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러빙 [Loving] (2016)

giantroot2017. 3. 16.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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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 [Deeper Into Movie/리뷰] -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나 임신했어." 고요한 어둠 속 여자의 얼굴에 이 대사가 깔리면서 제프 니콜스의 [러빙]은 시작한다. [러빙]이 흥미로운 점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시작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전개 단계에 들어선다고 할까.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니콜스는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사랑에 빠졌을수도 있고, 동네 학교에서 친해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있고, 변치 않을 것이다.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가 가진 사랑의 견고함의 증거로 임신을 제시하면서, 관객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니콜스의 의도에 화답하듯이 다소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말이 나온다. "그거 잘 됐네." 도래한 사건과 사건에 대한 긍정, 조엘 에저튼과 루스 네가의 표정과 간단한 샷/리버스 샷, 짧은 대사를 통해 [러빙]은 시작하자마자 평범하지만 중요한 변곡점을 그려낸다. 그들은 어둠 속 고요에 있지만,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떤 평자들은 이 영화의 도입부가 니콜라스 스파크 소설이나 다름없다는걸 인정하자고 했는데 절반은 맞는 말이다. [러빙]은 일상의 통속성을 영화적이지 않다고 내치지 않고, 그걸 끌어안으면서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러빙]에서 식사 장면이라던가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장면들의 비중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러빙 부부를 불멸로 만들어 준 [라이프] 지의 사진을 찍는 그레이 빌렛이 러빙 가족을 방문하는 시퀀스는 일상의 통속성에서 아름다움을 꺼내고자 하는 니콜스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빌렛은 자신이 겪었던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아이들과 러빙 부부에게 들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잠깐의 틈을 빌어 특별한 순간을 잡아낸다.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순간을 잡아내는 이 시퀀스는, 오히려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통속성의 개념이 얼마나 게으른지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 경주 장면, 미장이 일을 하는 리처드의 일상, 밀드레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는 리처드의 장면이 지나가고 [러빙]은 두번째 변곡점에 들어선다. 공터에서, 리처드는 밀드레드를 데려다 놓고 여기다 당신, 나아가 우리들의 위한 집을 지을거라고 말한다. 이때 니콜스의 카메라는 버지니아 캐롤라인 카운티의 드넓은 땅을 보여준다. 땅에서 비롯된 잉태에 대해 그 잉태에 걸맞는 기둥과 벽돌을 쌓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니콜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이 존 포드에서 기원한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공동체에 물리적으로 정박"하는 샷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러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빙]의 도입부에는 의미심장한 샷이 있다. 자동차 경주를 즐겁게 관람하는 리처드와 밀드레드 부부를 바라보는 익명의 청년들을 담은 샷이다. 이들은 익명적 존재로 머물지만 그렇기에 이 샷은 어딘가 불길함을 안겨준다. 러빙 부부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백인 집단의 응시가 절대로 축복이나 인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러빙 부부가 그들의 관계를 공적으로 인정받으러 워싱턴 D.C.에 갔다온 뒤 일이 터지고 만다. 버지니아 주가 연방 정부는 인정해도 우리 주는 인정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관계를 훼방놓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러빙 부부는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금기시되었던 흑백 커플이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 비롯된 차별에서, [러빙]은 행복한 부부의 이야기에서 집으로 대표되는 행복이 이 땅 위에서 뿌리박기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화두로 넘어간다. 만약 당신이 [로건]을 거쳐 이 영화로 왔거나 그 반대라면 [러빙]을 [로건]에 등장하는 먼슨 부부의 프리퀄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두 영화에서 집은 언제나 파괴될 위기에 놓여있으며 어른인 부부는 힘겹게 그 집을 지키거나 돌아가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니콜스 역시 맨골드처럼 도회적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밀드레드가 버지니아 주 정부랑 싸우기로 결심한 계기가 지극히 도회적인 자동차와 콘크리트라는 위협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제프 니콜스가 이 실화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유는, 남부 백인 지식인으로써 부채 의식과 더불어 그만의 관심사를 풀어낼 기회라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항상 불안 위에 서 있으면서도 신뢰와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이전까지 불안의 근원이 모호하게 설정되었다면 (코스믹 호러였던 [테이크 셸터], 장르화된 메타포로 다뤄졌던 [머드]와 [미드나잇 스페셜]) [러빙]은 그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응시하고 그려내는 영화다. 

