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파벨만스 [The Fablemans] (2022)

giantroot2023. 12. 10. 23:02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는 지금껏 경력에서 암시로 머물렀던 영역에 성큼 들어선다. 바로 자신의 가족사. 스필버그는 지금껏 가족 이야기를 다뤄왔지만, 정작 자기 가족으로 영화로 만든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스필버그의 복잡한 가정사에 대한 한 단면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많은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스필버그는 기본적으로 가족 간의 정에 대해 호의적이고, 혈육 가족과 유사 가족이 제공하는 안정적인 해피 엔딩으로 인도하는 감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간의 불화와 불안정한 관계에 대해 파헤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스필버그가 가족애를 얘기할수록 거기엔 어떤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 순수한 나머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모성애의 갈구와 좌절, 충돌과 염원을 다룬 [A.I], 이미 한차례 부서진 한부모 가정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이 외계인 침공이라는 전 세계적인 액션이 겹치는 [우주 전쟁]도 그렇지만,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아이를 되찾으려는 부부의 탈주극을 다룬 초기작 [슈거랜드 특급]은 의외로 스필버그 영화 속 가족들은 처음부터 균열된 상태로 놓여 있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들은 마치 이상적인 가족은 이 땅 위에 없으며, 추방당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동시에 낙원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점에서 [파벨만스]는 이제서야 만들어진 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당사자인 부모가 살아있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의 부모는 아들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하고 노인이 되는 것까지 지켜보았지만 계속 '함께'가 아니었다. 스필버그 친부모는 스필버그가 1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이혼했고, 2010년대 말 타계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파벨만스]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즉 스필버그는 [파벨만스]의 이야기가 당사자들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스필버그는 사적인 내용을 현재진행형으로 다루는 감독은 아니다) 부모의 타계 후 도착한 [파벨만스]는 예술가의 성장극과 가족 해체의 파국이 발맞춰 나가면서, 평생을 사랑했던 영화라는 미디엄이 어떻게 격랑의 가족사, 나아가 현실과 관계를 맺었는지를 다룬다.

 

영화와의 첫 만남을 다루는 [파벨만스]의 도입부는 영화를 기다리는 관중들을 보여주는 숏으로 시작한다. 이 첫 숏은 수평 트래킹으로 파벨만 가족들을 소개하는데, 여기엔 흥분과 긴장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영화가 구경거리로서 다양한 기술적 발전을 하던 1950년대, 흥분에 가득 찬 사람들이 볼 영화는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이며 파벨만 가족도 그중 하나다. 스필버그는 파벨만 가족의 부모를 새미의 양쪽에 두고 (이때 새미에게 시점이 맞춰져 있기에 숏에서 부모는 무릎을 굽히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다), 트래킹 숏 끝에 만나게 될 구경거리로서 영화를 설명한다. 영화의 기술 요소에 관해 얘기하는 아버지 버트와 꿈에 관해 얘기를 하는 어머니 미치의 대사는, 영화의 대전제가 부모 간의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되며, 새미가 영화 내내 이 사이를 방황할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그런데 기술과 꿈의 합작품인 [지상 최대의 쇼]가 새미에게 보여주는 구경거리, 강도질하던 강도가 열차를 막으려다가 충돌해 열차가 전복되는 시퀀스다. [지상 최대의 쇼]는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강도]나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처럼 열차 액션이 구경거리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서커스 극단과 곡예사에 대한 영화다. 그렇기에 [파벨만스]가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새미가 주목하는 [지상 최대의 쇼]구경거리와 표정 숏 몽타주는 원래 영화감독이 의도했던 구경거리와 다소 어긋나고 있다. 어린 새미는 원래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에서 이탈한, 망가지고 파괴되는 장면에 매혹을 느낀다.

