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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미학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영화 [시]는 정직한 제목을 가진 영화다. 이 영화는 정말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무나 간결한 제목과 달리, 영화가 전해주는 주제의 진폭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영화는 시를 통해 인간의 윤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경기도 소도시, 양미자 (윤정희)는 부산으로 간 딸을 대신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다. 그녀는 다소 소녀적인 감수성과 옷차림을 하고 있는, 조금은 독특하지만 평범한 할머니다. 어느날 동네 시 강좌를 듣게 된 그녀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병 진단과 손자가 강간한 소녀의 자살은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들어놓는다.
미자라는 캐릭터가 독특한 이유는, 그녀가 세속이나 타락하고 다소 거리가 먼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런 캐릭터가 잘 드러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피해자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일 것이다. 기범 아버지가 합의하라고 그녀를 보냈지만 정작 그녀는 피해자 어머니하고 날씨나 경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고 오고 만다. 적당히 세속적으로 타락한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세속적으로 타락하지 못한데다 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남들처럼 적당히 타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 그녀는 세상하고 괴리감과 단절감을 느낀다. 아무리 다그쳐도, 죽은 소녀의 사진을 보여줘도 손자는 오락실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게임을 하고, 가해자 아버지들은 (가해자 쪽에서 여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 미자 밖에 없다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소녀의 불행보다도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으며, 기범이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미자에게 돈을 달라고 성화다. 미자의 딸은 돈 버느라 종욱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속에서 미자는 고독감과 죽음 의 두려움 속에서 힘겹게 싸워나간다.
미자의 캐릭터는, 이창동 감독의 여성 캐릭터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확실히 그녀는 감독의 전작 [오아시스]나 [박하사탕]의 문소리처럼 순수하지만 흐릿한 이상형으로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자는 [밀양]의 신애처럼 행동의 주체가 되는 여성이다.
다만 영화 내내 가학적으로 시달리고 자기 기만에 빠져있는 (이유는 있었지만) 신애와 달리, 미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고통을 겪으며,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해결해간다. 이런 점에서 좀 더 공감가는 인물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는 이창동 감독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이 달라졌다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미자의 행동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점 (특히 중후반부 미자의 행동과 그 동기는 다소 모호하게 묘사된다. [님은 먼 곳에]의 순이만큼은 아니지만.)에선 이창동 감독이 완벽하게 미자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 쓰는 행위는 이런 괴리감과 캐릭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 강좌 마지막 시간에 시를 제출한 사람이 미자 혼자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 그녀만이 시를 써낼 수 있었던 걸까? 바로 수강생 중 그녀만이 도덕적인 날카로움과 예민한 미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동시에 자기 나름대로 타락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인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 해결책이 영화 내에서 흘러가면서, 미자의 시도 같이 낭송된다. 바로 죽은 희생자의 세례명에서 나온 ‘아녜스의 노래’다.
그동안 이창동은 영화적인 감수성이 다른 한국 영화 감독들에 비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비판을 종종 받아왔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보다 소설에 가까운 구조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의 결말은 그런 비판을 묵살시킬만한 ‘영화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미자라는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 실종되고, 무수한 이미지들의 파편과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로 이뤄진 이 영화의 결론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의 결말과 흡사하지만, 이창동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 한 발짝은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간결한 방점이다.
솔직히 이 영화는 [밀양]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멜로드라마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자의 고통은 신애보다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럽고, 영화의 내용과 연출 역시 미자의 고통보단,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크리스티안 바소가 음악을 담당했던 [밀양]과 달리, [시]에서는 음악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다소 독특한 억양과 순진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윤정희의 연기 역시 화려하기보단, 정갈하다.
이 차이는 후반부 정신적 고난에 맞닥트렸을때의 둘의 반응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밀양]의 신애는 그 위기 앞에서 울부짖고 폭력을 휘두르고, 섹스를 하고 끝내 자해한다. 하지만 [시]의 미자는 고통을 받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듯이 손자와 함께 일상을 보내고,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한다. 이런 차이는 곧 두 영화가 가지고 있는 태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는 그 흡인력을 대신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윤정희의 연기는 미자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으며, 그 뒤를 받쳐주는 연기자들 역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는 [밀양]보다 덜 고통스럽게 사유를 할 수 있게 숨을 틔운다. [시]는 이창동 감독의 또다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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