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

giantroot2010. 1. 11. 17:43
시네도키, 뉴욕
감독 찰리 카우프먼 (2008 / 미국)
출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제니퍼 제이슨 리, 호프 데이비스, 팀 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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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 State of Brain

[이터널 선샤인],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보듯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의 장기는 인간의 복잡다단하게 꼬인 정신세계를 두부 자르듯이 잘라서 그것의 단면을 관객들의 보여주는 것이였다.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인 [시네도키, 뉴욕]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의 그것을 기대하다간 당황할지도 모른다. [시네도키, 뉴욕]은 전작들하고 많이 다른 작품이니깐 말이다. 여러모로 이 작품은 찰리 카우프만이 작심하고 만든 거대한 문제작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미국 북동부 쯤에 있는듯한-분명 뉴욕이 나오니깐 뉴욕 주변일것이다-가공의 소도시에 사는 연극 연출가인 케이든 코타드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부부는 사랑이 식은지 오래이며, 죽을 병에 걸렸다는 불길한 징조들이 몸에 나타난다. 열정은 사라졌고 안정된 지위는 불만족스럽다. 첫 아내 아델이 그를 떠난 직후, 케이든에게 재단에서 예술 작품 제작을 위한 거금을 지원받게 된다. 여기에 자극받은 그는 거대한 야심에 사로잡혀 새 작품 제작에 들어간다. 바로 뉴욕 그 자체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미니어처처럼 정교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전 작품들에는 괴팍하지만 팔팔하게 뛰어다니는 매력이 있었다.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욕망에 대한 비틀린 위트나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에 대한 조크와 강렬한 사랑의 달콤함과 씁쓸함이 그랬다. 하지만 [시네도키, 뉴욕]에서는 그런 매력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카우프만이 묘사하는 케이든의 인생은 우중충하기 그지 없으며(하긴 죽음의 공포와 관계의 실패에서 번뇌하는 캐릭터의 인생이 밝을리는 없을것이다.), 유머들과 대사들 역시 (여전히 상급 퀄리티를 자랑하지만) 자조적으로 변했다. 존 브리온의 멋지지만 차분한 음악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한 몫한다. 

게다가 전작들에서 느껴졌던 사랑스러움도 줄어들었다. 캐릭터들은 종종 살아숨쉬는 인물들보다는 작가의 정교한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 자동인형처럼 보이며 (적어도 후반부 전까지는 그렇다.) 그간 카우프만을 빛나게 했던 상징들과 기발한 상상력 역시 관념적인 본색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 결과 영화는 인공적인 느낌이 강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르트르의 소설에서 자주 보던 사고 실험에 가까워졌다. 물론 카우프만의 이전작들 역시 사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시네도키, 뉴욕]은 상당히 노골적이다.
 

이 사고 실험스러운 이야기 전개는 중반부 케이든의 거대한 연극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폭주하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더 이상 현실과 연극을 구분할수 없게 되고, 케이든의 인생은 모사에 모사를 한 뒤 또 모사해 모사하고 모사하는 모사해도 끝나지 않는 양파 껍질같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연극은 현실 시간으로 17년씩(!!)이나 질질 끌게 되고, 그 와중에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퇴장(죽음)한다. 죽음에 대항하여 삶과 우주를 미니어처로 만들고, 그것들을 완벽하게 조율하고 싶어하는 케이든은 점점 파우스트를 닮아가며 이를 묘사하던 카우프만 역시 종종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거대한 카오스다. 좋던 싫던 찰리 카우프만은 엄청난 것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카우프만은 종종 길을 잃긴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카오스라도 형편없는 작가가 만드는 카오스와 자신이 뭘 써야하는지 아는 작가가 만드는 카오스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카우프만은 이 거대한 카오스에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상념과 관계에 서툰 현대인들의 심리를 관찰한다. 


연극을 올리기 전 케이든의 삶은 그야말로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소통은 계속 엇나가기만 한다. 케이든이 선택한 해결책은 미니어처 우주를 만들고 그 곳에서 신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였다. 하지만 결국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케이든의 행동들을 자세히 보면 이 사람에게는 어느정도 자기기만적인 성격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장한 딸에게 '너는 4살짜리라고!'라고 하는 장면이나 뉴욕으로 돌아온 아델을 정면으로 만나지 못하는 걸 보면 이 사람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타쿠적인 기질이 있다는걸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케이든의 탈출구는 그저 도피였다. 결국 그는 많은 것을 잃은 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채워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케이든이 이것을 깨닫는 후반부부터 영화는 익숙한 찰리 카우프만 식 멜랑콜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허망함과 짧은 순간이나마 서로의 마음이 일치한 순간의 도취감,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통찰 같은 점들이다. 특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빙빙 맴돌기만 하는 헤이즐과 케이든의 관계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애틋하다. 이런 점들은 영화의 관념성을 어느정도 중화시키는 동시에, 내용의 성숙함과 깊이을 부여하는 역할도 한다.

솔직히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만 이전작들처럼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작품이 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그러기엔 관념적인 성격이 10% 정도 넘치는데다 더욱 커진 카우프만의 에고는 솔직히 부담스럽다. 그러나 비록 많은 결함들을 안고 있지만 장점들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동안 관객들을 매혹시켜왔던 카우프만식 실존적 멜랑콜리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거대한 스케일에 고농축되어 담겨진 철학적 사유들은 현학적이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예리한 구석이 있다. [시네도키, 뉴욕]은 인간의 삶과 죽음, 있음, 희노애락과 관계에 대한 낭만적이지만 씁쓸한 회상이 뒤섞인 미로다. 

P.S.1 제목은 나스의 1집 [Illmatic] 수록곡에서 따왔다.
P.S.2 후반부 전개 보면서 들었던 현실적인 궁금증이 있다. '저 정도 되면 재단에서 제재 안하나?' 하긴 그랬다간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애니메이션을 강제로 초반에 완결시키기'가 그대로 실현됬을 것이다. (재단: 본 재단에서는 귀하의 프로젝트가 세계에 도움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중얼중얼 구라구라. 케이든: OTL) 아 그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