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아쿠아리우스 [Aquarius] (2016)

giantroot2016. 12. 27. 00:14


[아쿠아리우스]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것은 인물보다도 브라질 동남부 해안도시 헤시피의 옛날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다. 흑백으로 이뤄진 이 사진들이 배치된 이유는 명백하다: 클레베 멘돈사 필로에겐 어떤 인물보다도 헤시피라는 공간이 중요하다. 그는 헤시피라는 공간이 거쳐왔던 역사를 짧게라도 좋으니 관객들이 학습하길 바란다. 이런 욕망에는 매우 향토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필로의 고향은 바로 헤시피이며, 그의 전작 [네이버링 사운즈] 역시 헤시피가 배경인 영화다.

낡은 엽서 같은 사진들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음 시퀀스에서 곧 인물로 좁혀들어간다. 하지만 필로는 곧장 시놉시스를 보고 상상할법한 클라라의 현재로 들어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클라라의 과거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필로는 클라라와 친족들이 모여서 이모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장면을 통해, 아쿠아리우스가 아직 허물어질 필요가 없었던 그 시절의 순간을 각인시키려고 한다. 이 시퀀스가 가져다주는 행복함은 뒤에 이어질 치열한 암투와 과부로 살아가는 클라라의 현재와 대비되기도 하다.
 
이때 필로는 꽤나 인상적인 몽타쥬를 보여준다. 젊은 클라라가 아파트 안에 놓여진 장롱을 슬쩍 시선을 던지자, 장롱 샷이 등장하고 직후 짧은 플래시백 형식으로 클라라가 남편과 함께 장롱 위에서 섹스를 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어떤 물체가 개인의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필로는 알랭 레네 같은 현대 영화의 유산을 의식하고 있다. 너무나도 거침없이 이어지는 몽타쥬 연결이라던가 높은 노출 수위를 통해 관객은 클라라라는 인물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들어서게 된다. [아쿠아리우스]는 이 시퀀스를 통해 명백히 클라라의 개인적인 영역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오프닝이 끝나고 '클라라의 머리카락' 장으로 넘어오면 (이 영화는 여러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본격적으로 전개에 들어간다. 이 파트를 시작하는 시퀀스에서 필로가 사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탁월하다. 필로는 아쿠아리우스 주차장에서 철거 담당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동안 잠자고 있는 클라라의 모습을 부감 트래킹 샷으로 보여준다. 약간 과시적인 기색이 있긴 하지만 필로는 집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공간의 대조를 통해 클라라의 삶이 어떤식으로 흔들릴지 설명한다. 바깥과 벽, 그리고 사적인 공간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제 아쿠아리우스는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철거되어야 할 옛 건물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클라라는 떠나지 않는다. 디에고가 주장하는 바로는 개발업자는 못마땅해하지만 클라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둘 간의 긴장감이 감돌면서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협박이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이 과정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로는 클라라의 일상을 느긋하게 풀어내면서 아쿠아리우스 철거를 다루고 있다. 클라라는 할 말이 많은 재미있는 캐릭터고, 그걸 다루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겠다: 클라라는 왜 아쿠아리우스를 떠나지 않는가? 표면적으로 클라라는 아쿠아리우스를 굳이 버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도 필로가 보여주는 아쿠아리우스라는 공간은 낡긴 했어도 디에고가 주장하는것처럼 당장 철거해야 할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클라라가 디에고에게 저항하는 이유는 훨씬 복잡하다. 영화 초반부에 분명한 단서가 던져진다. 지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클라라는 자신이 구입한 중고 존 레논의 LP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자신이 LP나 책에 매료되는지 설명한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는 현대 영화가 발명해낸 '시공간의 역사성/정치성'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이토 케이카쿠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데드 미디어'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매체의 정치성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데드 미디어는 음반이나 책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유방암으로 도려내야만 했던 클라라의 유방과 아쿠아리우스라는 건물로 이어지고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소멸하기 마련인, 눈에 보이는 물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영화에 이끌어들이고 있다. 클라라가 돈을 훔치고 잠적한 가정부의 환영과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걸 동시에 보는 환상 장면은 [아쿠아리우스]가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데 [아쿠아리우스]는 SF 장르에서 볼 수 있었던 문제의식을 현대극에 이식하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아쿠아리우스]는 데드 미디어를 고리타분하게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라라는 스마트폰이나 MP3 같은 새 문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들 역시 클라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어 있다. 클라라가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간이 낳은 흔적을 무시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아쿠아리우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시퀀스는 정치적인 저항과 데드 미디어의 가치가 만나는 부분이다. 윗집에서 클라라를 쫓아내기 위해 난교파티를 벌이는걸 목격하고 돌아온 클라라는 친구가 알려준 남창 파울로를 불러낸다. 격렬한 섹스를 나누던 도중 파올로가 클라라의 도려낸 유방을 눈치채고 당황해하자 클라라는 아무렇지 않게 파울로의 손을 도려낸 가슴에 올려놓는다. 1980년대 섹스 심벌로 유명했던 소니아 브라가의 스타 아우라와 캐릭터의 당당함이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클라라, 나아가 필로가 저항하는 건 새로운 문물이 아니라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경제적인 이득을 빌미로 강제로 제거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억압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디에고로 대표되는 재개발업자들이 클라라의 일상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방식은 심증만 있지 명쾌한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클라라가 부끄럽다고 비난하고 사라지는 옛날 이웃집 주인의 아들, 난장판을 벌이다 갑자기 사라진 난봉꾼들, 수상한 흔적을 봤다고 클라라에게 귀뜸하는 안전요원의 증언, 갑자기 나타나 아쿠아리우스를 제멋대로 리모델링하는 인부들...

