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신성한 나무의 씨앗 [دانه‌ی انجیر معابد / The Seed of the Sacred Fig] (2024)

giantroot2025. 7. 20. 03:17

모하마드 라술로프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고 팝콘을 사 들고 갈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긴 러닝타임, 감독이 (자파르 파나히 근작들처럼) 몰래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고국을 떠야 했다는 사실, 주연인 여자 배우 소가 히잡을 벗고 정부를 비판하는 비디오를 찍었다가 감옥을 갔다 왔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2022년 이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루고 있는 정치 영화라는 점을 알면 경건하고 숙연하게 자리에 앉아서 화면을 응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후반부는 그 점에서 당혹스러운 방향으로 급선회한다. 화면 위에 흘러가는 상황은 카체이스와 추격, 총격이고 샷들의 장력은 장르 영화적 긴장을 부추긴다. 등장인물들이 맥락적으로 매우 정치적이라는 걸 제외하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팝콘을 먹으면서 보는 스릴러나 호러 영화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대체 초반부와 후반부 사이엔 어떤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라술로프는 자신이 탄압받던 시절, 공권력의 감시자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라는 상상에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말처럼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탄압자와 그 가족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의 상상으로 영화의 전제를 구축해나간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상당히 긴 영화이며 적어도 초반부까지는 균열이 일어날 거라는 흔적은 미묘하게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가부장의 진급을 알리는 사무실, 이 소식을 듣고 밤의 모스크에 가 기도하는 가부장, 좀 더 나은 삶 꿈꾸는 아내, 식사 도중 아버지의 진급을 알게 되는 딸들, 가족의 집에 찾아온 딸의 대학 친구[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도입부의 불길하고 직접적인 인용을 무시하듯 이란 중산층에게 일어날법한 산문적인 세계의 샷과 시퀀스들로 영화를 구축한다. 여기에는 피나 살점이나, 총알로 대표되는 장르도 없다. 곧장 말해 초반부 이만의 가족은 장르의 위협에서 안전하며 물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라술로프는 이 산문성의 세계에 긴장과 편집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하나씩 끌어들인다. 우선 아버지 이만은 수사 판사로 진급하며, 폭압적인 이란 정권에 부역하는 자가 된다. 심지어 그 진급은 매우 내부 정치적인 판단하에 이뤄진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부인 나즈메 뿐이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랬듯이 모하마드 라술로프는 평범하고 지루한 중산층 가족 영화에 정치와 파시즘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기를 건다. 오직 남편에게 헌신하는 나즈메와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딸들 레즈반과 사나가 있기에, 이란 중산층의 평화와 물적 토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루돌프 회스 가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거짓된 평화와 고의적 무지를 표면적인 서사 끝까지 이어가면서 (즉 장르를 도입하지 않으면서), 음향으로 공간과 감각을 은밀하게 파시즘의 피해를 확장하다가 마지막 미래와의 몽타주로 위선적인 평화에 금을 냈다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표면에서부터 장르를 도입해 충격을 가하고 정치성의 긴장, 공포, 분노를 물들이려고 한다. 갈등의 씨앗은 계급적 정체성 (체제에 부역하는 중산층)과 젠더적 정체성 (여성)이 부딪히면서 파종된다. 이만은 2022년 시위 참가자들을 구속하고, 반대로 딸들은 시위에 참여한 친구가 끔찍하게 다치면서 반발심과 의구심을 품는다. 아내이자 어머니인 나즈메는 그 사이에서 중재로 평화를 찾으려고 하지만 중재는 이뤄지지 않는다.

 

한 정치적인 사건을 둔 두 감정과 상황, 입장의 대치와 대조, 갈등. 억지로 중재된 평화의 무기력함과 비굴함. 여기까지는 평론가나 관객들도 쉬이 따라올 수 있는 정치 영화의 의제에 충실하다. 오히려 기이하고 주목할 점은 라술로프가 이 단계에서부터 이 의제에 만족하지 않고 앨프리드 히치콕의 자장 하에 편집증의 방법론을 들고 와 21세기 스마트폰 문화와 혼종해 장르와 정치를 같이 위치시키고 물들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감정과 상황이다. 라술로프는 긴장감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감정과 상황이 평범한 일상에서도 존재하며 언제든지 장르 영화로 전복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정치적인 맥락과 함께 배치하면서 정치적인 공기와 장르의 공기를 혼합하려고 한다.

 

이때 이 혼합하기 위해 쓰인 매개체는 다름 아닌 스마트폰과 폰에 담긴 실제 상황 영상들이다. 시위가 시작되면서 영화의 샷은 배우들이 연기한 허구의 샷과 인터넷과 SNS에서 채집한 실제/다큐멘터리의 샷이 혼재되어간다. 친절하게도 라술로프는 허구 캐릭터의 시선에 즉각적인 다큐멘터리의 샷을 다음 배치하는 몽타주로, 인물들이 역사의 한순간에 시선의 주체로 있다는 걸 주지시킨다. 즉 후자의 샷이 전자의 샷과 결합해 전자가 정치적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구축하고 있다. 이때 후자의 샷은 전자의 샷에 속한 허구의 인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나아가 장르로 전이되어야만 하는 강력한 논거가 된다.

