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ere/생각

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 이미지와 사유, 보기와 소리

giantroot2015. 7. 8. 13:08

시간 기호는 또한 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인데 사유의 이미지와 독해되어야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정신 기호의 개념을 통해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하는데 이 질문엔 시네마와 사유 간의 관계라던가 이미지가 어떻게 정신을 감화하는가, 정신은 무엇이고 사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담겨 있다. 들뢰즈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이미지를 읽고, 보고, 들어야 하는가를 위시한 몇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고 보그는 보고 있다.

고전적 사유의 이미지

예술사가인 엘리 포르의 시네마 예찬은 진화하는 사회의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시네마는 운동과 지속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카메라의 비인간적인 눈을 통해 지각되지 않은 세계의 특징들을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포르의 시네마에 대한 신념은 기계적으로 생산된 움직이는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정신에 충격을 주고, 비반성적인 정신적 습관의 지적 자동 작용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추긴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이 고전적 시네마의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정신적 자동 기계”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데-스피노자는 정신도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관념들의 고유한 형성과 접속은 물리적 법칙의 필연성과 동등한 필연성을 따라야 한다라고 보고 있다-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반응이 지닌 비자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더 나아가 현대 시네마와 시간-이미지로 전환할 때, 그 용어를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사유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글로 돌아간다.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글에서 개별적인 쇼트들 속에는 충돌과 갈등, 도표의 방향들 척도 부피 크기의 충돌들이 있고, 몽타주 속에는 쇼트들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몽타주 충돌에 의해 생성된 개념은 전체의 개념, 즉 각각의 폭발적인 쇼트들을 결합하는 유기적 전체성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사유에 대한 충격 효과를 가지고, 사유가 전체를 생각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생각하도록 한다.” (IT 206; 158)

 하지만 이미지에서의 사유로의 이런 운동 외에 또한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보완적인 운동이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에서의 파토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감각적 사고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 상호간의 결합적인 친화력을 통한 사유이다. 예술은 논리적 사유를 이미지들과 형상들의 감각적 사고와 조합한다.

 만약 영화의 유기적 전체라는 개념이 개별적인 폭발적인 쇼트들과 쇼트에서 쇼트로의 도약의 파토스에 의해 생성된다면, 전체에 대한 부분들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개별적 부분들은 전체의 실존을 전제한다. 하나의 폭발적인 쇼트로부터 다음의 폭발적 쇼트로의 도약은 파토스를 생성시키고 관객에게 충격을 주입하지만, 이런 형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감각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과정들을 통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두 이미지의 이러한 형상적 결합의 형성과 함께 두 이미지의 감화적인 힘은 증가된다.

 첫 번째 과정은 이미지에서 개념으로의, 부분들에서 전체로의, 충격-파토스에서 사유로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서로 두 이미지의 상호간의 결합을 통해 각 이미지의 감화적 추동력은 증가된다. 두 번째 과정에서 운동은 개념에서 이미지로, 전체에서 부분들로, 감각적 사유에서 배가된 파토스-충격으로 이동하며 발생한다.

 모든 영화는 “우리를 이미지들로부터 의식적 사유로 끌어올리는 감각적 충격”을 포함하고, “그 다음 우리를 다시 이미지로 되돌려 보내고 다시 감화적인 충격을 우리에게 주는 형상을 통한 사유”를 포함하는 회로를 확립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성공적인 영화는 강력한 감정과 비판적 인식의 유기적 통일성 속에서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두 가지 상반된 운동을 혼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영화는 행동을 고취해야 하고, 비평적 인식은 혁명적 의식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들뢰즈는 여기서 이미지와 사유 사이의 세 번째 관계를 보는데,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운동의 관계가 아니라 전자와 후자의 동일성의 관계를 본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대응을 설정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새로운 특질들을 얻고 변하는 걸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이미지의 동일성,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기본이 되는 통일성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결합하는 감화적인 충돌과 도약으로 된 변증법적 시네마를 주창했지만 들뢰즈는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이 고전 시네마에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네마 전체에서 우리는 “탁월한 의식화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전체와의 관계, 이미지들의 무의식적 펼침 속에서만 형상화할수 있는 사유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인간 사이, 자연과 사유 사이의 감각-운동 도식적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외부의 사유

고전 시네마의 사유 이미지에서 중심적인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적인 현존인데, 감각-운동 도식은 사유와 이미지 사이의,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능케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의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가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선호한다. 