 

[파벨만스]의 이상함은 보여주려고 했던 것과 매혹을 느끼는 것 간의 틈에서 비롯된다. 새미가 느끼는 이 어긋난 매혹은 제임스 G. 발라드의 [크래시]의 자동차 충돌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발라드의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을 영화화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는 발라드가 다뤘던, 단어와 문장으로 구현화 된 강렬한 이미지가 인간 존재와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 문학적 묘사를 인지하고 있는 감독이다. 즉 새미는 도입부에서 움직이는 충돌 이미지와 접촉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변하는 발라드 소설과 유사한 과정을 겪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벨만스]는 영화 매체의 즉각적인 파괴성에서 왜 매혹을 느끼는지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충돌에 대한 새미의 매혹은 [크래시]랑 달리 가족 성장 영화라는 틀에서 비교적 온화하게 자리 잡는다. 새미는 영화 속 충돌과 파괴에 대한 매혹을 스크린 밖에서 나름대로 재현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새미는 아버지의 기술자적인 태도를 동원해 (혹은 과학자적인 태도로) 욕망을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운동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충돌 역시 그러하다. 새미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구경거리로서 충돌을, 일정한 틀에 고정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때 미치가 영화 카메라를 알려주고 새미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파벨만스]의 화두는 기계 장치인 카메라가 기록하는 예술=영화의 힘과 파괴성 문제로 넘어간다.

 

스필버그와 토니 쿠슈너는 새미와 미치가 혈육 이상으로 서로에게 공감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초반부 한 시퀀스를 통해 제시한다. 바로 미치가 아이들을 데리고 폭풍우를 쫓아가는 시퀀스다. 미치가 매혹된 폭풍우는 그 점에서 명백히 관객의 관점에서 비현실적인 사건, 나아가 운동과 충돌 이미지에 대한 원초적인 매혹 그 자체다. 혹은 미지와의 조우라 요약할 수 있는 스필버그 영화의 구경거리로서 예술이 어떤 감정과 감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는 충돌과 매혹, 욕망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기술적인 설명을 넘어선 어머니가 제시한 꿈의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 담긴 새미의 첫 번째 이 운동이 만들어내는 충돌 이미지라는 점은, =영화에는 내재한 파괴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퀀스에서 꿈의 방법론은 갑작스레 중단된다. 미치는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을 겪고, 아이들의 간청에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차를 멈춰 세우고 만다. 이때 차 앞을 지나가는 쇼핑 카트의 숏은 마치 움직이는 벽처럼 미치와 폭풍우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움직이는 벽 앞에서 미치는 아이들에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가? 이 시퀀스에서 이유라는 핑계로 성립될 만한 명백한 사건과 주체는 베니의 거처에 대해 남편과 다투다 아이들을 데리고 폭풍우를 쫓아간 미치 밖에 없다.

 

즉슨, 미치는 폭풍우를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미치는 가정에 안정과 속박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으며, 때마침 등장한 폭풍우를 핑계 삼아 집 밖으로 나가는 액션을 취한다. 이때 미치의 액션이 보이는 활기참은 영화 그 자체의 매혹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액션은 엄마, 멈춰라는 간단한 대사 앞에 좌절되고 만다. 어머니가 좌절하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새미는 창으로 시선을 돌려, 폭풍우의 흔적을 본다. 마치 떠나갈 폭풍의 이미지를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꿈의 방법론과 실현은 가족이라는 틀에서 불가능한 것인가?

 

가족들은 이제 서부로 떠난다. [파벨만스]에서 첫 번째 시간적 도약은 차고에 들어가려는 차 앞에 선 새미의 (다소) 위험한 모습에서 숏에서 시작해 손의 이미지를 담은 숏으로 끝난다. 이제 10대 소년이 된 새미는 바위 밑에서 맹독을 지닌 전갈을 찾아, 돈으로 바꿔 필름을 산다. 이 몽타주 사이 생략된 성장의 시간에서, 새미가 자라면서 영화와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충돌에 매혹되어 기록하는데 관심을 보였던 새미는 이제 영화를 위해서라면 충돌을 묘사하는 걸 넘어서 직접적인 위협도 거리낌 없이 다루는 소년이 되었다. 여기다 새미와 친구들이 만드는 영화는 총격전과 죽음이 등장하는 서부극이다. 새미는 미국 영화의 원풍경에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파벨만스]는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서부극을 활용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서부극은 단순히 한 소년의 영화적 매혹과 재현에 그치지 않고 구조에도 짙게 반영되어 있다. [파벨만스]는 동부에서 시작해 서부, 그것도 서부극 거장을 만나면서 끝나는 영화이다. [파벨만스]가 여러 개의 장으로 이뤄진 영화라 볼 수 있다면, 이사하는 장소를 기준으로 장이 나눠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영은 온전히 서부극 보다는, 탈서부극 쪽에 가깝다. 파벨만 가족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한데 뭉치지 않고, 개개인으로 흩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흩어짐을 이끄는 원동력은 꿈을 실현코자 하는 개인 주체 (나아가 예술가)의 욕망이 담겨있다. [파벨만스]가 서부극 장르에서 빌려오고자 하는 것은 평범함의 공동체에 안착하지 못하는 무법자와 (가족) 공동체 간의 애증일 것이다. 다만 그 무법자는 총이 아닌 카메라를 들고 있을 뿐이다.