이처럼 [아쿠아리우스]가 개인을 향한 탄압을 영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어딘가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다. 물론 관객들은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단들이 디에고가 사주한거라는 의심 (혹은 확신)을 가지지만, 디에고는 그런 확신을 교묘하게 회피하고 딱히 묘안이 없는 클라라는 골머리를 썩인다. [아쿠아리우스]가 심오한 주제의식과 달리 의외로 흥미진진한 영화인 이유도 이런 인과관계의 은폐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에 있다. 즉 '가시적'인 데드 미디어를 파괴하려는 정치적인 탄압은 '비가시적'으로 전개되는데, 이 대조를 통해 필로는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정치적인 메시지를 구축한다.

당연하겠지만 [아쿠아리우스]의 역사성/정치성은 브라질 현실에 기반해있다. 우리는 [아쿠아리우스]를 보면서 헤시피의 역사,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빈부격차, 인종과 경제 문제를 알 수 있다. 클라라는 자신의 조카들을 데리고 자신의 가정부인 라제네가 사는 빈민가로 데려가면서 헤시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고, 백인 재개발 업자를 만나 당신네 가족들 (클라라 가족은 메스티소쪽으로 그려진다.)이 부자가 된건 얼마 안 되었으니 처신 잘하라는 협박을 듣기도 한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 관객들은 [아쿠아리우스]가 드러내는 지역적 특색에 대해 마음 깊숙히 공감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쿠아리우스]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동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박물학적인 매체"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쿠아리우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강렬한 반격이다. 내부자의 고발을 들은 클라라는 사람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클라라네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흰개미 둥지다. (흰개미가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곤충이라는건 다들 알 것이다.) 클라라는 이 흰개미 둥지를 떼내 디에고의 회사를 방문한다. 아니라고 계속 발뺌하는 디에고에게 클라라는 화가 나서 이걸 보라며 들고 온 흰개미 둥지를 책상에 던진다. 필로는 이 흰개미 둥지를 접사한 샷으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분명 이 결말은 브라질 현실에 대한 필로의 직설적인 일갈이며, 영화 내내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던 디에고 일당의 진상짓에 짜증을 내던 관객들에겐 '사이다'같은 결말이다. 데드 미디어가 비가시적인 억압을 박살내는 장면이라는 점에서도 논리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결말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 결말은 그 뒤 분명히 이어질 클라라와 디에고가 법정에서 이어질 진흙탕 싸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클라라의 승리만을 암시할 뿐이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너무 쉽고 단순하게 이뤄져 있다. 필로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필로가 만들 또 다른 영화의 시작 샷이기도 하다. 마치 박근혜 탄핵안 가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