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은 익숙한 구조에서 출발한다. 형사가 범죄자를 잡기 위해 쫓다가 범죄자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다. 형사, 범죄자, 범죄자 애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그들이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지 같은 [무뢰한]를 이루고 있는 익숙한 구조에 대해 구구절절히 늘어놓는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을 어떻게 부여하고 그 디테일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드러나는가이다. 이 디테일을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무뢰한]은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액션 영화가 될수도 있고, 아니면 매우 무거운 분위기의 멜로물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오승욱 감독은 [무뢰한]을 통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무뢰한]이 장르를 통해 설정한 인물들의 동기는 이렇다: 주인공인 정재곤에게는 형사로써 건수를 올려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에 친절을 가장해 이영준이라는 이름으로 김혜경에게 접근하고, 혜경은 친절하게 대하는 재곤이 싫지만은 않다. 이처럼 [무뢰한]은 동기 부여는 간단한 편이며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아챌수 있다. 오승욱 감독은 그러나 그 간단한 설정을 침착하고 깊은 호흡으로 확장해나간다.
처음 만나자마자 껄렁하게 반말을 하며 접근하는 재곤에게 왜 반말하냐고 반박하는 혜경, 현실에 실망한 두 남녀가 술을 마시며 한탄하는 장면들의 침침한 조명설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고 가는 두 남녀 위로 흘러가는 차창 밖 풍경들, 허름한 아파트에 토로를 하다가 나누는 섹스와 섹스 후 둘이 나눠먹는 잡채의 식감, 저음 위주의 최소한의 영화음악 등 [무뢰한]은 전형성에 푹 빠져있는 개별 장면들의 감정선과 특정한 시청각 이미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세밀하게 프레임 속에 새겨놓는다. 그리고 그 세밀하게 새겨놓은 프레임들이 모여 차곡차곡 장면으로 쌓아가면서 두 남녀의 감정이 확장되거나 세세한 힘을 얻는다. [무뢰한]은 근래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무드 피스라고 할만한 영화다.
그렇다면 그렇게 불어난 감정들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무뢰한]의 세계는 한마디로 ‘변두리’의 세계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 재곤과 혜경이 살아가는 곳은 서울에서 한 발짝 떨어진 주변 소도시다. 하지만 [무뢰한]의 인물들에는 [원미동 사람들]에 서울로 대표되는 중심부로 진입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나도 ‘퇴물’이다. 강남 텐프로에서 잘 나갔지만 지금은 변두리에 개업한 나이트클럽을 영업하기 위해 온갖 모욕을 참아야 하는 김혜경과,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살기 위해서 조폭의 연줄에 기대며 가끔 폭력을 휘두르는 형사 정재곤 모두 중심부에서 밀려났고 중심부로 들어갈 확률도 낮은 유형의, 중년의 남녀들이다.
자연히 이들의 연애는 도피적인 분위기로 가득해지는데 [무뢰한]이 이 도피를 묘사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몸에 있는 상처에 대해 묻는 혜경에 대해 재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때 혜경은 “상처 위의 상처... 더러운 기억 위의 더러운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야말로 [무뢰한]이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무뢰한]은 더러운 기억들로 뒤덮혀버린 중년 남녀의 절박하면서도 도피적인 로맨스며, 동시에 또 더러운 기억이 되버릴 로맨스에 대한 얘기다.