 

새미가 어머니의 연주회에서 서부극 총격전 숏에 대한 영감을 얻는 장면은 이런 서부극과 영화 매체 간의 교차점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시퀀스에서 관객은 미치가 어떤 부류의 예술가인지를 알게 된다. 바로 음향을 다루는 피아노 연주자다. 하지만 새미의 8mm 영화는 아직 음향이 도입되지 않은, 무성 영화이기에 미치의 피아노 연주/음향이 영화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결되는 것은 미치가 실수로 악보를 밟고 생긴 구멍이라는 이미지다. 악보가 훼손되었으니 외워서 쳐야겠다고 투덜거리는 미치와 달리, 새미는 필름에 구멍을 내 총격전 효과를 강화한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이때 이 훼손/구멍은 단순한 손상을 뛰어넘어 숏의 강렬함을 더하는 촉매제이자 특수효과 역할을 한다.

 

그러나 훼손이 영화에 들어오면서 어떤 덜컹거림이 발생한다. 필름에 구멍 내기는 볼거리를 강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필름이라는 물질적 신체를 훼손이기도 하다. 또한 이 훼손은 외부에서 내부로 침범하는 형태의 행위다. 이 훼손을 좀 더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끌어오면 어떨까? 만약 필름 밖 이물적인 사건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균열이 필름 속으로 침범해 들어온다면, 새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가족 캠핑 시퀀스는 그런 침범과 균열의 도래를 알리는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서 가족들은 실은 미세한 균열이 났다는 걸 보여준다. 가족과 겉도는 버트와 반대로 가족과 어울리는 베니의 모습도 그렇고, 시퀀스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치의 춤사위는 가족의 풍경을 균열케 하는 이물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미치는 베니의 부추김으로 자동차 전조등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때 밝은 전조등은 옷 안에 가려진 미치의 몸 윤곽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명백히 자유로움과 성적인 긴장감이 도는 미치의 춤 숏은 안정적인 가정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걸 표출한다. 이런 표출 앞에서 가족들과 베니의 리버스 숏이 등장하지만, 정작 새미의 카메라는 이 리버스 숏을 찍지 않는다. 새미는 딸들을 질색게 하는, 희미하게 성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는 미치만을 시선에 담고 있다.

 

이 시퀀스에서 스필버그는 두 개의 시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카메라의 기록에만 매혹되어있던 캐릭터의 시선과 훗날 가족 관계의 구멍이 될 사건을 재구성하는 스필버그 자신의 시선이다. 그렇게 시퀀스 내 리버스 숏은 영화 밖 스필버그에게만 허용되고, 영화 속 새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서 새미는 어머니한테서 미묘하게 풍기는 성적 이미지에서 낯섦과 예술적인 매혹을 느끼고 영화에 담지만, 이는 지금까지 만든 새미의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물적인 이미지이자 사건이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새미는 이 이물적 사건들과 이미지가 감정적 폭로로 화할지는 알지 못한다.