 탈접속된 이미지들에 의해 제기되는 분명한 의문은 “어ᄄᅠᇂ게 그것들이 재접속 될 수 있는가?” 인데 고전 시네마에서는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조화, 극성, 대조를 통해 연결된다. 그 안에서 이미지들은 선행하는 이미지와의 일정한 친화성에 따라 다음 이미지를 뒤따른다. 하지만 감각-운동 도식과 함께 이러한 내적 독백은 붕괴되고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간의 틈새는 그 이미지들의 기능이고, 하나의 이미지가 종결하는 지점, 혹은 한 이미지가 시작하는 지점이지만 현대 시네마에서 그 틈새는 근본적이다. 하나의 일정한 이미지와 더불어 현대 시네마의 도전은 시작되고 둘 사이의 틈새를 유발할 다른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는 직접적으로 흑색 스크린과 백색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 틈새는 표준적인 할리우드 편집의 전형을 위반하는 현대 시네마의 거짓 연속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 이미지들과 청각 이미지들 간의 불연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현대 이미지는 자의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속은 상식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틈새, 즉 무리수적 절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이의 간격이라는 개념이 이미지들과 사유 간의 현대적 관련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전적인 사유의 이미지는 개념과 이미지의 동일성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이미지로의 복합적인 운동을 수반한다. 고전 이미지들은 “연합, 근접성, 유사성, 대조 혹은 대립의 법칙들”에 의해 수평축을 따라 연결되는데, 통합하는 감각-운동 도식 속에서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친화성이 내적 독백의 형상적 언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고전 시네마에서 전체는 열린 전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시네마에서는 전체는 외부다. 외부는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 즉 틈 혹은 간격 속에서 표명된다. 들뢰즈의 이런 선언은 외부와 틈새 사이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현대 이미지의 수직축과 수평축을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되어 보일수도 있다고 보그는 설명하면서도 틈새가 현대 이미지의 수평축과 수직축에 공통점이 있다는게 들뢰즈의 요점이라고 설명한다. 즉 슴새는 이미지들을 수평적으로 접속하고, 수직적으로 그것은 외부를 표명한다. ‘외부’는 고전적 전체의 현대적 대응물, 다시 말해 틈 혹은 간격이지만 또한 생성적인 힘으로, 즉 구성적인 “이미들의 둘 가운데”로서 역설적으로 착상된 전체다. 현대적 전체는 “블랑쇼가 ‘외부의 분산’의 힘 혹은 ‘거리 두기의 현기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전체는 틈새 속으로 통과하는 외부의 역량“인 것이다.

 이런 틈새 속으로의 외부의 역량 혹은 힘의 이행은 사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의 충돌은 사유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취하게 하면서 전체를 사고하고 사유에 충격을 준다면 현대 시네마는 사유가 일련의 연접적인 유리수적 좌표 속에 그 충격을 동화시킬 수 없는 채로 그렇게 한다. 현대 시네마가 사유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외부에 대해서, 즉 틈새 속으로 이행하는 분산적인 거리 두기의 힘에 대해서다.

 정신적 자동 기계

“외부의 사유 그 자체” “비사유 혹은 사유 내부의 사유 불가능한 것” “사유자 속의 이질적인 사유자”, 이 모두가 비 개인적이고 탈 실재화된 ‘다른’ 사유, 다시 말해 정신적 자동 기계의 사유를 증명한다. 들뢰즈는 이런 모티프에 대한 확장된 탐험으로서 드레이어의 영화를 해석하면서 미라를 선택한다. 미라와 같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현대 영화에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의 재현이 아니라 사유의 양식으로서의 그것의 활성화이다.

