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영화 30

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

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때, 약간의 신랄함을 동반한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때 그 예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영화의 첫 샷은 문이다. 금방이라도 열릴것 같은 문은 예상과 달리 빨리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택배 기사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지만, 분장하고 나타난 토니 에드만은 생뚱맞다. 유머는 빗나가고, 리듬과 리액션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다. 빈프리트/토니 에드만은 사람들이 웃길 바라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그는 허겁지겁 유머를 접을수 밖에 없다. 차라리 이 영화의 도입부는 초라하게 몰락한 히어로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하고 닮아있다. 빈프리..

러빙 [Loving] (2016)

2013/05/10 - [Deeper Into Movie/리뷰] - 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1)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2017/01/13 - [Deeper Into Movie/리뷰] -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나 임신했어." 고요한 어둠 속 여자의 얼굴에 이 대사가 깔리면서 제프 니콜스의 [러빙]은 시작한다. [러빙]이 흥미로운 점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시작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전개 단계에 들어선다고 할까.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니콜스는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아..

로건 [Logan] (2017)

2015/02/08 - [Go To Fly/만화] - 울버린 [Wolverine] (1981)2015/07/20 - [Deeper Into Movie/리뷰]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이정표가 될 가지를 들고 그 발밑에 떨어뜨리자.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작은 둥지를 만드는 이 날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살아가자. -이시카와 치아키, 'Little Bird'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건]의 첫 샷은 차 안에 누워있는 로건의 얼굴을 하강하면서 보여준다. 이 샷은 밀폐 공간에 클로즈업으로 이뤄져 있기에 로건이 무언가에 짓눌듯한 인상을 준다. 가히 질식할듯한 이 미장센을 흔들어깨우는 건 외화면에서 깡패들이 때려부수는 소리다. 제임스 맨골드..

우리 손자 베스트 [Great Patrioteers] (2016)

[우리 손자 베스트]가 처음 공개되었을때,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호평 사이에 대다수의 거부감으로 나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사람들의 패악질을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빻은 한남"인 어버이연합과 일베 이용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는 흥행 실패였다. 하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가 정녕 그렇게 단순하게 내쳐야 하는 영화인가? 이 영화에 대한 비판들을 읽으면서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현실을 반영했다고, 자동적으로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 믿음은 루카치의 순진한 믿음이나 다름없기도 하니깐. 하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가 놀라운 점은 그동안 [잉투기]나 [불청..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2013/05/10 - [Deeper Into Movie/리뷰] - 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2)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제프 니콜스의 SF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미드나잇 스페셜]이 어떤 영화가 될지 조금 상상이 안 가긴 했다. 2007년 [샷건 스토리즈]에서 출발한 제프 니콜스는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카와세 나오미나 스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처럼 어떤 지역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스는 테렌스 맬릭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희귀한 사례를 제외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미국 중남부 서민-화이트 트래시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한다. (심..

램스 [Hrutar / Rams] (2015)

아이슬란드의 가수인 비요크는 2008년 한국 음악 잡지랑 내한 인터뷰를 하던 도중, “아이슬란드에는 신선함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곳의 풍경은 매우 삭막하고 솔직해요. 상당히 ‘구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복잡한 느낌은 없어요. 그래서 아이슬란드에는 아이러니가 별로 없죠.” 라고 말한 바 있다. 1년에 10편 정도의 영화가 나오고, 대부분의 영화계 종사자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아이슬란드 영화계가 간만에 배출한 [램스]는 그런 비요크의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설정은 단순하다. 40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내던 시골 양치기 형제가 양이 폐사될 위기에 처하자,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는 얘기다. 그리머 해커나르손의 연출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잔 기교 없는 샷과 구도, 몽타쥬, 가끔 등장하..

사울의 아들 [Saul fia / Son of Saul] (2015)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2015년 칸 영화제의 센세이션 중 하나였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중에서도 회색지대인 시체 처리반 ‘존더코만도’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을 재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했다는 평가와 도덕 판단이 부재한 듯한 시선과 더불어 역사의 비극을 영화 연출의 첨단으로 나가기 위해 착취한것 아니냐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렇다면 [사울의 아들]은 어떤 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영화가 현대 영화 중에서 어떤 전통에서 출발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영화는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논쟁에 휩싸였다. 무수한 영화들이 나왔지만 이 논쟁의 첨단에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알랭 레네의 [밤과..

아쿠아리우스 [Aquarius] (2016)

[아쿠아리우스]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것은 인물보다도 브라질 동남부 해안도시 헤시피의 옛날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다. 흑백으로 이뤄진 이 사진들이 배치된 이유는 명백하다: 클레베 멘돈사 필로에겐 어떤 인물보다도 헤시피라는 공간이 중요하다. 그는 헤시피라는 공간이 거쳐왔던 역사를 짧게라도 좋으니 관객들이 학습하길 바란다. 이런 욕망에는 매우 향토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필로의 고향은 바로 헤시피이며, 그의 전작 [네이버링 사운즈] 역시 헤시피가 배경인 영화다. 낡은 엽서 같은 사진들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음 시퀀스에서 곧 인물로 좁혀들어간다. 하지만 필로는 곧장 시놉시스를 보고 상상할법한 클라라의 현재로 들어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클라라의 과거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필로는 클라..

자객 섭은낭 [刺客 聶隱娘 / The Assassin] (2015)

고백하자면, 허우샤오셴의 차기작이 [자객 섭은낭]이 무협 영화라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꽤 당황했다. 내겐 허우샤오셴은 꽉 짜여진 한 샷의 미장센과 느린 리듬으로 흐름과 순간을 드러내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움직임’이 주인 무협 영화를 만들다고 했을 때 마이클 베이가 허우샤오셴 영화를 찍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당혹스러웠다. [자객 섭은낭]은 무협 영화를 좋아하는 부모님과 함께 본 영화다. 물론 부모님은 허우샤오셴 영화를 잘 몰랐고, 실제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금세 졸기 시작했다. 이 개인적 경험은, [자객 섭은낭]이 취하고 있는 방법론이 일반적인 무협 영화랑 차이가 있다는걸 잘 드러내고 있다. 샷 구도로 보자면 [자객 섭은낭]은 그의 전작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무협 영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