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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l y a longtemps que je t'aime / I've Loved You So Long] (2008)

giantroot2010. 1. 19. 21:26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감독 필립 클로델 (2008 / 프랑스, 독일)
출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엘자 질버스타인, 세주르 하자나비시우스, 로랑 그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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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마침내 색깔을 찾다

프랑스 자국 내에서는 인기 작가라지만, 필립 클로델는 영화 감독으로써는 낯선 이름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그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로 첫 감독 입봉을 했습니다. 한 분야에서 인정 받은 사람의 새로운 시도는 종종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두 자매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오래간만에 동생 레아를 만나 회포를 푼 주인공 줄리엣. 그녀는 곧 레아의 주변 사람들을 소개받고, 레아가 사는 소도시에 살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대하는 줄리엣의 방어적인 태도와 그녀를 둘러싼 레아 부부의 말다툼은 줄리엣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넌저시 암시하게 합니다. 사실 줄리엣은 살인죄로 15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5년 동안 그 날 무슨 일이 진짜 있었는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요.

이를 보듯 줄리엣은 누구이며, 15년 전 과연 그 참사에서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이 영화의 중요한 미스테리이며 진행 도구입니다. 영화는 줄리엣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던져나가며 천천히 과거의 수수께끼를 벗겨냅니다. 그 와중에 줄리엣의 미스테리함은 종종 은근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모든 것이 밝혀지는 마지막은 예상보다 강한 충격은 없습니다. 이 점은 장점일수도 단점일수도 있는데, 영화의 전반적인 구조와 디테일들을 보면 장점 쪽에 가깝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는 서스펜스의 쾌감보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이 어떻게 사회와 소통하고 아픔을 이겨나가는지를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초반부, 줄리엣은 '까칠합니다'. 심지어 사심없이 다가오는 입양된 사촌 양딸에게도 신경질을 낼 정도니깐요. 그리고 신경질을 내지 않는 대부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물론 이런 태도는 과거에 있었던 모종의 사건하고 연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회에 자리잡아가면서 그녀의 까칠함은 점점 둥글어지기 시작합니다. 클로델 감독은 이 와중에 줄리엣의 속마음과 감정을 슬금슬금 열어보이기 시작합니다. 진상이 밝혀지기 직전, 새로운 집을 둘려보며 동생을 향해 환하게 웃던 줄리엣의 모습은 더 이상 초중반부의 황량하고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던 줄리엣이 아닙니다. 비록 그 다음 줄리엣은 비극적인 사건이 있던 당시 고통스럽던 마음을 토해내지만, 레아의 따스한 손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정신적인 외상하고 이제 맞설수 있는 겁니다.

사실 클로델 감독의 연출은 유별나진 않습니다. 일상의 디테일과 심리를 중시하는 안정적이고 섬세한 연출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는 영상 언어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첫 작품을 완성해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고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연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토머스라는 배우입니다.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경력을 쌓은 이 독특한 여배우의 얼굴은 그야말로 미니멀한 대하 드라마입니다. 비록 [잉글리시 페이션트] 시절의 미모는 사라지고 주름살이 많이 늘었지만, 영국적이다라고 할만한 냉정함과 차분함, 그 사이에서 언뜻 드러나 보이는 복합적인 감정들은 이 영화의 드라마와 독특한 서스펜스하고 잘 부합합니다. 그야말로 배우의 이미지를 잘 활용했다고 할까요. 클로델 감독의 안목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비록 작품 자체가 소품인데다 인물들이 좀 순둥이-교양 있고, 예의 바르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중산층 지식인들-고, (영화 특징이 그렇다고 쳐도) 조금 결말에 힘이 약하긴 하지만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는 소설가 출신 감독의 좋은 데뷔작입니다. 크리스틴 스콧-토머스라는 좋은 배우를 인상적으로 썼다는 점도 플러스고요. 이 정도라면 감독으로써 필립 클로델의 앞날은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P.S. 적어도 저번 [시네도키, 뉴욕] 리뷰보다는 읽기 편하고 쉬운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