 이때 일견 미라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내부 세계보다 더욱더 내부인 어느 지대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그들은 특정한 화자 혹은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된 언어, 즉 일종의 자유 간접 화법을 언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자유 간접 화법은 현대 시네가 열망하는 일반적인 “자유 간접 비전”의 언어적 상응물이다. 고전 시네마의 상식적인 시퀀스들 속에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내적 독백의 부재는 안정된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되며 생각하기의 다른 방식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대 시네마의 이미지들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생각하기의 이미지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자동장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일단 정신적 자동 기계는 “사유를 넘어서는 사유”라는 점에서 관객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자동장치의 자유 간접 보기와 생각하기는 이미지 속에, 스크린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정신적 자동 기계는 내부와 외부이고, 관객 내부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의 외부 양쪽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지 세계 속에서는 그런 내외부의 분명한 차이가 없을뿐더러 분리되어 확인할 수 있는 정신에 결코 속하지 않는다.

 이미지 세계는 정신적 자동 기계의 뇌 세계이다. 들뢰즈가 현대 이미지의 “두뇌적 구성 요소들”을 열거할 때 그는 단순히 틈새의 세 가지 외관들, 즉 점-절단, 재-연쇄,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이라는 목록을 작성하는데, 그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이 뇌와 스크린의 동일성을 명백하게 만든다. 점-절단, 혹은 무리수적 절단은 외부의 표명으로서의 틈새이다. 그것은 무리수처럼 둘 중 하나에도 속하지 않고 두 실체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무리수적’이다. 재-연쇄는 “그리고”로서의, 차이의 비-자의적이지만 특별히 지정하지 않은 관계들에 따른 이미지들의 수평적인 접속으로서의 틈새이다. 마지막으로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가시적으로 되는 틈새이며 위상적이다. 왜냐하면 그것 속에서 외부와 내부가 통합되기 때문이다.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와 함께 인간과 세계의 결합은 와해된다. 에이젠슈테인의 도식에서 사유와 이미지는 행동-사유에서 통합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궁극적으로 비무관심적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시키는 감각-운동 도식의 부재 속에서 세계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며 세계에 대한 믿음조차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대 시네마의 목표들 중 하나는 세계에 대한, 어떤 다른 세계 혹은 이 세계의 어떤 미래의 유토피아적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현대 영화감독들은 세계와 인간을 과거의 시트들, 현재의 첨점들, 거짓의 역량들의 시간 기호들을 통해 접속한다. 각 영화의 시간 기호들은 일종의 문제를 구성하는데 들뢰즈는 이 문제를 정리와 구별한다. 정리는 공리적인 체계화가 가능한 닫힌 집합의 요소들이고, 문제는 외부에서부터 간섭하는 사건, 그리고 그것에 의해 후속의 분석의 조건이 구성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선택을 모든 문제의 기본적인 요소라 보며 나아가 믿음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자유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각 집합의 시간 기호들은 선택과 관련이 있고, 그 선택의 긍정은 믿음의 행동이다. 그러나 시간 기호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문제들은 아니다. 시간 기호들은 사유와 이미지들 사이에의, 정신과 세계 사이의 접속을 설정하지만, 단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시각을 통해 창안된 접속만을 설정한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대한, 그러나 다르게 보이고 생각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한다.

 만약 우리가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들에 대해 다루는 방법을 요약하려고 한다면 1) 이미지-사유 관계들, 2) 정신 기호들, 3) 정신계, 그리고 4) 정신 기호들과 시간 기호들 사이의 관계로 나눌수 있을 것이다.

 1) 이미지와 사유 관계들: 고전 시네마는 이미지와 사유의 세 가지 관계들을 설정한다. 첫 번째 운동에서 이미지들의 충격은 통합하는 전체의 개념을 생성시키고 두 번째 운동에서 감각적 사고의 내적 독백은 각 이미지가 전제하는 전체로서 역할과 표현으로 출연하며 세 번째 운동에서 세계와 정신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하는 힘을 통해 합쳐진다. 대조적으로 현대 시네마는 사유에 대한 세 가지 새로운 관계들을 발전시킨다.

 2) 두개의 축은 사유의 고전적 이미지를 조직화하며 두 종류의 고전적 정신 기호가 있다. 첫 번째 종류에 따라 이미지들은 유리수적 절단들을 통해 연결되었고, 이런 조건하에서 확장 가능한 세계를 형성했다. 다른 종류의 정신 기호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의 시퀀스들의 적분을 표식하고, 뿐만 아니라 확장된 시퀀스들 속에서의 전체의 미분을 표식했다. 또한 현대 시네마의 정신 기호들은 두 분류로 구분되는데, 정신 기호들로서 비연쇄적 이미지들을 가진다.