 

미치의 불륜 증거를 새미가 편집하다 발견하는 장면은, 이물성이 만들어낸 균열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의 충격을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는 새미가 편집하는 과정을 미치의 피아노 연주와, 버트가 작업하는 숏과 교차해서 보여준다. 새미의 캠핑 영화는 여전히 무성이지만, 미치의 피아노는 새미와 다른 공간에 연주되어 새미의 편집 작업 숏들의 외재 음향으로서 삽입된다. 새미는 같은 프레임과 숏을 반복해서 돌려보면서, 프레임에 담긴 잔인한 진실을 목도하고 만다.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이미지로 반복해서 보여지는 미치와 베니 사이에 벌어지는 애정의 손길과 빛으로 드러나는 형상들은 관음적이지만, 매혹적이지는 않다. 이때 이물적인 이미지는 잔인할 정도로 진실만을 말하며, 가족 관계를 침범하고 훼손해버린다. 미치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그 점에서 침범과 훼손을 위한 사운드트랙이라 할 수 있다. 외재적으로 작동하는 내재 음향인 미치의 피아노는, 프레임 속 균열의 주체를 암시하며 영화 예술을 꿈꾸지만 동시에 균열을 마주해야 하는 새미의 가혹한 심리적 고난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새미는 영화 만들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탈출하려는 듯이 완전히 허구로 이뤄진 세계에 매달린다. 새미가 만드는 두 번째 영화는, 전쟁 영화다. 두 번째 영화 만들기에서 스필버그가 보여주는 것은 새미가 지시한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촬영이 끝나고 난 뒤로도 연기를 하는 친구의 모습이다. 그는 작중 카메라에서 프레임 아웃 된 뒤로도, 영화 속 자신에게 부여된 서사가 실제 자신의 서사인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서 스필버그는 충돌, 훼손, 침범 다음으로 몰입이라는 화두를 끌어들인다. 친구의 과몰입 연기 장면은, 직전에 만든 캠핑 영화에 대한 새미의 불편함과 감정적 이입이랑 대응하고 있다. 새미는 명백히 캠핑 영화의 숏들에 담겨있던 불륜의 흔적이라는 이물성, 나아가 가족 관계의 균열에 과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친구는 어떻게든 허구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새미가 찍은 캠핑 영화는 홈 무비이자 다큐멘터리이다. 빠져나올 구멍이 없는 것이다. 실제의 사건에 몰입한 새미에게는 탈출구가 없고, 두 번째 영화 상영회를 기점으로 미치와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격렬해진다. 불편함을 숨기고 있던 새미에게 미치는 무슨 일이냐며 따지고, 새미는 자신의 세 번째 영화인 캠핑 영화를 보여준다.

 

이때 새미는 미치의 불륜 증거가 담긴 필름을 이전 가족 상영회 때랑 달리 포함한다. 이를 통해 새미는 영화라는 신체가 의도에 따라 확장될 수도 있고, 동시에 위태로워질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영화는 그 위태로운 신체적 존재로서 영화를, 투사되는 공간을 제약하면서 드러낸다. 좁은 옷장의 어둠은 미치를 위한 영화관이 되고, 상영기의 빛은 미치의 결점과 실수를 보여주는 고문 도구가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영화와 어머니 간의 대립하는 항을 기어이 성립시켜버리는 이 시퀀스의 감정적 잔인함이 만들어내는 파괴력은,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만든 감정적인 시퀀스 중에서도 강렬하다. 물론 새미는 여전히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기에 세 번째 영화의 B컷을 다른 가족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미치와 새미의 관계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술가 동지 의식뿐만 아니라 공범 의식을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새미는 이 단계에서 영화를 포기하려고 한다. 도무지 영화로는 이물성과 균열로 가득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영화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치와 불륜 관계였던 베니다. 자신의 영화에 구멍과 균열을 만들어버린 자가 오히려 영화라는 예술을 포기하지 말라는 아이러니. 이때 베니가 말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 다름 아닌 (파벨만 가족과) 미치다. 베니의 대사는 파벨만 가족에 관한 호의가 담겨있음에도 한 칸 뛰어넘은 대리 충족적인 욕망이 들어있다. 카메라를 들 수 있는 새미이기에 (캘리포니아에는 존재하지 않을) 자신을 대신해서 (사랑하는) 미치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배배 꼬인 고백처럼 들릴 지경이다.

 

[파벨만스]의 불균질한 매력은 영화 예술에 대한 스필버그=새미의 열정과 매혹에 영화 밖 복잡한 현실 관계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균열이 침범하고 포섭되면서 발생한다. 영화-기술을 얘기하는 가부장 버트는 다정하지만 정작 영화 예술로 간다는 새미를 객기로 여기고, 영화 속 핵심적 갈등 관계에서 밀려나 있다.

