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De battre mon coeur s'est arrêté / The Beat That My Heart Skipped] (2005)

giantroot2014. 2. 19.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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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The Beat That My Heart Skipped 
9
감독
자크 오디아르
출연
로맹 뒤리스, 오레 아티카, 닐스 아르스트럽, 조나단 자카이, 지르 코앙
정보
액션, 범죄 | 프랑스 | 107 분 | -


자크 오디아르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공 톰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며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주인공의 친구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마침내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뭔가가 남아있는 것 같다는 친구의 고백과 그 고백을 들어주는 톰의 모습은 곧 톰이 앞으로 겪을 이야기에 대한 예고편이기도 하며, 영화의 방향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노골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그 말 그대로,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범죄의 영역에 있는 아버지 아래에 살아가는 한 남성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벗어나는 도구로는 음악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허약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범죄 세계에 발을 담근 아들과 아버지(들)을 다룬 장준환의 [화이] 에선 아들은 강력하고 잔혹한 아버지에 맹렬히 저항하며 아버지 역시 그런 아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이 둘의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은 마침내 아들의 아버지 살해라는 실재적인 행동을 통해 해방된다. 


하지만 오디아르가 그려내는 부자 지간의 갈등은 격렬하지 않다. 분명 톰은 아버지인 로베르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한다. 하지만 톰이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뜻을 따라 '음악'을 선택했을때 로베르는 듣기 싫은 잔소리만 몇 번 뱉고 반대할 뿐 톰을 때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톰은 이미 28살에 직장이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따로 산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질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 로베르의 허약함은 단순히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외부에도 취약하다. 영화에서 로베르가 겪는 두 번의 충돌은 모두 아버지의 패배로 끝난다. 톰은 그런 아버지의 패배를 대신 복수해준다.  심지어 여자에 대한 마초적인 생각을 여지 없이 드러냄에도 로베르는 여자에 대해 제대로 된 통제를 휘두르지 못하고 톰은 로베르랑 헤어진 여자에게 찾아가 아버지랑 다시 사이 좋게 지내달라고 얘기한다. 로베르는 한마디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력한 아버지다. 너무 무력해서 아들이 대신 아버지가 겪어야 할 일을 처리해야 할 지경이다.   심지어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를 톰은 군말없이 침대에 눕혀 바지를 벗긴다.


이런 아버지를 허약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에서 아버지랑 충돌하고 끝내 죽음을 몰고가는 캐릭터들이 프랑스인이 아닌 이민자라는 점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는 유럽 선진국으로 다양한 이민자들이 오는 나라이며, 그것이 하나의 국가적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는 나라다. 그렇다면 오디아르는 백인 국가로써 프랑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주민 때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 영화의 주인공이 로베르였다면 그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로베르가 아니라 톰이라는 걸 명심하면 조금 다르게 해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톰은 아버지가 있는 영역의 반대편으로 움직이려고 하며  그 반대편엔 어머니-예술이 있다. 그런데 그 어머니-예술로 톰을 이끄는 자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이주민인 중국인 여성 피아니스트 먀오 링이다.  재미있는건 원작인 [핑거스]에선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없진 않는데, 그걸 리메이크한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에서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다는 점이다. 고로 톰하고 얽히는 먀오 링과 알린은 톰이 어머니를  채우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전부터 이미 그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모습으로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오디아르 영화답게 영화의 음악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알렉상드르 데스플랑의 사운드트랙을 넘나든다. 그리고 그 선곡도 훌륭하다.)


반대로 톰이 걸치고 있는 세계인 불법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톰의 프랑스인 동료들은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동료들로 대표되는 프랑스인들의 세계는 톰이 가고자 하는 예술에 대한 이해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자들이며 동료 중 하나는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가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오디아르는 이 두 세계 간의 간극을 섹스 장면의 절제로 표현한다. 후일 발표한 [예언자]나 [러스트 앤 본]과 달리,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는 섹스'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나오는 것은 전희 과정과 후희 뿐이다. [예언자]에서는 섹스가 죄책감과 합일, 갇혀있는 상황에 대한 반발의 기제로써 등장하고 [러스트 앤 본]은 육체의 상실과 정신의 붕괴를 메꾸려는 노력의 과정으로 등장한다면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에서는 섹스는 섹스 그 자체보다는, 섹스 전후로 등장하는 감정과 상황이 가져다는 은밀한 쾌락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오디아르는 그 은밀한 쾌락를 예술과 연관시킨다.


주목할만한 장면이 하나 있다. 톰이 섹스를 하기 위해 옷을 벗은 알린에게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잠시 있어달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사엔 그다지 관계 없지만 인상에 남는 장면이다. 가슴을 가리는 행위은, 생식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거세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같은 미술품들에 등장하는 여성 누드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 속에서 로베르와 톰의 동료들이 섹스와 여성에 대해 취하는 태도 (단적으로 알린은 톰의 친구의 아내인데, 이 친구는 바람을 피고 있다.)를 생각해보면, 톰의 행위들은 상당히 여성적이고 "계집애같다고" 동성 집단에서 조롱당할수 있는 행위들인 것이다.


