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자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giantroot2016. 9. 4. 22:06

2012/10/12 - [Deeper Into Movie/리뷰] -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1956)

니콜라스 레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두려움 없는 과잉이 만들어내는 살 떨리는 세계로 초대받는 것과 다름 없다. 평범해보이는 서사는 인물의 심리에 따라 비대하게 부풀어오르고, 멜로드라마틱한 과장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낯설게 보인다. 걸작 [실물보다 큰]에서 레이의 과잉은 완벽해보이는 50년대 미국 중산층 사회의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제임스 메이슨의 과잉 연기는 시네마스코프에서 미친듯이 부풀어올랐고 레이는 그 과정을 강한 그림자와 비틀린 구도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언해피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50년대 미국을 해부하는 사이코 스릴러/멜로드라마였다. 일견 평범한 서부극으로 보이는 [자니 기타]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 영화는 [실물보다 큰]보다 한술 더 뜨는 영화다.

[실물보다 큰]이 직접적으로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을 비꼬고 있었다면, [자니 기타]는 서부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훨씬 우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떠돌이 총잡이 자니 기타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전 애인 비엔나를 찾아왔다가 마을 내 내분에 휘말린다는 내용은, 고전 서부극에 충실한 서사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뭔가 비틀려있다. 그것도 상당히 배배꼬여있다.

먼저 이 영화의 등장인물을 보라. 존 포드식 공동체와 영웅은 커녕 자니 기타, 댄싱 키드 같은 정상적인 서부극이라면 등장하지 않을법한 이상한 이름의 캐릭터들이 등장인물이랍시고 나오는데, 설상가상으로  다들 어딘가 신경증에 걸린듯이 조금씩 오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니가 댄싱 키드에게 총을 양 손으로 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컷에서 보여주는 리듬과 스털링 헤이든의 연기를 보라. 너무 황당하고 급작스러운지라 도무지 정상적인 서부극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테크닉적으로도 [자니 기타]는 1950년대 컬러 영화 특유의 신경질적인 색감과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자니와 비엔나가 석양을 등지고 대화하는 장면이라던지 어둠 속에서 로맨틱한 대사를 나누는 장면의 뻔뻔하게 강렬한 조명과 색감을 보라. 존 포드의 색깔이 우아하고 쓸쓸하다면 니콜라스 레이의 색깔은 공격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과격함으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자니 기타]가 스파게티 서부극처럼 품위도 다 던져버린 무뢰배의 영화냐면 그것도 아니다. 분명 자니 기타와 비엔나는 위엄있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위엄은 니콜라스 레이의 손에 정교하게 재배치되어 기이해진다.

[자니 기타]의 기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비엔나가 첫 등장하는 컷을 보면 알 수 있다. 로우 앵글로 찍은 이 컷은 비엔나가 주변 남성들 간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니 기타와의 로맨틱한 관계를 묘사할때도 비엔나는 자신의 주체성이나 카리스마를 쉬이 꺾지 않고, 자니 기타는 오히려 그 관계에서 짓눌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 점에서 자니 기타는 [실물보다 큰]의 에드 에버리랑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기를 쓰고 남성성을 되찾으려다가 자폭한 에드랑 달리 자니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부드러운" 모습부터 시작해 비엔나에게 휘둘리며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 그다지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관계를 재건하길 원하는 속내까지 보인다.) 또한 그는 남성성의 상징인 총에 능숙하지만, 그걸 과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자니의 캐릭터랑 만용을 부리다 죽는 비엔나의 젊은 부하, 비엔나를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어버리는 댄싱 키드랑 함께 엮어보면 영화 속의 남성성의 축소가 의도된 거라는걸 알 수 있다.

비엔나가 카리스마가 넘친다면 적대자 엠마는 꿈에 나올까봐 무서울 정도로 표독스럽다. 엠마가 나오는 순간 관객들은 안 그래도 비틀려있던 영화가 이상한 쪽으로 날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엠마는 한마디로 일본 만화의 얀데레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개성과 비엔나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존재다. 엠마가 나와서 비엔나를 죽이자고 말하는 순간의 메르세데스 맥캠브리지의 연기는 주변 남자들을 간단히 쩌리로 만들어버린다. 당연히 엠마와 비엔나가 나오는 순간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에 쌓이게 된다. (실제로 맥캠브리지는 크로포드랑 앙숙 사이였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에 툭 튀어나오는 대사는 영화 전체의 관점을 대변하는 대사기도 하다.

이를 보듯 [자니 기타]는 젠더 전복적/페미니즘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전복이 여성성을 완전히 방기하지 않은 채 이상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엔나가 갑자기 동료들을 내보내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며 엠마 일당을 기다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자니와의 관계에서 얼핏 드러나는걸 제외하면 여성성을 드러내는데 그다지 신경쓰지 않던 비엔나가 갑자기 이 장면에서 매우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며 나타나기 때문에 전후 맥락을 고민케 한다. 남성성으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없다는 비엔나의 전략적 판단이 반영된 것일까?

[자니 기타]의 우화적인 통찰은 이후 전개에서 잘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자니 기타]는 마녀사냥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영화다. 비엔나는 마을 이권 다툼에 휘말린 무고한 피해자이며, 모든 것은 엠마의 주장과 거기에 선동된 마을 사람들 손에서 이뤄진다. 레이의 살 떨리는 과잉과 날카로움은 이 순간 번뜩인다. 비엔나가 여성성을 어필해 무고함을 주장해도 이미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비엔나의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불태우고 목을 매단다. 사실상 [자니 기타]의 젠더 전복과 더불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부분이며, 영화 발표 당시 매카시즘 광풍을 떠올리지 않아도, 여전히 날 선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자니가 비엔나를 구한 뒤, 비엔나는 다시 중성적인 옷차림으로 돌아오는데, 이 장면에서는 비엔나가 여성성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가진 남성성을 활용하면서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반면 엠마는 그런 변화를 거치지 않고 계속 여성적인 치마차림을 유지하는데 (심지어 말을 탈때도), 이 상관관계가 엠마의 패배로 이끌지 않았나라는 추측을 해본다. 비엔나만큼이나 당차보이는 엠마가 실은 남성성을 '활용'하는게 아니라 '의존'하고 있었다는건 오빠랑 같이 가게를 운영했다는 점이라던가 키드와 오빠를 향한 광기어린 애정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고, 최종 결투가 남성성의 활용이라 할 수 있는 총격전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니 기타]는 여러모로 니콜라스 레이 특유의 과장되고 기이한 매력이 가득한 영화다. 당시 젠더 인식을 자유롭게 깨부수며 동시에 집단 광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서부극이라는 장르에서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 사이를 자유롭게 활보한 몇 안되는 감독이라 할까. 그 점이 누벨바그 감독들의 지지를 받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