[러빙]에 땅에 정착하려는 부부를 거부하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이며, 나아가 익명의 시선에 숨어있는 차별이다. [러빙]이 현명한 부분은, 그런 일상을 엄습하는 차별을 형상화하는데 멜로드라마틱한 묘사를 배제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이 있다. [러빙]에서 이뤄지는 인종 차별은 마치 잡히지 않는 기체 또는 공기처럼 그려진다. 러빙 부부는 다른 인종차별 영화에 나오는 피해자들처럼 극단적인 폭력이나 수난은 당하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소송을 걸기로 마음 먹은 뒤, 인터뷰에서 '저희를 비난하는 분들도 많지만'이라고 언급하긴 하지만 [러빙]은 그 비난하는 얼굴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무표정한 익명의 사람들의 응시 샷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러빙 부부가 사랑을 나눌때에도, 평범한 일상을 그릴때에도 그 익명의 응시 샷들은 갑작스럽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러빙]에서 무표정한 응시 샷들은 [테이크 셸터]의 불길한 멸망의 징조 샷처럼 어떤 영화적 공기다.

이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러빙 부부의 일상에 침입하지 않지만, 분명히 위협적이다. 그것은 백인 청년들이나 카운티 경찰처럼 경멸을 담은 응시기도 하며, 임신한 밀드레드의 배를 바라보는 흑인 점원처럼 '앞날이 걱정된다'라는 식의 체념의 응시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진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버지니아 주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을 통해 악의적으로 실체화된다. [러빙]이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다면 작위적이지만 무서운 폭력 앞에 단단한 개인들이 힘없이 수그리는 순간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빙 부부가 버지니아 주 법정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추방 명령을 언도받을때 니콜스는 흰색으로 이뤄진 빛과 색감을 강조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백인 중심주의/차별이 그때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공기'였던지, 그 공기로써 악의가 쉽게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니콜스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이 사건이 아닌 어떤 공기에 짓눌려 나타는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러빙]은 그 기체처럼 그려지는 차별을 그리면서, 거기에도 상대적인 격차가 있다는 점도 명시한다. 이 격차는 백인인 리처드와 흑인인 밀드레드가 겪는 수난의 강도에서 먼저 제시된다. 니콜스는 같이 차별받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떤 액션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지 대조하면서 격차를 제시한다. 리처드는 얼마 안 있어 환한 바깥에 서게 되지만, 밀드레드는 감옥 구석에 웅크려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해방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니콜스는 그 상대적인 격차 속에서 백인이 겪어야 하는건, 일종의 훈육이라고 말한다. 직후 경관이 리처드를 불러놓고 "너같은 무지렁이는 모르겠지. 울새는 울새끼리, 종달새는 종달새끼리 살아야 한다는 건."라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때 그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법칙을 모르며 까부는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어른의 모습이다. 이 훈육의 제스쳐야말로, 니콜스가 생각하는 차별의 작동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며 사회가 제공하는 기초 교육만 받았던게 분명한 리처드와 밀드레드는 차별 구조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견식은 가지지 않았다. 러빙 부부는 차별에 본능적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걸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소수자 커뮤니티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밀드레드랑 달리, 리처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리처드는 그 커뮤니티가 겪는 차별의 부차적인 존재에 가깝다. 설정상 리처드는 밀드레드와 같은 흑인들과 같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흑인 밑에서 일을 하면서 한번도 그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아버지는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리처드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물러받았을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렇게 리처드가 믿었던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 상술한 기체로써 위협의 샷들이 리처드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에서 리처드의 불안이 드러나는 시퀀스가 몇 군데 있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랑 같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퀀스를 보자. 이 시퀀스를 찍으면서 니콜스는 [러빙]보다 먼저 찍은 [미드나잇 스페셜]을 의식했던게 분명하다. 한밤중 도로라는 시공간 설정과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우의 연기, 자동차라는 수단이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장면엔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언제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로이 일행의 불안함이 그대로 옮겨와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엘 에저튼도 그대로 옮겨왔다.) 