 

반대로 영화-예술을 가르쳐주고 독려한 어머니는 불륜이 포착되고 폭로되면서, 갈등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애인은 어머니를 위한 영화를 만들라며 대리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캘리포니아로 가기 전 버트가 아무렇지 않게 베니랑 싸우는 이야기하자 불안해하는 미치의 반응 숏은, 마치 꿈과 동일시되곤 하는 영화의 무의식성과 파괴성 앞에 선 인간의 혼란스러움을 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미는 그런 다양한 욕망과 현실 사이에 놓인 영화 매체 자신과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고민한다.

 

베니와 미치가 떨어졌으니 캘리포니아에 도달하면서 미치가 히스테리 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치가 베니라는 이름의 원숭이를 키우는 장면은 분명 우스꽝스럽지만, 미치가 신경증 상태에 돌입했으며, 은밀히 숨겨져 왔던 균열이 구체화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동물원 속 원숭이들을 보러 간 추억을 말하면서, 원숭이한테는 인간이 상상도 못한 중요한 걸 숨기고 있다고 말하는 미치의 독백은 자신이 만든 균열과 그걸 기록해버린 홈 무비에 대해 지칭하면서, ‘자기의 주인은 자기라는 당연한 진리가 가부장 가정의 구조 아래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이처럼 미치는 영화 내내 바깥에서 안=집의 안온함을 파괴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받아들여 자기 자신을 정립하려고 한다. 허리케인, 베니(와의 불륜), 피아노, 원숭이피아노처럼 성공적으로 집과 융합된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는 가족과 집이라는 개념에서 받아들일 수 없거나,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물성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미치의 시도는 점점 히스테리와 한계에 이르게 된다. 이런 각각의 물체/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질성과 불협화음, 그럼에도 들여야 하는 미치의 당위성은 [파벨만스] 속 분열되어가는 가족을 그리는 원동력이자, 영화 매체가 끊임없이 포섭해 기록하려는 불균질함과 이물성에 대응하고 있다.

 

미치가 이물적인 예술적 자아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비극적인 히스테리에 빠진다면 새미는 예술적 자아가 설 자리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찾아 헤맨다. 캘리포니아에서 새미는 베니와 약속한 홈 무비를 찍지 않는다. 심지어 버트도 이 사실을 지적한다. 대신 그는 가족 밖의 세계와 충돌하며 가족 바깥에 있는 학교 영화를 찍게 된다. 새미를 괴롭히는 두 학생 로건과 채드의 등장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유대인으로서-그동안 새미의 유대인 정체성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가족 행사 같은 집단성에 가까웠다.-정체성을 원치 않게 확인하는 과정이며, 외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새미의 애정과 관점이 처음으로 다른 인물을 통해 변주되어 제시된다는 점이다. 얼마 안 되는 허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새미와 기독교인 모니카의 로맨스가 그것이다.

 

새미가 모니카의 집에 가서 첫 키스를 시도하려는 시퀀스는, 일견 실없는 코미디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니카가 새미에게 자신을 믿는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모니카의 예수 이미지는 당대 록스타 사진들과 함께 붙어 있다. 심지어 모니카는 예수가 (다른 존재로 강림할 수 있었음을 전제하고) 잘생긴 남성으로 왔다고 말한다. 이때 모니카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아이콘의 기독교적 가치 같은 내면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아이콘의 외면적인 이미지다. 모니카는 예수를 성애-아이돌 이미지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신앙심이라는 가치는 그 뒤에 따라오고 있다. 그 점에서 모니카의 예수와 새미의 영화는 외면성에 대한 즉각적인 매혹과 욕망이 의도보다 선행해 작동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모니카가 새미에게 성령을 불어넣으려는 시퀀스는, 자신이 원하는 외면적 이미지의 예수를, 실제 연애 대상(새미)과 내면적으로 일치하려는 시도나 다름없다. 이때 모니카는 성령에게 요구하면 안 되고 간청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영화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원하는 영화-이미지와 실제 대상 간의 괴리를 극복하고 합일해 생생해지려면, 실제 대상에게 요구가 아닌 해야만 한다. 모니카의 성령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비-기독교 유대인이라는 새미의 정체성과 자신의 엄마가 방해한다는 희극적인 개입으로 중지되지만, 모니카는 이후 새미에게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새미네 집에서 식사하던 도중 졸업반 학생들의 땡땡이의 날을 찍게끔 제안하는 것이다.

