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문라이팅 [Moonlighting] (1982)

giantroot2014. 1. 16. 12:55
2012/10/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딥 엔드 [Deep End] (1970)
2013/06/28 - [Deeper Into Movie/리뷰] - 에센셜 킬링 [Essenstial Killing] (2010)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의 시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번쩍번쩍하는 조명 아래에서 머리를 다듬으며 기괴한 억양으로 안내를 하는 여성 안내원의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안정되지 못한 도입부의 미장센에 이어 우리는 그 안내원 앞에서 폴란드에서 온 주인공들이 입국하기 위해 기다리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관객들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노박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객들은 이 도입부를 보면서 영국으로 온 이들, 특히 노박이 절대로 편안한 여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이런 등장인물들이 겪을 불편함에 대한 직감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스콜리모프스키는 캐릭터의 심리에 있는 불안함을 동력으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감독이다. 그것이 보답받지 못할 성욕 ([딥 엔드])이던, 추격과 감금에 대한 두려움 ([에센셜 킬링])이던, 붕괴에 대한 공포 ([외침])이던 그것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파고들어 궁극적으로 지각과 서사를 왜곡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영화에서 평범하게 사건을 진행시키는듯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초현실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배치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문라이팅]의 노박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전반적으로 [문라이팅]은 [에센셜 킬링]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반대편에 있다. 먼저  두 영화에서 인물의 불안함과 고립을 가중시키는 원인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며 ([문라이팅]에서 주인공 일행의 고립은 폴란드 민주화 투쟁으로 비롯된다.) 그 과정에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라이팅]과 [에센셜 킬링]은 비슷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언어가 삭제되고 모든 대화들이 일종의 '효과음'화되어갔던 [에센셜 킬링]의 모하메드와 달리 [문라이팅]의 노박은 쉴새없이 영어로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떠들어댄다. 

하지만 그 대화는 오로지 노박과 관객만의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다는 점에서 [에센셜 킬링]처럼 효과음화 되어간다. 폴란드어로 이뤄지는 동료들간의 대화는 노박의 기만이 섞여 있으며 궁극적으로 서사에서 타자화된다. 이 영화에서 폴란드 동료들은 그야말로 '배경'이다. 폴란드인이 아닌 영국인들과 하는 대화는 긴장과 불편함으로 가득차 있다. 혹은 기능적이다. 전화는 되지 않고 본국에 있는 아내는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노박은 서서히 이상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훔치기 위해 저지르는 짓이라던가, 자전거를 도둑맞은 후 태연히 앞집 불륜녀의 자전거를 훔쳐타는 장면, 기껏 쓰레기장에서 얻은 텔레비전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채 방치되다가 노박의 발광 끝에 부숴지는 장면이 그렇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화면은 노박의 이상심리로 가득차게 되고, 모든 사건들은 끝없이 팽창하는 노박의 심리를 반영하듯 신경질적인 유머를 품은 채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그 팽창 과정에는 다양한 음향들이 함께한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한스 짐머가 음악감독 보조격으로 참여한 작품이며 짐머는 감독의 다음작인 [성공은 최고의 복수다]에서 음악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스콜리모프스키의 다른 영화가 그랬듯이 [문라이팅]의 끝도 부풀어오른 풍선을 터트리는 파국이다. 불안은 시퀀스별로 차곡차곡 누적되어가기에 주인공은 더이상 견디질 못하고 극단을 선택해 어떤 자폭적인 해방을 맞이한다. 그런데 죽음으로 끌어냈던 [외침], [딥 엔드], [에센셜 킬링]과 달리 [문라이팅]은 고해로 파국을 이끌어낸다. 정치 상황이 진정되고 노박의 거짓말로 돌아가는 날까지 어찌 버틴 노박과 동료들은 돈이 없기에 밤새도록 공항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이때 노박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으며 본국 상황을 스콜리모프스키는 여기서 인물들을 어둠 속에 실루엣만으로 간신히 보이게 배치시키고, 정확한 고해 내용을 들려주지 않는다. 노박의 고해가 끝나자 동료들은 노박을 두들겨패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쇼핑카트는 관객쪽으로 굴러내려온다.

[에센셜 킬링]이 그랬듯이 [문라이팅]도 직접적인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는 영화지만, 이 결말의 장면 구성은   영화가 만들어졌을 당시 바웬사의 독립 자유 노동조합 연대가 여전히 고난을 겪고 있었으며 스콜리모프스키 본인도 정부의 억압을 피해 망명 생활을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한창 남은 목적지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진실을 토로했을때 그 격한 반발을 혼자 감내해야 하며 끝끝내 그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노박의 모습은 바웬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며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점에서 노박은 의외로 예수를 닮은 구석이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다.  

[문라이팅]이 보편적인 지지를 얻을수 있다면  이해받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고난을 겪여야 하는 인간사의 난처함에 대한 공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공감은 당시 폴란드의 암울한 정치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폴란드 민중들과 스콜리모프스키 개인사가 빚어낸 결과물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