 헬리콥터가 날아가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어디로 '날아가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조종하며 즐거워하는 아마르와 아이들의 모습만이 나올 뿐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인물들 그 다음에 마지막을 장식하는건 병석의 누워있는 셀린이다. 모든 것을 안 사미르는 셀린이 깨어날지 물어보지만 아무도 그 여부를 알 수 없고 사미르가 할 수 있는건 손을 잡는 것이다. 즉슨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엔 '결'이 없다. 혹은 '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 에서 계속 이어지는 기다림이거나 탐색의 중지 (아마드의 우울증 때문에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고 어떻게 이혼으로 이어졌는지)다. 궁극적으로 파르하디는 영화 내내 '결'을 계속 유보하며 이는 영화 전체의 도덕론으로 이어진다.
이런 태도의 도덕론은 곧 미스터리의 구조에도 크게 변화를 미친다. 일반적인 미스터리 영화들과 달리 파르하디는 그 문제를 일으킨 부품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가 과거의 역공학을 통해 발견한 것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차를 빼다가 실수로 쿵하고 부딪치며 만들어낸 울림이다. 그 울림은 곧 인물들 사이로 배어들어 인물의 심리에 지울수 없는 얼룩 (마치 쿠로사와 키요시의 [회로]에 등장하는 얼룩처럼)을 남긴다. 파르하디 감독은 우연한 실수가 어떤 흐름을 만들고 끝내 현재에 미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젖어있는 이미지라던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동선의 흐름을 강조한다. 속을 알 수 없는 과거의 정확한 동력과 구조 를 알아내기 위한 역공학 속에서 이방인인 아마드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젖거나 묻으며 그 와중에 인물들은 방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오고 (마리와 아마드가 루시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 하는 동안 사미를 자동차 열쇠를 찾으러 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한다), 전철 음향은 컷과 컷 사이의 공간 간극을 무시하고 전 장면에서 넘어와 다음 장면에서 페이드인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영화가 모든 사건을 정리하면서 내세우는 도덕론은 뜻밖에도 이란적인 전통에서 온다. 중반에 마리가 선물을 함부로 연 아이들을 혼내면서 "잘못한 게 있어서 벌 받아야 하거든요."라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정작 영화 내내 자신의 잘못을 고해하며 벌 받는 자세로 서 있는 사람들은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다. 마리는 이란 남자들 사이에 유일한 프랑스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마리가 내세우는 단죄적인 도덕론은 '서구적'인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은 영화 내내 끝없이 파헤치는 유보된 끝에 중지된다. 도무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죄적인 도덕론에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이란'에서 온 아마드와 아마드의 친구인 이란 이민자 샤리아다. 아마드야 영화의 주인공이자 관찰자에 위치해 있는 사람이지만 샤리아가 아마드를 위해 하는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만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이 잊어버림은 단죄에 대한 것이지, 궁극적으로 '머물러있는' 죄에 대한 것은 아니다. 파르하디는 과거에 있었던 잘못은 어떤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인과들은 평등하게 맞물려돌아간다고 역공학을 통해 알아낸다. 그렇기에 파르하디는 단죄를 잊어야지 미래로 나갈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마드의 과거가 더 이상 밝혀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치다. 중요한 것은 그 단죄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을 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르하디가 껍질을 벗기듯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도덕론은 분명 서구적인 관점에서는 신선한 구석이 있다. 물론 파르하디의 도덕론에도 반론이 제기될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엔 양비론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파르하디가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론을 풀어가는 과거의 역공학, 나아가 서사의 공학은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그 점에서 잘 만들어진 설계도와 훌륭한 재료들 (배우의 연기)로 만들어진 기계가 작동하는 걸 보는 것과 같은 쾌감이 작동하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재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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