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인정하는 영화사의 고전을 리뷰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발굴도, 동시대적으로 뛰어난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게 굳건한 비평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비슷비슷한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블로그가 참신한 해석을 노리는 그런 블로그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어반복은 흥업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얘기할때도 비슷한 얘기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시초 중 하나로 감독의 자전적인 성장기를 다뤘으며, 현장 로케이션으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넣어..." 이런 얘기를 리뷰에다 늘어놓는건 따분한 일이다.
물론 이 영화가 선취한 영화적 테크닉은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전후 네오 리얼리즘에서 영화의 길을 발견한 고다르와 트뤼포가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에 배우를 세우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을때, 네오 리얼리즘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은 단순히 파괴된 현실에 대한 고찰 이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젊은 비평가들이 만든 영화가 고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서 있는 현재 (60년대 프랑스)를 재구성하는 허구적 영화가 사운드 스테이지라는 인공적인 세트 바깥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비교하자면, 처음부터 그들의 결별은 예정된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400번의 구타]는 [네 멋대로 해라]랑 비교하면 작지만 분명한 형식적/내용적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후기작으로 갈 수록 명확해진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네멋대로 해라]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고다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고다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네 멋대로 해라]는 머리와 영화광적인 취향으로 설계된 영화다. 지극히 모범적인 갱스터 영화에서 시작해 자의적으로 자르고 배치된 컷들로 내용 자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엔 전혀 엉뚱한 감흥으로 마무리짓는 이 영화는, 고다르 자신이 펜과 머리로 줄곳 상상한 영화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캐릭터는 쉽게 감정이입하기 힘들었고, 그들의 수다는 서사와 관계 없는 부분도 포괄하고 있었다. 이후 고다르는 한동안 서사마저 포기하면서 서구 지성과 영화사에 대한 통찰을 영화의 언어와 구조에 접목시키는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온갖 영화적 실험을 거쳐온 지금 관객들에게 [400번의 구타]는 낯섬보다는 친숙함을 받게 된다. 트뤼포의 자의식과 형식은 신선하고 매력적이지만 영화의 주체인 앙트완 드와넬이 느끼는 감정과 현실에 앞서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다. 앙트완에게 세상은 고통스럽고 학교 생활은 재미없으며 영화만이 그를 위로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영화조차 위안해주지 못하는 현실의 엄혹함은 그를 사회 변두리로 내몬다.
이런 쓸쓸하고 처량한 감수성은 개별 샷들에서도 감지된다.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서 눈을 반짝이는 앙트완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여주는 샷부터 거리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걸 목격하는 샷, 전설이 된 마지막 결말의 프리즈 프레임까지 모든 샷의 주체는 앙트완이며 트뤼포는 고다르와 달리 감정과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기교를 활용한다. 트뤼포가 꽤 솔직한 감독이고 앙트완 역시 숨기는게 없는 캐릭터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앙트완을 통해 드러난 트뤼포의 불우한 시절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의 공간을 살펴보면 크게 몇가지 부류로 나눠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집, 학교, 청소년 보호소로 대표되는 억압의 공간, 도시로 대표되는 해방의 공간, 그리고 마지막 축 쳐진 얼굴로 돌아서는 해변가. 이 공간들을 오가며 트뤼포는 우울했던 과거 속에서 해방감을 찾아낸다. 초창기 트뤼포나 고다르는 달리기라는 행위에 매료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는데,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국외자들]이 그랬고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역시 달리기의 해방감이 가득한 영화다. 앙트완이 친구랑 학교를 땡땡이 칠때 신나는 템포로 질주를 담는 부분을 통해 트뤼포는 억압의 공간에서 해방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생기는 특유의 운동감을 주목한다. 그 점에서 오프닝에 등장하는 차를 타고 찍은 파리 정경은 영화의 해방감을 암시하고 있다.
트뤼포는 이후 자기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보고 열심히 토론하는 서사랑 하등 상관없는 장면을 굳이 집어넣는 연출을 보이는데, [400번의 구타]는 그런 트뤼포의 영화광적 고백의 첫 머리에 있는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트뤼포가 [400번의 구타]에서 주인공들에게 보여준 영화는 고전 영화가 아닌, 훗날 나오게 될 자크 리베트의 데뷔작 [파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후 트뤼포 영화들의 영화 인용이 고전 영화에 치중해있다면 [400번의 구타]에서 선택한, [파리는 우리의 것]은 여러모로 누벨바그 세대의 자신만만함을 선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작 리베트의 [파리는 우리의 것]이 그리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였다는걸 생각해보면, '파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제목은 [400번의 구타]에 어울릴법한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는 지금 봐도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는 차기작 [피아니스트를 쏴라]처럼 장르 실험에 몰두한 영화도 아니고, [아델 H.의 이야기]나 [미시시피의 인어]처럼 중후기작들처럼 고전적이다 싶을 정도로 안정된 서사와 연출이 정신나간듯한 로맨틱한 감정과 대조로 이루며 기이한 순간을 만드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400번의 구타]는 소박한 성장 영화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막 완성한 자의 기쁨과 희열을 맛볼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런 작품은 인생에서 한 순간 밖에 만들지 못한다. 아마 앙트완을 주인공을 내세우며 차기작을 만들어댄 트뤼포도 알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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