 3) 현대 정신 기호들은 단일한 정신계, 세 가지 대뇌적 구성 요소들을 가지는 뇌의 세계를 형성한다. 점-절단은 ‘무리수적’이고 재-연쇄는 ‘확률적’이며,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위상적’이다.

 4) 정신계의 기호들은 또한 시간 기호들이다. 외부의 수직축과는 일반적인 문제로서의 일정한 시간-이미지가 상응한다. 들뢰즈가 연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을 조정하는 고전과 현대 시네마의 방법들을 대조할 때, 그는 “전체가 틈새 안으로 이행하는 외부의 역량이 될 때, 그것은 시간의 비-연대기적 관계들에 따라서 무리수적 점들의 시퀀스와 일치하는 시간 혹은 연속성의 직접적 제시”라고 말한다. 외부의 역량이 틈새 속으로 이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 연대기적 시간의 주어진 형식의 설명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하며, 혹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문제라는 사건이다. 그리고 틈새들의 재연쇄는 파손된 연대기적 시간의 분산된 점들을 상호간의 소통 속에 설정하는 역설적인 연속성이다. 

 무언의 가독 기호와 가청적 가독 기호

 모든 시간 기호는 정신 기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독 기호이다. 들뢰즈가 가독 기호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모호하다고 보고 있다. 그 용어는 ‘’표현 가능한‘ 것의 비유형성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용어인 렉톤에서 차용한 것이다. 하나의 명제의 렉톤이 그것의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가독 기호는 추정상 외부적 대상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내재적으로 파악될 때의 이미지를 지칭한다. 이미지를 내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시지각 기호로, 즉 감각-운동 도식과 그것의 외부적 결합들로부터 탈접속된 이미지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들뢰즈가 이미지를 읽어야만 한다고 말할 때 이미지 해석 뿐만이 아니라 보기와 소리의 내적 관계를 통해 생산된 시간-이미지의 차원 혹은 역량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가독 기호’는 이미지가 렉톤처럼 그것의 외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보기와 소리에 대한 그것의 내적 관계들에 의해 독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고전 시네마에 가독 기호가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 고전 가독 기호에 대해 무성 영화의 자막과 유성 영화의 소리와 연계시켜 보고 있다. 무성 영화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세계의 자연성의 무엇인가를 보유하는데 그 자연성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으로서, 상호 작용하는 힘들간의 물질적인 접속들의 영역으로서 그것의 물리적 존재에 의해 특성화된다. 단어는 자막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들 속에서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무성 영화들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보여지고 읽혀지는데,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자연성을 보유하고, 화법은 간접적 양식으로 그 자체를 표명하게 된다.

 이렇게 구축되어왔던 자막과 시각적 이미지의 세계는 유성 영화의 음향의 출현과 함께 달라졌다. 발화를 들을 뿐만 아니라 읽게 된 것이다.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구성 요소”가 되며 시각적 이미지는 어느정도 탈자연화된다. 무성 영화에서 언어는 행동에 종속적이며 구두 교환은 간접적으로 결과적인 상황까지 이동하는 행동을 통해 단지 암시될 뿐이다. 하지만 유성 영화에서는 화법의 특유한 특징인 사회성과 인간적 상호 작용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단계에서 화법은 전제 조건적인 정황들과 결과적인 상황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유한 리듬과 형식을 가진다.

