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33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1949)

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되지 않았던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

굿타임 [Good Time] (2017)

(누설이 있습니다.) [굿타임]의 시작은 뉴욕 상공이다. 사프디 형제는 그 상공에서 한 건물로 쭉 확대해 들어가다가 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바꿔치기 한다. 이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제시되자마자 마스터 샷 없이 한 인물의 내밀한 표정이 곧바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정상이 아니다. 닉이라 불리는 인물과 상담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된 샷-리버스 샷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고 계속 빗나간다. 부조리극 같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굿타임]을 보는건 그리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굿타임]은 이 장면 이후로도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클로즈 업의 미로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기 떄문이다. 이 불편한 대화 시퀀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 코니에게 ..

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

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2017/04/02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2017/09/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멀리서 마차가 다가온다. 제목 타이틀이 뜬 뒤 마차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숲 속으로 들어온다. 두 남녀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샷에서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부드러움이 무슨 소용이죠?”라는 질문을 한 여자는 곧 모욕을 들으며 옷이 벗겨지고 남자는 여자를 벌하라고 마부..

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

유랑극단 [Ο Θίασος / The Travelling Players] (1975)

2006/05/11 - [Deeper Into Movie/리뷰] - 영원과 하루 한 사람이 등장해 [양 치는 처녀 골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선언한다. 다음 샷.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에 도착한다. 카메라는 그들이 역 앞에 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멈춰 섰을때 카메라는 그들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 프레임이 친숙하다고 생각하다면, 정확하게 봤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이 등장인물들을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다룬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뜬다. 1952년. "고참들이 있었고 젊은 배우가 있는" 이 유랑 극단은 옛날에 들렀던 마을 에이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유랑극단이 건물로 들어가고 난 뒤, 갑자기 유세 방송을 바꿔버린다. 파파고스 (로 위장한 그리스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2014/09/21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2014/11/24 - [Deeper Into Movie/리뷰]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영화 속 이니스프리를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풍경을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

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

투 러버스 앤 베어 [Two Lovers and a Bear] (2016)

킴 누옌의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도입부는 광활한 설원이다. 두 남녀가 제트스키를 타면서 나아가는 장면에서 설원이 가져다 주는 원초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그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얼음을 뚫어 낚시를 한다. 아 이 도입부는, [투 러버스 앤 베어]의 감수성이 얼음에 기반해 있으며 내용과 구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암시하고 있다. '부모의 구속력은 지대하다'는 대사는 그들이 부모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단단한 얼음을 뚫는 행위는 영화 내내 이어질 두 사람의 사투를 예감케 한다.그걸 증명하듯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는 하강 곡선을 그리는 영화다. 킴 누옌은 벡터의 충돌을 통해 전제를 세운다. 주인공 로만은 남쪽에서 북쪽 알래스카로 도주해왔다. 로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