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의 시작은 흐름이 있는 모호한 파편이다. 아마 처음 보는 관객들은 왜 남녀가 아파트로 몰래 숨어들어가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도착적인 섹스 끝에 여자를 살해했을때조차도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마침내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수사 사건으로 현장에 불려갔을때 관객들은 [완전범죄]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 갈피를 잡게 된다. [완전범죄]는 범죄를 숨기려고 하는 경찰 수사관의 얘기다.
관객은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 경찰인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거나 들킬 생각이 전혀 없다. 수사관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이 세 전제는 오오바 츠구미와 오바타 타케시의 [데스노트]나 김성훈의 [끝까지 간다]랑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완전범죄]는 [데스노트]나 [끝까지 간다]에서는 기능적으로 쓰였던 '권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서사를 뒤틀어버린다. 이 영화엔 동료 수사관들은 범인을 가르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의심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완전범죄]는 이를테면 파시즘적 권력이라는 블랙홀 때문에 상식의 벡터가 왜곡되고 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이런 비정상적인 설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적으로 영화가 끝날때까지 주인공은 이름 없이 직위로만 불린다. 마치 그에겐 어떤 개성이 필요없다듯이 말이다. 이 익명성은 마치 그의 캐릭터가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이들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본가 우고 피로와 엘리오 페트리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바로 피의자와 피해자, 증인이라는 일반인들과 수사관이라는 권력자 간의 인간 관계다. 수사관들은 가식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언론인들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 권력에 야합한다. 와중에 일반인들은 권력 앞에 무력하다.
페트리와 피로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성 권력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사도마조히즘과 강간 이미지야말로 파시즘의 성적 이미지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연기하다가 진짜로 살해당한 아우구스타는 일반인들이 파시즘에게 매료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아우구스타 입을 빌려 주인공에게 매력 없다고 조롱해버림으로써 그 매료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때 아우구스타가 퍼붓는 '유아기'와 '발기부전'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궤뚫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게도 아우구스타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가인 안토니오다. 페트리와 피로는 파시즘보다 사회주의가 더 '성숙'하고 '섹시'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엘리오 페트리가 [완전범죄]를 위해 동원한 영화적 수법은 클로즈 업과 몽타쥬의 교란이다. 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컷은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얼굴이나 대상을 강조해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페트리가 공을 들이는 클로즈 업은 주인공 얼굴의 클로즈 업이다. 애인과 바람을 피울때도, 파시스트적인 연설을 할때도, 수사를 할때도, 자신에게 범죄 증거를 받아 고발하러 온 시민을 교묘하게 압박할때도 페트리는 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오만한 표정 연기로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심지어 심문당하는 증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할때도 프레임 밖 주인공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트리에게 클로즈 업은 파시스트의 언어이자 파시즘적 관계의 정점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그 결과 [완전범죄]는 클로즈 업과 클로즈 업이 아닌 샷 간의 몽타주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클로즈 업에서 드러난 파시스트의 권력이 다른 평범한 샷들의 방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페트리는 수사과정을 시간순으로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서브 플롯이나 연설, 플래시백, 환영으로 도주한다. 마치 명백한 서사적 목표인 '살인마 주인공을 처벌한다' 를 일부로 방기하는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도입부의 파편화된 샷으로 이뤄진 미스터리는 일종의 예고였던 셈이다. 페트리는 서사와 몽타쥬의 교란, 파편화를 이용해 상식적인 영화 언어를 휜다. 그리고 그 휘어짐은 파시즘에 대한 은유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가족의 친구]나 [일 디보]의 선조인 셈이다. 이런 휘어짐은 야비한 느낌의 엔리오 모리코네의 사운드트랙도 한 몫한다.
하지만 소렌티노가 펠리니식 성찰과 유미주의로 나아간다면, 페트리와 피로는 정반대로 그 혼란을 밀어붙인다. 그 결과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오네스코나 카프카, 피란델로 같은 부조리극의 세계다. 징후는 아우구스타의 애인인 안토니오에게서 시작한다. 다른 심문자랑 달리 안토니오의 등장 시퀀스에서 주인공은 롱 샷에 짓눌려 초라하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안토니오와 주인공이 마주 섰을때, 이 영화가 유지하던 클로즈업의 권력은 파괴된다. 안토니오는 이 영화 인물들 중에서 아우구스타랑 더불어 주인공에게 정면으로 반항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죽어버린 아우구스타랑 달리 안토니오는 자신의 알리바이와 논리를 갖춰 또박또박 반박한다.
성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좌파 혁명가에게 밀려버린 파시스트가 선택한 끝은 자폭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처럼 한 떨기의 쓸쓸함조차도 허락받지 못한다. 아니 페트리와 피로의 야유는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이 영화의 끝은 훌륭한 부조리극이다. 자신이 살인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울부짖는 주인공의 말에도 동료들은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해버린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되버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건 오직 시스템의 종이 되는것 뿐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확인 사실로 이 모든 과정을 환상으로 처리하고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지으면서 명백하게 한다.
[완전범죄]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파시즘이 휘두르는 권력을 신랄할정도로 까내리면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는가를 체계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완전범죄]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여럿이나 청와대에 들이앉아 추태를 부리며 자멸하는걸 똑똑히 보고 있다. 만약 이들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낸 한국 영화가 등장한다면 그 영화는 [완전범죄]처럼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인상을 가졌더라도 그는 법의 종복이며, 법에 귀속되어 인간의 판단을 벗어난다."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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