 

새미의 네 번째 영화이자, 작중 마지막 학생 영화 땡땡이의 날은 영화의 잔혹한 힘을 깨닫게 된 새미가 만든 걸작이다. (홈 무비를 제외하면) 이 영화는 픽션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속하며, 가족 구성원 이외의 존재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새미는 이제 자신의 시선이 담긴 카메라로 누굴 찍고, 어떻게 편집으로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대상이 생생해지거나 반대로 볼품없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영화로 숨겨진 사건과 감정을 폭로해본 자이다. 하지만 이 땡땡이의 날에 등장하는 로건과 채드는 새미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새미는 그들의 어떤 이미지를 했을까? 그리고 그 에서 끌어낸 숏은 과연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확실한 것은 핵심이 될 땡땡이의 날촬영 시퀀스 자체는 몽타주 형식으로 흘러가며, 영화 속에서 새미가 어떤 숏을 찍을지 고심하거나 연출하는 숏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새미의 역할은 연출자보다는 (캠핑 영화 때처럼) 기록자에 가깝다. 로건과 채드 역시 새미의 영화 카메라 앞에서는 별로 적대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시퀀스는 축젯날이라는 분위기가 끝까지 유지된 채 끝난다. 그렇기에 새미가 대상에게 청했던 숏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상영되는 순간을 확인해야 한다. 답은 단순하다. 새미는 대상이 찍길 요청한 것과 요청하지 않은 것을 모두 찍어 편집으로 배치했다. 카메라와 일치된 새미의 시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공평하게 담아내지만, 촬영 후 편집을 통해 영화로 재구성하면서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개입된다. 이때 새미가 촬영과 편집으로 부린 마술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과도 다름없다. 단지 그는 이미지의 조각들로 영화라는 신체를 만들었을 뿐이다.

 

로건의 반응은, [파벨만스]가 생각하는 영화 예술의 무서움을 잘 보여준다. 먼저 로건이 미치 다음으로 새미의 영화에 당황하고 불편해하는 두 번째 관객이라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 (채드는 단순히 분노하는 관객에 가깝다) 로건은 자신이 청한 것처럼 보이며, 관객들에게 멋지게보인 숏들이, 실은 자신이 청하지 않았으며,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에 빠진다. 곧장 말해 로건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 자신과 영화 속에서 흠결 없이 빛나는 자신의 이미지 간의 괴리감이다. 이 둘 사이에서 로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로건은 영화감독이 영화 속에서 가지는 힘이 이미지 내 권력으로 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창조된 이미지가 대중을 미혹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땡땡이의 날을 완성하면서 새미는 영화 이미지를 통제하고 대상의 또 다른 모습을 창조하는 권력자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땡땡이의 날상영회 전 등장하는 미치의 이혼 시퀀스에서 상술한 내용을 예언하는 듯한 섬뜩한 숏이 등장한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드디어 새미가 찍은 캘리포니아 홈 무비가 등장하지만, 홈 무비 속 숏들은 오히려 가족의 해체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단초가 된다. 직후 미치가 이혼을 선언하자 새미의 남매들은 혼란에 빠져 부모를 비난한다. 하지만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새미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그런데 동시에 새미는 이 상황을 카메라로 담는 자신을 상상한다. 대상에게 무척이나 무례하고 착취적이지만 예술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숏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숏을 상상하는 새미의 복잡미묘한 얼굴을 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이 필름 재생기에 겹치며 디졸브 된다.

 

새미는 결코 가족의 불화와 붕괴를 영화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영역이며, 다큐멘터리와 인간관계의 윤리적 선을 위반하는 행동이다. 새미의 욕망은 그 선을 넘진 않았다. 그렇기에 인물이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은 땡땡이의 날편집이라는 사건에 녹아든다. 하지만 미치의 이혼땡땡이의 날은 별개의 사건이다. 그렇기에 영화화할 수 있는 사건에 집중하는 새미의 선택은 명백히 현실 도피적이며, 실제로 새미의 여동생 역시 그 점을 비난한다. 스필버그는 둘의 대화를 통해 새미와 미치의 동일성을 명시한다. 이때 새미가 할 수 있는 위로는 자신이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다.

