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밀크 [Milk] (2008)

giantroot2010. 3. 13. 20:56

밀크
감독 구스 반 산트 (2008 / 미국)
출연 숀 펜, 에밀 허쉬, 조쉬 브롤린, 디에고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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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밀크의 삶과 죽음

한 게이 남자가 있었다. 유태인인 그는 사회에 나오고 난 이후부터 뉴욕의 증권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40살이 되던 1970년, 지금까지 살고 있던 삶에 대해 반성을 하고 새 삶을 위해 연인과 함께 거주지를 샌프란시스코 시 카스트로 가로 옮겼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애자들의 성지로 각광받고 있었고, 이 말 잘하고 호감가는 남자와 그의 카메라 가게는 곧 이들의 본거지가 된다. 결국 그는 그들을 대표해 세 번의 실패 끝에 샌프란시스코 시 의원이 되고, 미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공직자가 된다. 그는 그 자리을 이용해 억압받는 미국의 동성애자와 약자들을 위해 맞서 싸운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1978년 시 의원 댄 화이트가 당긴 방아쇠 때문에 스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1930년에 태어나 1978년에 죽은 실제 인물 하비 밀크Harvey Milk의 이야기도 하고, 이 사람에 대해 다룬 (지구상에 사는 동성애자 영화감독 중 탑클래스 급이라 할 만한) 거스 반 산트의 2008년 영화 [밀크]의 줄거리이기도 한다. 그만큼 [밀크]의 서사 구조는 전통적인 전기 영화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비 밀크의 삶은 순차적으로 펼쳐지며, 지난 시기를 회상하며 급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변수를 대비하는 밀크의 녹음과 자료 화면들이 간간히 끼어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스 반 산트의 내공은 이 때문에 더욱 빛나 보인다. 사실 반 산트의 전작인 [엘리펀트]처럼 관객에 대한 고려 없이 깊은 사유를 담은 필름을 찍는 것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다. (제작과정, 구상의 번거로움과 치열한 사유 과정 같은 요소들은 제외한다.) 그러나 [밀크]처럼 사유의 치열함과 깊이를 다루면서 일반 관객에 대한 고려를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는 힘들다. 선택의 폭이 한창 좁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 산트 역시 [밀크] 제작 전 이런 고충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고충에도 불구하고 [굿 윌 헌팅] 같은 만인이 인정하는 영화를 만들어낸 거스 반 산트는 이 어려운 과제를 치열하게 돌파한다. 이 영화에는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감지되었던 영상에 대한 반 산트의 심오한 감각과 직관이 살아있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이식되어 있다. 하비 밀크와 스콧이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를 찍은 장면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카메라 가게를 운영한다는 설정에 맞춰 카메라의 시점과 스틸 컷을 섞는 장면, 그리고 대단히 충격적이면서도 잊을 수 없는 밀크가 암살 당하는 장면 등 그저 보면 입이 딱 벌어지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연출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보면서 평범한 관객들이 난해하다던가 뭘 말하고 싶은거지?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반 산트는 영상 연출 뿐만이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는데도 탁월하고, 배우들도 그 실력과 조화롭게 이루고 있다. 누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에밀 허쉬를 보면서 [스피드 레이서]의 스피드 레이서를 떠올릴까? 밀크의 세번째 게이 연인 스콧에서 [스파이더맨]의 해리 오스본의 그림자가 느껴지던가? 조증과 얀데레 기질을 보이다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밀크의 네번째 연인 잭이 디에고 루나라고? 그만큼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듯이 자연스럽게 이들을 연기해낸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이 영화의 중심은 역시 숀 펜이 연기해낸 하비 밀크와 댄 화이트를 연기한 조쉬 브롤린이다. 숀 펜의 엄청난 연기는 이미 여러차례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밀크]에서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여기서 그는 극 중 하비 밀크가 느끼는 행복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고통, 장점과 단점들을 별다른 에고없이 표현해내며 진정으로 호감가는 하비 밀크라는 인물의 초상을 완성해낸다. 암살 당하던 날 새벽, 스캇과 통화하는 밀크, 즉 펜의 표정은 너무나도 처연하면서도 생생한 감정이 살아있다. 조쉬 브롤린은 그 반대편에서 묵묵히 보수적인 사고관 하에서 답답한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댄 화이트를 연기해내는데, 이는 숀 펜의 연기와 극적인 화학 효과를 발휘한다.


더스틴 랜스 블랙(이 사람 역시 게이다)의 각본은 어떠한가? 이 각본은 올해 겨우 36살이 된 사람이 처음 썼다고 믿기기 힘들 정도로 높은 성취도를 자랑한다. 이 각본가와 비교할 만한 첫 각본을 쓴 사람이라면 [주노]의 디아블로 코디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노]의 각본이 다소 쿨시크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이 영화를 좋아하고 있으니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밀크]의 각본은 사려깊다. 하비 밀크는 영웅이였지만 평범한 사람이 저지를 법한 실수와 결점 모두 지닌 남자였고, 댄 화이트는 동성애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평면적인 광신도 혹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모든 인물들은 입체적인 깊이와 해석할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대사들 역시 풍부한 유머와 진심이 담겨 있다.

블랙의 각본과 반 산트의 연출, 그리고 많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우려져 나오는 [밀크]의 메세지는 강력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하비 밀크는 비록 결점이 있었고, 그 결점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사람이였고, 똑똑한 두뇌와 그것을 어떻게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싸움은 단순한 게이의 인권 찾기 이상의, 참다운 삶의 가치를 찾고 싶어하던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싸움이였다. 그래서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정말 비통하고 '트윙키 변론'으로 대표되는 권력층의 무능함에 어처구니 없음을 넘어 분노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말하는 결론이 더욱 빛나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희망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으면 삶은 가치를 잃습니다."


동성애라는 소재가 다소 거북할수도 있겠지만 [밀크]와 그 주인공인 하비 밀크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긍정과 한 인간의 진실된 모습과 노력은 그 갭을 가볍게 뛰어넘고 마침내 동성애자가 아닌 관객조차 울리게 만든다. 미국, 더 나아가 세계가 아직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존재는 절대로 MB나 삼성 혹은 월스트리트 인간이나 조지 W. 부시가 아니다. 하비 밀크와 보이지 않는데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뒤늦게 도착한 [밀크]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한 무림고수의 영상 성취가 담겨있는, 우리 시대의 마스터피스다.

"이제 우리는 일어선다. 이제 우리는 모든 곳에 있다"
-닉 드레이크, 'From the Morinig'

"당신들 위하여, 니콜라와 바트.
우리 마음 속에서 영원히 안식하소서.
마지막 이별의 순간은 당신들의 것이지만, 그 고난은 당신들의 승리니깐요!"
-조안 바에즈 작사 엔리코 모리오네 작곡, 'Here's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