두번째는 소송 때문에 대중에 노출된 이후로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다가 해코지한다고 쫓아온다고 착각한 채 미친듯이 돌아오는 리처드의 귀갓길이다. 니콜스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긴장감이 [테이크 쉘터]와 [머드],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알 수 있다. 기체/공기로써 불안감이 남성 주체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남성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질 공포에 휩싸인다. 제프 니콜스는 그 명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러빙]은 그럼에도 리처드가 차별에 싸우기로 마음먹은 밀드레드처럼 위대해질수 있었던 이유를, 기체/공기로써 내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감수하면서도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처드의 흑인 친구가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리처드가 밀드레드랑 헤어졌다면 리처드는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리처드는 그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는 돌아와서 밀드레드에게 "나는 당신을 지켜줄수 있어."라고 말한다. 헤어진다는게 쉬운 답이라는걸 알면서도, 그 구조를 전문적으로 분석할 두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포기하지 못한다. 그저 가장 단순한 말과 행위을 되뇌이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며 밀드레드와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그 장면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와 접촉을 각인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를 방해하는 기체로써 차별을 명징하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반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부를 도와주는 변호사 필 허시콥의 첫 등장 샷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발과 다리라는 점은 흥미롭다. 물리적으로 걷는 샷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변호사가 (버지니아 주 변호사와 달리) 러빙 부부와 같이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과 버니 코헨은 성공하고 싶다는 야심이 넘치지만, 분명한 선의로 갑갑했던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레이처럼 러빙 부부에게 없었던 객관적으로 문제을 분석할줄 아는 지성으로 부부와 함께 그걸 넘어설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하지만 [러빙]은 그들에게 과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최종 변론을 펼치는 감동의 순간. 니콜스는 러빙 부부를 법정에 참석시키지 않고, 변호사에게도 두 샷 정도만 할애한다. 그리고 교차 편집으로 두 샷을 평온한 러빙 부부의 일상 위에 사운드 몽타주로 겹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 접촉의 아름다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행위의 숭고함. 법정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 수 있었으면서도 니콜스는 단호히 일상으로 향한다. 프랭크 카프라와 존 포드를 위시한 미국 영화의 대가들이 그렇게 믿었던 가치관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 단순한 사랑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공기에 저항하고 같이 걷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러빙]은 법정 영화로써 안티 클라이맥스적 모양새임에도 강력한 울림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응시다. 마지막으로 대법관들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변호사 듀오에게 리처드는 잠깐 먼 곳을 응시한다. 대체 그는 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다음 대답과 눈빛이 모든 걸 대답하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리처드의 응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땅의 리듬과 단순한 방식을 믿으며 기체로써 불안과 차별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마침내 집을 짓는데서 마무리 짓는다. 비록 마지막은 짧았지만 그저 사랑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쑥스러워하고 침묵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은 영원한 무언가가 된다.

그 점에서 버지니아 주 정부가 후레자식을 만든 죄를 범했다고 러빙 부부를 비난하는 순간 패배는 정해졌다. 그들의 성명은 지금까지 쌓여온 땅의 리듬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 나아가 영화를 이루는 샷과 몽타쥬의 연쇄와 리듬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니콜스에게 땅의 리듬은 영화적 리듬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이 언급은 의도적이다. 이미 니콜스는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그런 울타리 없는 땅 위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이어오며 대부분의 관객들이 소망하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샷과 몽타주의 연쇄로 쌓아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러빙]을 통해 지금 이 시대, 나아가 미래 세대를 위해 믿음을 가져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