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giantroot2018. 11. 25. 03:13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