 

어쩌면 새미는 부모의 이혼 선언을 거치고 땡땡이의 날을 편집하면서 사람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내면을 드러내는 (혹은 착취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생겼던 걸지도 모른다. 새미의 영화는 처음엔 충돌에 대한 재현 욕망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필름을 훼손하는 것으로 표면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새미는 영화가 현실 세계의 균열이 표면의 이미지들에 침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삶의 복합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복합성을 파헤치면서 새미는 영화 이미지와 대상 간의 일치와 불일치, 몰입과 거리감이라는 화두까지 도달하고 종국엔 누구의 명백한 악의 없이 부서진 이상적인 가족상이라는 허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바라봄은 어째서 그렇게 스필버그가 커리어 내내 가족이라는 대상에 불균질한 충돌과 균열, 그럼에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미덕을 부여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떠난 새미가 만들 영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그 영화는 영화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파벨만스]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미치와 새미가 마지막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눈 후 시작하는 [파벨만스]의 결론은, 사라진 가족의 모습이다. 이젠 미치는 버트와 함께 하지 않는다. 새미의 여동생들도 미치를 따라 애리조나로 갔다. 중산층 가정의 단독주택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 버트와 성인이 된 아들 새미, 그들이 머무는 시내 아파트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이사하는 홈 무비 숏처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안 복도에 고정된 채로 새미가 들어오는 걸 지켜본다. 이제 버트의 아파트는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모이는 가정이 아니다. 혼자 또는 둘이서 살아가기 위한 주거지. 심지어 버트는 새미보다 나중에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새미의 방문은 버트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카메라는 한 발짝 떨어진 채 새미와 버트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것들의 부재를 담아낸다.

 

새미는 자신이 갔던 영화 학교에 대해 실망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여기서 새미는 처음으로 현실의 벽에 마주한다. 영화는 개인적인 놀이나 학교에서 배우거나 인정받기엔 한계가 있으며, 결국 프로의 세계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매체이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추어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새미는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을 과거로 묻어야 하고,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도 새미는 다른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비하면 운 좋게, ‘조수의 조수의 조수로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된다.

 

존 포드의 등장이 조수의 조수의 조수로 업계에 막 들어선 새미와 대조되기 위해 등장한 거라 본다면, 서부의 끝에 도달한 새미가 시선의 높낮이가 영화의 매혹을 만든다는 걸 배우는 건 무엇을 뜻할까? [파벨만스]의 마지막 숏은 존 포드의 가르침을 장난스럽게 재현하는 영화 밖 스필버그가 카메라로 부리는 외재적인 위트다. 그러나 이 장난스러운 높낮이의 변화는 지금까지 있었던 현실의 균열과 이물적인 것들의 침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포드의 지평선은 단순함의 미덕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가리켰지, 현실의 복잡한 균열들이 침투하고 폭로되는 곳은 아니었다. [역마차]에서 지평선 너머로 역마차에 다가오는 존 웨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포드가 지평선의 위치를 보고 흥미롭다의 여부를 논하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말의 급작스레 지평선 위치가 달라지는 숏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새미의 모습에 흥미로움을 불어넣으면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표면 아래에 숨겨진 감정을 짚어내야 한다. 그곳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그 누구도 없다. 이 숏에서 새미는 차라리 마을을 떠나 지평선을 향해가는 무법자처럼 보인다. 현실의 균열이나 이물적인 침투, 폭로로서 홈 무비가 아닌,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일말의 쓸쓸함. 그렇기에 스필버그는 부모인 미치와 버트가 떠나가는 새미를 응원하는 시퀀스를 소환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소환을 통해 [파벨만스]는 영화에 대한 첫 매혹을 가르쳐줬지만 끝내 흩어진 가족의 풍경을 서성거리며, 평생 패밀리 무비를 만들어왔고, 와야 했던, 스필버그 자신의 회한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