 이런 화법적인 사회성의 모델은 상호 교환, 화제 개시, 그리고 교환 종결을 위한 제한 없는 규칙들을 가지는 대화, 때로는 논리적으로 서로 연관되고 서로 연관되고 또 어떤 때는 서로 아무런 분명한 관련이 없는 자유-형식의 연속적인 토픽들을 가지는 대화이다. 영화에서 음향의 도입과 함꼐, 대화와 같은 그러한 기초적인 사회성의 형식은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더 이상 발화는 선행하는 조건들과 후속 결과들의 간접적인 기능으로서만 표현되지 않는다. 지금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닌다. 결과적으로 발화 행동은 “자율적인 순환, 확대, 그리고 진전을 통해, 상화간에 냉담하거나 분산되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간에, 개인들 혹은 그룹들 간의 상호작용을 창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시각적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의 의도들, 동기들, 암시들의 시각적 기호들은 그들의 얼굴들과 몸짓들 속에 독해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음향의 도래와 더불어 인물들은 거짓말할수 있고, 속일 수 있고, 왜곡할 수 있으며, 잘못 말할 수 있고, 빗대어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를 카메라가 잡히지 않는 곳에서의 음성으로 팽창하고, 주변 환경의 소음은 프레임 너머로 그리고 화면 밖 영역으로의 공간의 연속을 나타낸다. 

 들뢰즈에 따르면 음악은 열린 전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전 운동-이미지에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는 한편으로 소리 연속체는 시각 이미지를,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에 대화, 음향 효과, 음악을 포함하는 연속체를 수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은 ‘이질적인 신체’의 ‘특수한 자율적인 역량’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는 기능 면에서 화면 위 장면의 음향적 구성 요소에서부터 영화의 리듬들에 대한 조화로운 강화를 거쳐, 자율적인 ‘이질적 신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친 가능한 영역들의 전영역을 포괄한다. 이런 관계들의 연속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열린 전체와 개별적 이미지들을 연관시키는 접는 적분과 펼치는 미분의 표현적 상호 작용에 음악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은 시각적 운동-이미지와는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운동-이미지와 달리 음악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즉각적 이미지 속에서 열린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시각적 이미지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이고 음악적이며, 운동보다 측량할 수 없는 의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음악의 추상적이면서도 지각 가능한 “즉각적 이미지”는 열린 전체의 직접적인 제시인데, 그 자격으로 그것은 하나의 자율적 실체로서 시각적 이미지들과 반응하고, 그 이미지들을 반향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공통된 구조와도 무관하게” 그 이미지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현대의 가독 기호

 따라서 무성 영화에서 발화는 삽입 자막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화법은 언제나 간접적이다. 고전 유성 영화에서 화법은 직접적이고, 시각적 이미지에 기여하는 구성 요소가 된다. 무성 영화들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것의 자연성을, 그 결과로 읽혀져야 하는 것이 된다. 고전 유성 영화는 음악 속에서 잠재태적으로 자율적인 요소, 즉 전체와 일치하지 않고 그 전체에 대한 간접적인 시각적 제시를 동반하는 직접적인 음향적 제시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런 자율성은 오직 상대적인데 음악은 시각 이미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오직 현대 시네마에서만 시각과 음향은 자율적인 요소들이 된다. 그런 시네마에서 화법은 직접적이지도 또한 간접적이지도 않으며, 자유 간접적이다.

 현대 감독들이 자유 간접 화법을 창안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시네마의 자유 간접 화법은 순수 발화 행동이고, 표준 어구로부터 그리고 상식적인 세계의 시각적 이미지들과의 연쇄로부터 ‘탈연쇄한’ 화법이다. 동시에 화법이 고립적으로 되고, 그것의 일상적인 가시적 좌표들로부터 분리될 때 시각적 이미지는 고유한 낯섦에 도달한다.