 

라술로프가 이때 버리는 것은 바로 토론과 대화, 나아가 소통이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중산층 실내극의 형식과 소통을 버리고 장르로 변이하려는 정치적인 괴물의 영화다. 한쪽이 점점 소통 불능 상태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동시에 배치하며 들림과 들리지 않음의 정치성을 구축해간다. 이때 라술로프가 몰입하는 것은 뉴 미디어와 SNS의 기동성과 즉시성이다. TV 뉴스의 거짓말을 앞에 두고 메신저로 TV가 거짓 선동한다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두 딸의 모습은, TV의 일방향성이 뉴 미디어와 스마트폰을 통제하지 못하기에 가능한 시퀀스다. 라술로프는 이런 대안적인 네트워크에서 흐를법한 가짜 뉴스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렇기엔 이미 레거시 미디어의 거짓말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선량한(척하는) 기득권은 이미 악의 일부로 발아할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이성은 이미 내재한 결함의 논리에 잠식되어간다. 라술로프는 이때 중산층 가족 영화를 지탱할 평화와 이성은 지극히 사회정치적이고 주관적인 맥락에 뿌리박혀 있는 것에 불과하며 이란 사회에서 그 맥락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기에 장르의 광기로 폭주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장르 영화로 보자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편집증 스릴러이자 호러다. 하지만 이 장르를 쌓는 방식은 지극히 단순한 의문과 상황으로 이뤄져 있다. “총이 어디로 갔을까?” “누가 숨겼을까?” “총이 사라지면 큰일 난다.” 라술로프가 장르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단순하다. 총 분실 시 3년 징역형 같은 몇몇 지역적인 정치 맥락이 편집증의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상황 자체는 어느 나라를 배경을 적용해도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 점에서 라술로프가 장르를 혁신적으로 변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영화 장르는 오히려 이전까지 이어져 왔던 비장르적이었던 정치적인 긴장과 갈등을 구체화하는 기능적인 용도로 쓰일 뿐이다. 그렇기에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장르화되는 후반부로 갈수록 기묘하게도 무국적 성향이 짙어진다. 카 체이스와 괴물 가부장이 등장하는 후반부가 모든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차는 어느 나라에서나 몰 수 있으며, 가부장의 괴물화는 호러 장르의 유구한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라술로프가 결말에 끌고 온 도상들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상하게도 [신성한 나무의 씨앗] 결말은 서부극적이다. 황무지에 총을 들고 대치하는 두 남녀. 이때 끼어드는 영화는 다름 아닌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정의와 법, ‘여성 정의 삶을 실현하려면 폭군이자 악한을 쏴야 하는 상황. 이때 총을 쏘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다. 다만 여성을 배제한 채 남성들이 대치하면서 아이러니를 사후 시점에서 애상적으로 바라봤던 포드랑 달리 라술로프는 조커 역할에 가장 어린 여성을 두고 아이러니를 배제하고 현재에서 끝내면서 직설적인 페미니즘적인 의제를 구현하고 있다. 그 점에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결말은 켈리 라이카트의 [믹의 지름길]처럼 서부극 내 총의 가능성을 여성의 손에 쥐여주고 변용하는 페미니즘 서부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쏠 수 있음의 권력이 영어로 진행되는 유튜브 총기 조립 영상으로 평형을 맞췄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총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영어권 나라를 생각하라면 대다수는 미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실 영화의 혁명성에 큰 역할을 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것 자체도 이란 고유의 문물이 아니라 미국의 발명품에서 이식된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가능한 가부장 편집증 스릴러의 폭압적 권력관계가 갑작스럽게 공동체의 존속과 선악의 문제를 판단하는, 지극히 미국적인 서부극의 가치로 다시 급전환했을 때 특정한 문명의 요소들이 개입한다면 새로운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라술로프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정치적 미학이 결국 자생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래에서 이식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일까? 혹은 꼬불꼬불한 동굴 같은 이란의 미궁 같은 전통 가옥촌의 풍경을 미국적인 풍경과 상황으로 바꿔야지 시적 정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본 것일까?

 

물론 마지막 스마트폰 푸티지 영상에서 라술로프는 이런 의문에 반박하듯이 이란인들 (특히 여성들)의 자주성과 저항이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 장르를 활용해 정치적 구호에 도달하는 방식은 다소 현장에서 기사 쓰듯이 즉각적이고 1차원적인 전략으로 짜인 것 아니냐는 미심쩍음을 지울 수 없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씨앗과도 같은 총알 이미지에서 시작해 그것들이 여성의 손을 통해 가부장 거악에 발사되면서 작은 혁명을 일궈내지만, 정작 그 총알들은 급하게 해외에서 마련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렇기에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알리 압바시의 [성스러운 거미]가 그랬듯이 지역적 정치 영화와 세계적 장르 영화 간의 진정한 새로운 혼종을 이뤄내려면 창작자에게 실제적인 정치적 자유와 여유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영화다.

'Deeper Into Movie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나귀 EO [EO] (2022)  (0) 2024.12.31
파벨만스 [The Fablemans] (2022)  (1) 2023.12.10
TAR 타르 [Tár] (2022)  (0) 2023.07.10
포제서 [Possessor] (2020)  (0) 2023.05.25
실리아 [Celia] (1989)  (0) 2022.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