자연히 두 세계는 충돌하게 되고, 톰은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충돌의 클라이맥스는 다음날 오디션을 보러 가야하는 톰 앞에 한밤중에 동료들이 집에 쳐들어와 강제로 끌고가 철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톰의 친구들은 음악을 틀어놓고 이주민들을 두들겨패고 내쫓는데 이 과정에서 톰의 친구들은 서사 내에서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오디션 실패 후 아버지 로베르의 죽음을 확인 한 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그들이 등장하지도 언급되지도 않는 점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톰, 나아가 영화의 가치를 무시했으며 서사 내에서 퇴출 당하는 것이다. 톰이 끝내 알린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알린 역시 그 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도달한 에필로그에서 기만을 한다. 톰은 콘서트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객석을 보여주지 않고 톰이 연주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연주가 끝난 뒤 카메라는 천천히 왼쪽 뒤로 빠지면서 객석을 정리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시하는 톰을 보여주면서 이 콘서트장이 연주회를 준비하기 위한 리허설이라는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음 컷에서 톰이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을 가르쳐 준 먀오 링을 지원해주는 매니저가 됬으며 연인관계가 됬다는 걸 알려준다. 이 기만을 통해 영화는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마침내 음악가로 대성한다'라는 음악 장르의 법칙을 일부러 깨트리고 있으며 동시에 기존 백인층에 속하는 톰이 프랑스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민자들을 지원해주고 이끄는 위치로 순순히 내려왔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피아노를 치던 톰의 손은 이제 피곤해하는 피아니스트 먀오 링의 목을 주무른다. 그리고 그  먀오 링은 톰에게 프랑스어를 배워 유창하게 한다.


그런데 영화는 행복해하는 둘의 모습으로 끝내지 않고 톰이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인 민스코프을 쫓아가 두들겨 패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톰의 친구들이 아예 언급도 되지 않고 퇴출당한 걸 생각해보면, 그런 태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충돌을 일으켰던) 아버지 로베르의 죽음 그리고 부재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2년 후에도 끝까지 남아있다가 복수를 하는 것은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 아까 로베르의 허약함을 생각해보면 이 감정이 양가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도입부에 언급되었던 아버지에게서 해방되고 싶지만 동시에 그의 부재를 견딜수 없는 그런 감정 말이다. 결국 이 폭력엔 구시대에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결국엔 허약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를 버려둘 수 없는 톰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는 것이다.


톰이 민스코프을 두들겨 패는 장소가 계단이며 액션의 동선이 하강 곡선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옛 프랑스를 대표하는 로베르는 죽었고 그 후예인 톰과 이민자로 살아가는 (참고로 민스코프 역시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 민스코프는 서로 싸우면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져 내려가고 있다. 이 하강하는 액션 동선은 한때 영국과 함께 국제 무대의 중심이였지만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는 프랑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톰과 민스코프의 싸움은 그런 프랑스 내의 갈등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이민자와 기존 프랑스인과의 갈등 말이다. 톰은 내심 아버지로 대표되는 서유럽 백인-프랑스적인 정체성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톰은 두들겨 패긴 해도 실제로 죽이진 못한다. 왜 톰은 두들겨패긴 해도 그를 죽이지는 못하는가?  그가 영화 내내 불법 이민자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다는걸 생각해보자. 민스코프 를 죽인다는 것은 이민자에게서 돈을 뺏고 내쫓는 아버지 세대의 실수를 톰의 동료들처럼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스코프의 폭력은 차라리 아버지를 완벽하게 보내기 위한 살풀이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결국 톰은 그 계단에서 '올라와'  먀오의 연주를 듣는다. 이제는 프랑스의 정체성을 선택해 살아가기 시작한 먀오 링의 연주를 기뻐하고 있는 톰의 모습은 그러나 우는지 웃는지 애매한 표정에서 잘리며 끝난다. 확실한 것은 결말에서 톰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열과 과거에 대한 슬픔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오디아르는 이민자가 만들어내는 프랑스적 정체성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고 아직 어떻게 될지 알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 영화가 순진한 아랍계 청년이 프랑스 감옥에서 배우며 범죄자로 만들어지는 [예언자]였던걸 (로베르 역의 닐스 아스트럽은 여기서도 아버지격 존재로 나온다.) 생각해보면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의 결말에 대한 대답으로 [예언자]를 만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오디아르 영화에는 이동진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배움이라는 소재가 중요하게 나온다.) 프랑스인는 음악을 배우며 범죄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민자의 성공을 뒷바라지 하고, 이주민은 반대로 범죄를 배우며 성공하게 된다. 


이것이 오디아르가 보는 프랑스의 현실인것일까?  적어도 오다아르 감독은 예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 같다. [예언자] 다음 영화인 [러스트 앤 본]에서는 배움의 문제가 이주민과 본토인 간의 문제가 아닌, 남녀 관계와 육체의 문제로 옮겨간걸 보면 말이다.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은 음악과 예술을 통해 아버지-남성- 프랑스의 영역을 탈출 해 음악-여성-이민자를 보조하는 사람 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프랑스적 정체성을 만들려는 시도를 담고 있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