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33

TAR 타르 [Tár] (2022)

토드 필드의 『TAR 타르』는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몰락 비극 서사를 다루는 영화다. 인물이 내적 결함으로 몰락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이지만 그 몰락의 과정이 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 지휘자 리디아 타르의 몰락기는 온갖 문학적 상징성과 알리바이로 가득하다. 리디아 타르는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남성의 영역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또는 정체성 정치의 성공 사례로 내세울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자로서 타르는 현실의 남성 권력자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비서를 하대하며, 학생들을 조롱하면서도 성적으로 유혹하려는 타르의 모습은 분명 미투 가해자로 언급할 수 있는 해로운 권력자다. 토드 필드는 음영을 명백히 ..

프라운랜드 [Frownland] (2007)

《아빠의 천국》 이후 로버트 브론스타인의 《프라운랜드》를 찾아서 보는 사람은 대체로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통해 거슬러 올라온 사람일 것이다. 《아빠의 천국》 이후 편집과 각본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싶어서 말이다. 사실 《프라운랜드》는 개봉 당시엔, 몇몇 영화제와 뉴욕 아트하우스 영화관을 돌다가 사라진 흔한 동네 독립 영화에 가까웠다. 심지어 "근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최우수 영화상"라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요상한 명칭을 단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흔하다를, 오독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 주목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물을 보면 오히려 아슬아슬하고 뉴욕 독립 영화계에서도 비타협적인 비주류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데뷔작으로 내놓을 생각을 ..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3/01 - [Deeper Into Movie/리뷰] - 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Night and Fog] (1956)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알랭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Le lion est mort ce soir / The Lion Sleeps Tonight]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배우는 테라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때 카메라는 늙은 배우의 얼굴로 다가간다. 스와 노부히로는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인 기만을 부린다.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된다면, 시퀀스 배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위화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이 장면은 극중극이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다음 시퀀스인 분장실로 넘어간다. 촬영을 종료하고 장은 스태프에게 말한다. 옛날 독립 영화는 원 신 원 컷으로 찍었고 다음이 없었다고. 스와는 여기에 동조하듯이 도입부를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시간 이미지가 타임코드의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서 스와..

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