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언더그라운드 이전에 1960년대 초반의 뉴욕은 포크와 재즈의 영역이였다. 밥 딜런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여러 포크 가수들이 통기타 하나를 들고 미국 각지에서 모여든 민요와, 거기서 영감을 받아 현 시대를 이야기하는 포크 가수들이 있었다. [인사이드 르윈]은 그런 포크 가수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사이드 르윈]은 포크 가수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순환의 구조를 띄고 있는 로드 무비이다.
먼저 코엔 형제는 이 영화를 위해 데이브 반 롱크라는 뮤지션을 데려온다. [인사이드 르윈]은 롱크의 자서전인 [맥두걸 가의 시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데려온 데이브 반 롱크에게 무작정 주인공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데이브 반 롱크의 명성을 탈색시키고 찌질하게 (?) 성격을 만들어 추운 겨울 거리로 내던진다. 이 정도면 실존 인물에 대한 모독, 아니 거의 무관한 영화라 할 정도다. 그런 모독에 가까운 주인공 캐릭터 창조는 영화의 시작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지난 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창문에서 안으로 엉거주춤하게 들어오는 르윈의 모습이다.
이런 꼬락서니니 영화 속 르윈의 대접은 당연히 좋을리가 없다. 르윈도 자신의 꼬인 상황에 대해 신경질적인 언사를 내뱉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영화 속 르윈은 죽음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그의 친구는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으며, 돈은 없는데다 계속 장소를 옮기지만 안식을 얻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업적인 노선을 택해 돈을 벌거나 아니면 음악이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가지만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여름 코트 하나로 버티고 있는 르윈의 모습은 그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단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그는 바깥 장면에선 매도당하거나 (진에게 매도당하기, 구타, 고양이 추격하기) 철저히 혼자다. (지하철) 즉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는 바깥의 위험에 취약하다. 심지어 그는 맡겨놓은 고양이 율리시즈를 잃어버린다. 고양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사이드 르윈]은 추위와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한 도시의 방랑자가 겪는 로드 무비다.
심술궃게도 르윈은 추위를 피해 들어온 실내에서도 대부분 비좁은 미장센에 시달린다. 전 애인이자 안락한 삶을 꿈꾸는 진의 집 복도는 양쪽으로 꽉 막힌데다 비틀어져 있으며, 누나의 집에선 거실이나 방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인물들은 좁은 부엌에서 대화를 나눈다. 카페 가스등에서도 르윈은 불편하게 끼어있거나 관중들의 바깥 쪽에 배치되어 있다. 그나마 돈을 벌 수 있는 스튜디오에서는 한숨 돌리지만 그곳조차도 대타로 온 곳이기에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희망이 보이는 시카고로 가기 위해 히치하이킹해 탄 차도 마찬가지여서 기괴한 인물 둘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 두 명이 약쟁이 재즈 뮤지션과 운전하는 비트 시인이라는 점은 길과 모험, 일탈을 찬양했던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에 대한 코엔 형제의 오마쥬라는게 분명하지만 (친절하게도 코엔 형제는 관객이 그 오마쥬를 못 알아볼까봐 2012년 영화판에서 딘 모리아티를 맡은 배우를 데려와 연기를 시킨다.) [길 위에서]에서 있었던 생명력은 찾을 수 없다. 재즈 뮤지션은 휴게소 화장실에서 약을 하다 쓰러져 잠들고 , 퉁명스러운 단답형 말만 내뱉던 운전수는 경찰에게 오해받아 잡혀간다. 일탈이든, 정착이든 어느 쪽이든 르윈에게는 구체적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를 내치거나 그저 빙빙 맴돌다 사라진다.
시카고의 버드 그로스맨의 공연장에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이 다시 등장한다. 이 공간에서 르윈은 어떤 해방감과 동시에 기대감을 같이 가지게 된다. 분명 이 카페는 잠시 급하게 들렀다 떠난 스튜디오와는 다른 분위기로 차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공연장은 사람이 없으며 불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아 황량한 느낌마저 줘 관객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버드는 르윈의 연주를 듣고 솔로로써 재능이 없다며 거절하며 "트리오로 해보는게 어떠냐고" 말한다. 르윈은 거절한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아직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 있으며 아직 새로 시작할만한 여력이 없다. 그렇기에 르윈은 어줍잖은 정착을 선택하지 못한다.
보통 영화라면 여기서 주인공이 산화하거나 어떻게든 제시된 틀에 맞추려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르윈을 뉴욕으로 돌아가게 한다. 중간에 다시 정착의 기회가 찾아오지만 르윈은 선택하지 못한다. 돌아온 뉴욕에서도 [율리시즈]적인 순환적인 방랑는 계속 이어진다. 뉴욕으로 돌아온 르윈은 영화 내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한다. 바로 음 악을 포기하고 선원이 되려는 것으로 '음악인으로써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정들었던 가스등을 꼬장 부리는 것으로로 마음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르윈은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아니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무위로 돌아간다. 결국 그는 다시 돌아와 연주를 한다. 그러다 꼬장 부린 댓가로 르윈은 얻어맞지만 르윈은 그 사람에게 '아듀'라고 말한다.
먼저 그 아듀가 매우 유쾌한 투로 나와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르윈은 자신을 두들겨 팬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투다. 그리고 이 장면이 첫 장면과 동일한 필름을 쓰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결말에 당황할수 밖에 없는데, 이 결말은 수미상관이긴 해도 어떤 분명한 매듭이 있는게 있는게 아니다. 단적으로 르윈의 문제는 영화가 끝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여전히 돈은 안 되고 (밥 딜런이 등장했으니 더더욱) 죽음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고 있다.
하지만 그 유쾌한 투의 아듀를 생각해보면, 영원히 비슷한 순환 구조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만 같았던 르윈의 삶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는게 관객들도 알 수 있다. 분명 초반의 뉴욕과 후반의 뉴욕은 분명 다르다. 맨날 퉁명스러울 것 같았던 진은 음악을 그만 둔다는 르윈의 말에 놀라 계속 음악을 해보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가스등 주인은 그 꼬장을 부리고도 순순히 노래를 부를수 있게 용서해준다. 그리고 영영 잃어버린줄 알았던 고양이도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이런 변화는 진전이나 붕괴에 대한 암시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르윈을 압박하는 순환 구조는 끊어지지 않았고 공고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체념 속에서도 마냥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과 여유가 생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얻어맞으면서도 웃으며 아듀를 날릴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순환 구조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질수 있는건 아니다. 어떤 이는 평생을 무명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르윈도 높은 확률로 잊혀졌을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이 위대해질수 있다면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가 그랬듯이 앞이 보이지 않지만 절망도 아닌, 회색 지대를 전전하며 살아가다 끝내 묻히는 범인凡人과 그 범인이 마지못해 보여주는 긍정성 때문일것이다. 그 마지못해 보여주는 긍정성이야 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자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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