 현대 시각적 이미지들과 소리 이미지들은 ‘읽혀져야만’ 하는데, 표준적인 맥락들로부터 벗어나고 탈접속된 이 이미지들이, 일정한 이미지들의 출현에 앞서서는 예상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재접속되고 재연쇄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들뢰즈는 현대 시각적 이미지의 “고고학적, 층위학적, 구조학적인” 본성을 풍경의 감각을 물질화하면서 생기는 거라 보면서 진부한 시각적 표현들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창안하고, 그것에 의해 “지질학적 지질구조학적 역량”에 의해 구체화한 이미지들 속에서 감각을 물질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현대 시각적 이미지가 감각을 물질화하는, 그리고 다른 이미지들과 다양한 재연쇄화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층화된 힘들의 지대라는 점에서 그것은 고고학적 층위학적 지질구조학적이다. 그리고 각 이미지의 접속은 관객이 이미지들의 특정한 계열 속에서 현실태화 하는 재연쇄화에 의해 이미지들을 읽도록 한다. 시각과 언어의 분리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지질학적 층 혹은 토대들을 드러내는 반면, 발화 행동 혹은 심지어 음악의 동작은 영묘한 창시자의 역할을 지니게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무리수적 절단의 틈새들을 통해 재연쇄화되고, 음향 역시 이러한 절들과 관계가 있다.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은 언제나 하나의 극한, 즉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이 보는 것, 그리고 이미지들의 재연쇄화가 가시화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마찬가지로 순수 발화 행동의 자유 간접 화법은 통레적인 코드들이 분절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이야기 꾸미기는 되기이고, 극한을 넘어서는 변형적인 운동이다. 그것은 음성학 통사론 의미론과 같은 언어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변주 속에 설정하는 언어의 용례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 속에서 비전은 “지가시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오직 보여질수 있는 극한으로 이르게 된다.”

 비전과 발화는 내부적으로 한정된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또한 그 둘 사이의 극한, 즉 보기가 말하기와 다른, 그리고 말하기가 보기와 다른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그 극한은 두 가지를 분리하지만 그렇게 행할 때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맹인, 티레시아스적인 비전과 실어증 환자 혹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그것인 목소리 사이엔 통약 가능성은 없고 오로지 둘 사이에는 상보성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보적인 관계를 비 자의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 영화가 하나의 특정한 문제 혹은 하나의 집합적 문제에 중심을 두는 것, 즉 시각적 이미지들의 재연쇄화, 발화 행동의 재연쇄화, 그리고 둘 사이의 재연쇄하는 통래를 생산하는 생성적인 차이이다. 

 만약 고전 시네마에서 소리 연속체가 화면 위의 사건들, 화면 밖 영역의 음향 그리고 반사적인 보이스-오버와 음악의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을 접속한다면, 그 연속체는 현대 시네마에서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 현대 시네마들에서 발화 행동의 생소함은 말하기를 흥얼거리기 혹은 노래하기의 음악적 차원으로, 혹은 형성되지 않은 음향과 소음의 소리 영역으로 이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발화의 분리가 단지 시각과 모든 소리의 보다 더 큰 분리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을것인데, 모든 현대 영화가 화면 이미지들의 시각적인 영화와 발화 음악 소음의 소리적 연속체에서 형성된 소리의 음향적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가독 기호들은 음향과 시각의 이접의 역량을 개발하는데 이는 둘 사이의 생성적인 이접으로부터 발생하는, 상보적이고 전체화할 수 없고 비대칭적인 통래 속에서 다시 속박되어야 한다.

 시네마, 연극, 텔레비전에 관한 각서

 연극과 텔레비전은 시네마와 분명한 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매체인데, 들뢰즈는 보기와 소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연극과 텔레비전을 상호 비교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바로 대화를 포착하는 방법이다. 시네마는 연극 무대에서는 이용할수 없는 방식들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말을 제시하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고 화면 밖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카메라 쇼트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향 효과를 통해 주위 공간을 연장해 대화의 공기를 보여주거나 통합시킨다.

 한편 영화와 텔레비전은 훨씬 미묘한 관계라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는 그것의 청각적 시각적 구성 요소들의 분리 가능성이라 본다. 들뢰즈는 텔레비전의 발달이 현대 시네마의 자율적인 요소들로서 소리와 보기를 처리하는 법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텔레비전 이미지는 전자 이미지이고, 진정한 화면 밖 영역을 가지지 않지만 대신에 그것들을 회전시키는 역량과 같이, 가역적이고 이중으로 인화가 불가능한 오른쪽 면과 반대쪽 면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영속적인 재조직화의 대상인데, 그것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는 선행하는 이미지의 어떤 지점에서든지 그 지점에서 발생할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와 현대 시네마 이미지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위시한 정보 기술은 창조성을 위한 가능성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제공하지만 시네마적인 관심은 최종적으로 감독들을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술보다는 미학에 의존한다. 즉 텔레비전은 그 특성으로 시네마에게 창조적인 자극을 가하지만 시네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의 ‘성격’을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깊은 차이가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