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giantroot2020. 6. 23. 01:44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사랑의 행로>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사랑의 행로>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빅 트러블>을 만들었다. 그러나 <빅 트러블>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빅 트러블>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사랑의 행로>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사랑의 행로>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사랑의 행로>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희곡을 보거나 읽지 않았으니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는 카사베츠 특유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적 작업 스타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 있다. <사랑의 행로>를 만들면서 존 카사베츠는 공연 당시 배우 (존 보이트)를 기용하지 않고, 직접 주인공 로버트 하몬 역을 맡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상대역인 여동생 사라 하몬 역을 맡겼다. 그리고 <얼굴들>을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배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버트의 집은 <얼굴들>에도 등장했던 실제 카사베츠 부부의 집이다. <얼굴들>을 보고 <사랑의 행로>를 본다면 데자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두 영화의 후반부는 기절한 여성과 그를 깨우려는 남성의 액션으로 이뤄져 있어서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종종 영화에서 하몬 남매에게서 근친상간적인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실제 부부였으며 연기 파트너이기도 했던 카사베츠와 롤랜즈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적다곤 하지만, 그래도 테드 앨런의 희곡이 '더티 리얼리즘'과 친연성이 있는 카사베츠의 개성과 충돌하는 부류는 아니었을꺼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하몬 남매는 매우 카사베츠스럽게 엉망진창에 기벽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의 시궁창스러움은 올라갔다. <사랑의 행로>는 카사베츠가 천착했던 가정의 붕괴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물론 <얼굴들>이나 <영향 아래의 여자>도 가족이 흔들리는 모습을 담았지만, <사랑의 행로>의 하몬 남매는 처음부터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고 욕망으로만 구성된 낙원에 만족하거나 (로버트), 가족에게 쫓겨난 상태다. (사라) 카사베츠는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정상 가족을 가지지 못하거나 추방된 두 주인공이, 정상 가족에 집착하거나 복원에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로버트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 앞에서 정상 가족의 '가부장'으로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에로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결국 로버트는 호텔 방에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 '가부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다른 폭력적인 '가부장'과의 난투극으로 파국을 마무리 짓는다. 한편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의 코스모가 그랬듯이 로버트는 흑인 어머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 관심을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요컨대 로버트는 과잉된 에로스로 사랑을 대체하거나, 사랑하는 법을 흉내내다가 실패하는 캐릭터다. 반대로 사라는 한창 전에 끝나버린 정상 가족을 끊임없이 맴돈다. 사라가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이혼 법정이다. 이혼 법정에서 사라는 자신을 딸의 친권을 가지려고 하지만, 딸은 자신을 거부한다. 심사가 끝나고 사라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의 흐름은 이혼 소송으로 끊어졌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힘겹게 짐을 끌며 나아가서 몸을 흔들어대는 사라의 모습은 술에 취해 애인의 집 앞에서 뒹구는 로버트랑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다만 로버트랑 달리 사라는 과거 충만했던 사랑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자 할 뿐이다. 그 점에서 사라는 <영향 아래의 여자>의 머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광기와 불안증상에 빠진 인물이다. 머틀은 고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채 몸만 커버린 아이였지만, 사라는 실패한 과거의 잔해에 매달리는 어른이다. 초기 시절 얼굴들을 잡아대던 거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줄어들었지만, 패닝과 줌인으로 격정적으로 변하는 인물의 표정을 포착하는 후기 카사베츠의 카메라도 이런 불안함을 잡아내고 있다.

<사랑의 행로>가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남매가 만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둘의 시공간을 분리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이미 <별난 인연> 도입부에서 미니와 시모어 두 인물의 시공간을 독립적으로 놓고 진행한 적이 있다. <별난 인연>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독립적인 두 인물이 하나의 공간으로 모이면서, 히스테릭한 흐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사랑의 행로>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흐름을 지닌 인물이 만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이 폭풍우라는 건, 카사베츠가 <사랑의 행로>에서 관찰하고자 하는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인 건 당연하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로버트와 사라가 영화 내내 어떤 행동을 할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사랑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마구 사들이거나, 외출을 해 다른 이성과 동침을 하거나, 가족에게 매달린다. 다만 <사랑의 행로>는 이런 히스테리를 표출하기 위해 이전 존 카사베츠 영화보다 적극적으로 환상과 무대에서의 연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끼어드는 사라의 폭력성과 불편함을 드러내는 환상 시퀀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나 <오프닝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후반부 뮤지컬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가 사실상 카사베츠가 자기 방식대로 만든 마지막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미완으로 남은 발전 아니었을까하는 의문도 있다.

<사랑의 행로>의 후반부와 결말은 일종의 부활과 각성에 가깝다. 끊임없이 이혼한 남편과 딸에게 대화를 시도하던 사라는 갑자기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고, 로버트는 안절부절하면서 사라를 깨우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로버트는 폭풍우 속으로 사라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동물들을 불러모으고 마침내 깨어난 사라는 이혼한 남편과 딸을 찾아가 다시 재결합을 시도해보겠다고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당장 떠날 준비를 하는 사라를 말리던 로버트는, 거실에 앉아있다가 앞에 앉아있던 개가 벌거벗은 남자로 교차되는 환상 숏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환상 시퀀스의 주체가 사라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로버트의 시점으로 제시된 이 환상은 이례적이고 뜬금없다. 다만 이 개가 사라가 막무가내로 데려온 반려 동물이라는 점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버트가 본 개 (실체)와 벌거벗은 남자 (환상)은, 사라가 떠날 자리를 대신 채워질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환영 숏은 사라가 꾸는 환영 시퀀스와 달리 묘하게 포근한 익살이 담겨 있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행로>는 사건의 결말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직전에서 멈춰서서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때 로버트는 폭풍우 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 사라를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그저 집 창문으로 지켜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구성된 결말 시퀀스의 인물 배치와 시선은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다.사라는 기나긴 앓음과 붕괴 끝에 재건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로버트는 어설프고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라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사라는 다가올 고난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로버트는 그걸 지켜본다. 당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었던 카사베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자신 없이 거친 세상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카사베츠가 생각하는 '사랑의 흐름'이란 거칠고 충동적이며 많은 충돌을 일으키지만 결국 얽히면서 위무 받을수 밖에 없는 강렬한 에너지다. <사랑의 행로>은 그 점에서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사랑받고 싶어했던 카사베츠의 캐릭터들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