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부치 고이치의 [전지구적 프리즘: 트랜스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 문화 교류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의 문화 교류의 폭발적인 증진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대중 문화는 동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들 속에 일본의 미디어들의 반응과 달리 이와부치는 역사적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국수적인 시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화를 촉진하는 대중 문화의 잠재력을 쉽게 무시하면 안되지만 동시에 그 대중문화가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고 단순화되어서 수용되서도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수출은 전지구화가 가속되었던 시기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이는 단순히 미국화를 넘어서 전지구화와 문화권력의 탈중심화라는 점에서 독특한 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와부치는 이런 권력의 탈중심화로써 비서구 국가들의 다국적 기업의 출현을 든다. 미국의 자리를 차지한다기보다는 미국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차이를 육성하면서 ‘균질화의 특정한 형식’을 만들어냈는데, 이 균질화는 결국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유행은 그런 점에서 미국 문화의 상상계에 깊이 각인된 대중문화의 한 형식을 빌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부치의 논의는 특정한 문화적 의미들과 감정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대중 문화를 통해 재현되는 젊은이의 고뇌, 꿈, 로맨스는 특정 양식과 현재적 근대의 의미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그 양식과 의미는 일본적 맥락에서 지구적인 균질화와 이질화가 서로 뒤섞인 구성을 분명하게 결합한다. 그렇기에 일본의 대중문화는 다른 동아시아 문화들과 달리,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며 이는 대만 시청자들에 미국 TV 드라마와 일본 TV 드라마에 대한 의견으로도 잘 드러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이런 전지구화와 문화적 근접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전략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먼저 문화적 근접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는게 중요하다. 경제 발전의 일정한 수준을 획득했던 자본주의 사회 국민들의 공통적인 경험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우호적인 수용을 지지하는 동시성을 생기게 했다. 따라서 문화적 근접성의 경험은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지를 묘사하는 역동적인 것, 다시 말해 시간적 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80년대 서구권의 일본 붐과 달리 동아시아의 일본 붐은 동아시아의 경제적 발전과 그에 따른 문화적 생산 능력의 증진과 관계가 있다.
두 번쨰로 일본이라는 무대 안에서 일본의 대중문화는 미국 문화의 자장 안에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지구화된 소비 대중 문화의 핵심 형태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표출된다. 전 지구화는 서구의 근대적 세계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고, 미국에서 구성된 근대성의 영향은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근대적 경험이 강제된 비서구 국가들은 토착화된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식들을 만들어왔고 이는 같으면서 다른 복잡한 인식을 만들어왔다. 이런 같으면서 다른 문화적인 인식은 아시아 시청자들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느끼는 복합적인 인식과 동일하며 이는 일본 대중문화를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부치는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를 대만에서 만들어낸 [유성화원]과 [도쿄 러브 스토리]가 한국 드라마 제작에 끼친 영향과 이로 인해 탄생하게 된 한류 열풍을 들면서 새로운 문화적 유대가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부치는 이런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아시아 대중들의 복합적인 문화 인식의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일본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구조적인 불평등이라는 어두운 면도 낳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슨 트랜스적 흐름과 연결들이 탈식민 정치와 다중문화적 정치학과 반드시 교차하고 있는게 아니라, 외려 소수자가 사는 사회에서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는 방법에도 무관심할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지구화한 소비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에 특정 그룹을 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들과 자본의 권력은 기본적인 소비주의 교의와 조화하면서 국가적 틀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한편, 다수가 아닌 행운의 몇몇에게만 이익을 준다.
글의 결론에서 이와부치는 ‘진부한 세계주의’의 시대에 필요한 대화체적 상상력을 글로벌리제이션 과정에 생긴 사회 간이나 사회 내부의 다양한 모순들과 연동하게 해야 하면서 대중문화를 통해 위장된 경계를 가로지르는 교섭의 중요성을 수용하고 세상을 진짜로 다르게 만들기 위해 다중면을 가진 교섭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협동적인 트랜스 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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