다만 오승욱 감독은 두 인물의 성향에서는 미묘하게 차이를 두고 있다. 먼저 재곤을 살펴보자. 그는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계속 간직하고 있으며, 구질구질한 감정과 상황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전문가 연기를 하면서 도피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가 혜경에게 보여주는 행동 대부분은 연기지만, 동시에 연기라 할 수 없는 애매하고 서툰 부분들이 혼재되면서 묘한 여진을 남기게 된다. 순진한 척 하지만 실은 목적을 위한 연기며, 동시에 그 연기의 서툼을 숨기려고 하는 모습도 들어낸다고 할까. 돼지 발정제 사건을 저지하고 선배 형사에게 불만을 표하는 장면과 혜경의 집 앞에 죽치며 기다리는 장면은 그의 애매하고 서툰 부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혜경은 재곤의 믿지말라는 말조차 진짜 같다고 말한다. 그 애매한 간극을 본능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혜경은 과거 텐프로 시절 영광스러웠던 자신을 부단히 추켜올리고 고압적이고 도도한 태도를 취하지만 (“나 김혜경이야!”) 동시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 평범한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는 형태의 도피를 원한다. 그리고 상처 입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혜경은 겉으로 보기엔 당당해보이지만 반대로 그 속을 보면 불안해하고 정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재곤과 사랑에 빠진 후에도 자신에게 믿을수 없는 미래를 허풍치는 준길에 대한 끈을 버리지 않는 것도, 그런 자신의 허약함을 받아주고 어디론가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곤과 혜경은 상처와 도피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를 보이고 있다. 혜경의 연기는 표면으로 드러나 벽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 속을 비교적 알아차리기 쉽다만, 재곤의 연기는 벽과 속 간의 경계가 흐릿하다. 그렇기에 [무뢰한]은 거울쌍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짐승들의 이야기며 그 거울쌍에 반해버려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가 된다. 그 때문에 예정된 장르적 파국 역시 꽤나 독특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재곤은 혜경에게 준길과 도피할 돈을 주고 다시 추격해 끝내 준길을 사살한다. 울부짖는 혜경을 바라보는 재곤은 그 전을 재곤의 행동은 이중적이지만 당연한 것이다. 재곤의 이중적인 행동은 모두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다. 그는 혜경에 대한 애정을 속이는 행동으로 진심을 드러내고, 동시에 자신의 전문가스러움을 연기해 혜경을 진심으로 상처준다.
[무뢰한]은 그러나 장르적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난 뒤에도 이야기를 더 이어간다. [무뢰한]이 그동안 쌓아왔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는 부분도 바로 클라이맥스 이후 에필로그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 두 남녀의 위치는 극도로 달라져 있다. 준길이 사망한 뒤 마약 중독자를 수발하면서 더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혜경과 달리, 재곤은 여전히 형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약중독자를 검거하러 왔을 때 재곤은 자신은 형사이기에 혜경을 속이고 준길을 죽인 것이 자신의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때 혜경은 칼로 찌르는 걸로 대답을 돌려준다. 파국을 맞이한 재곤은 그러나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그 공간을 벗어나 배에 꽃힌 칼을 빼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산동네로 흘러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얼굴이나 표정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음영 속에 보이는 재곤의 실루엣이 욕설과 축복이 뒤섞인 나직한 한마디를 내뱉고 영화는 [무뢰한]이라는 타이틀을 띄운다.
이 결말이야말로 오승욱 감독이 [무뢰한]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혜경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결말에서 더 이상 자신을 치켜세우지도, 당당하게 굴지 않는다. 그럴 여유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혜경 앞에 나타난 남아있는 재곤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고 혜경에게 그때 당시 자신이 전문가스러움을 연기해 혜경을 속였다는 ‘진심’을 고백한다. 그 결과 재곤은 파멸하는데, 경찰이나 사람을 부르지 않고 칼을 빼지 않고 산동네로 가는 그의 행동은 사실상 파멸을 받아들였다는 제스쳐나 다름없다. 그리고 재곤은 서서히 퍼져가는 피를 검푸른 하늘과 어둠에 뒤덮인 채 자신 없이도 ‘살아갈’ 혜경의 생일을 축복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마지막 ‘장소’가 어느 누구도 없는 산동네 골목에 드리운 어둠 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오승욱 감독은 이 이상의 말을 아끼고 그 제스쳐 위에 타이틀을 띄운다. 남에게 서툴고 무뢰하기 그지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연기한 남자의 얘기는 그렇게 적절한 제목을 획득하게 된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장면들을 돌아보면서 왜 저렇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씹어보게 한달까. 그 점에서 [무뢰한]의 결말은 올해의 한국 영화 결말이라고 할만한 묵직함을 지니고 있다. 전도연과 김남길이라는 두 배우의 빛나는 연기를 통해 차곡차곡 느리게 쌓아온 사소한 제스쳐들과 감정들이 두텁고 묵직한 몸체를 만들어낸 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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