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큐빗의 'The Cinematic Effect' 일부분을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The Cinematic Event
영화적 사건의 시간은 분산된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구성의 분열은 시간의 분산을 생산하고 있으며, 빛에 민감한 은염의 난반사되어 흩뿌려짐과 단속적 시선에 모두 걸릴 수 없다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참석하지만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움직임을 경고하고 있다.
영화의 첫 순간에는, 분석적인 눈이 빛의 작은 구멍과 작은 구멍, 절반정도 보이는 움직임을 주변부처럼 주변 인식을 흐리게 하며, 그 세부는 탈출하지만 순수한 운동처럼 존속을 도약하게 한다.
영화적 이미지는 의미에서 동일하지 않은 프레임 속의 각각의 사건이 시간에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각 표상으로 단편적이며, 때문에 각각의 투사의 사건은 초점 맞추기와 한계 이미지의 새로운 조립을 불러 일으킨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동시에 움직임, 한순간, 그리고 산만한 시선, 미세 광학 구분의 궤적 모두 포함하고 있다.
매력으로써 시네마토그래프는 19 세기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도시 문화에 속한다. 도시들을 향한 인구 흡수가 의 상태에 대한 이유를 소통을 경제적 혹은 경관을 중심에 맞춘 것처럼, 모두 영향과 이유가 되었다. 도시의 매력은 특히 스펙터클의 사회적 존재가 되었던 19 세기의 마지막 10 년 동안의 주요한 에너지였다. 이런 사회는 다시 같은 유행을 타는 산보자와 소통 할뿐만 아니라 전달 될 소비자로 개별화하기 위해선 대량의 인구가 필요하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여유 있는 최신 유형, 움직임 등 소비자의 본 발명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런 매력과 힘들은 노동자들이 초췌한 집으로 돌아오거나, 닭을 키우거나, 그들의 작은 지분, 터무니없는 양말, 야채를 재배하는 같은 순간들이 실종된 것에서 비롯된다. 농민 경제의 자급자족의 잔여는 카메라의 돌림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현대의 리옹, 프랑스에서 여기있는 사람들 모두는, 찍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드보르가 주장한 것처럼, 소비자가 된다는 건, 우리가 소비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소통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소통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이 초상화를 민주화 하면, 모두가 극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비전은 형성 과정에서 기계적 지각과 함께 동기화된다.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가 하나의 장치로 설계된 것은, 시네마토그래프는 현 단계에서 가시적인 표현을 위한 도구에 있었으며 따라서 뿌리깊은 군중의 가시성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계측기로써 만들어졌다. 한편 마리의 전통은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하기 위한 이벤트의 분석을 위한 영화의 과학적 사용을 인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메를로퐁티의 낙관적인 현상학과 감시의 푸코의 비관적인 이론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범투시의 영역를 만든다. 이 "객관적인" 비전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시네마토그래프는 "인식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 관객을 제시했다. 하나는 지각 자체의 파편화된 개체, 다른 하나는 지각 그 자체로 말이다. Marey 전통에서, 시각의 분석은 개체의 세계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인간과 기계 지각은, 기계에 의해 재구성된 인간, 그것의 실현을 위해 새로이 편심된 인간의 감각 기관의 기계적인 의존에 상호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필수적인 인간-기계 인식의 가능성을 만드는 동안, 시네마토그래프도 버치와 바쟁에 의해 정밀한 불멸의 신화를 생성한다. 그런 반응에 우리는 러시아에서 첫 시네마토그래프회에 참석한 고리키가 남긴 감상문에서 그림자, 유령, 그리고 유골의 무성과 무색의 영역에 대해 언급한, 잘 알려진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리키는 영화의 장소와 외설적 미래의 부도덕함을 혹평했던 것처럼, 꿈에 대한 첫 번째 시간적 시스템과 영화의 감각 역시 예지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잊고 있다. 이상한 상상은 당신의 마음을 공격하고 의식은 약해지고 희미해져 가기 시작한다 ...."
그 순간에, 시네마토그래프의 표상적인 힘은 질문을 받게 된다; 개체와 대상은 영화에게 인간과 기계 고유의 인식 영역을 제공받음과 동시에 용해된 전망 속에 용해된다. 분석적인, Marey 전통은, 인지 또는 인식의 과정보다는 "차이에 종속된 동일의 개념적인 형태를 의미" "재인지"에 대해 주장한 길 들뢰즈가 주장한 의미에서 표현적이다. 한편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우리는 Vaughan이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발견했던 대상 및 주제 영역 모두에서 정체성의 상실의 가능성과 자기 표현의 손실과 함께 인식의 모든 순간의 고유성의 감각을 얻음에 직면하게 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모든 개체, 모든 일이, 차이 속에서 삼켜지고 자신의 정체성, 각각의 차이 사이의 차이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는 다름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현대 미술은 이러한 조건을 실현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변형과 치환의 진정한 대가가 된다.’”
고르키의 오몽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시 연구에서 밝혀지 것처럼, 차이의 확산은 의식의 퇴색과 생각이 다름에 속하는 것으로 경험됨이 발생하는 산만한 상태를 제공한다. 이 산만한 시선, 동일하지 않음의 깜박거림에 매료된 관객을 유도했던 최면적인 황홀경이란 현상은 여전히 텔레비전, 콘솔 게임 및 인터넷에 대한 비판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의 출현은, 조나단 Crary가 주장했던, 순수하고 세심한 의식에서부터 소설의 분리가 아니다. 반대로 산만함은 주의력을 고정하려고 하는 시네마토그래프처럼 정밀하게 그 고안되어 있다.: “산만함을 19세기 후반의 문제로 보려고 하면 세심한 관찰자의 병렬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 세심함을 생성하도록 구성 된 조각화은 또한 꿈꾸는 듯한 황홀경을 생성한다.
황홀경은 시간 속에서 구성된 영원한 형식이다. 이 모순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를 집중하게 한다: 시작과 중단의 문제. Elsaesser는 "항구를 떠나는 배"의 릴 프레임에 의한 갑작스러운 끝뿐만 아니라 구성된 서스펜스의 순간을 닫는 프레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남자를 본다. 하지만 이야기의 긴장감은 다음에 일어날 것에 대한 우려를 생성하는 반면, 산만한 시청자에게는 액션이 중단 이유에 대한 표현의 동기나 어떠한 신호없이 찾아오는 서스펜스에 대한 정지 경험의 총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처음의 영향은 비교적 용이하게 카메라와 프로젝터 모두 제어된다. 그러나 필름스트립의 끝은 대부분 분명히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뿐만 아니라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듯이 액션의 끝의 효용성이 아니다. 그런 다음, 뭐가 문제인지는 결말의 긴장감 다음에 무슨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지금 벌어졌다, 다.
그 경험의 전부는 어땠는가? 고르키에겐 경험은 빛이 “나갔을 때“ 시작된다: 어둠을 제외한 움직이는 이미지는 존재의 정적에서 움직임이 되어감에서 빛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각각의 프레임은 프레임 라인이 렌즈 앞에 구멍을 가로 질러 이동하는 동안은 프로젝터의 빛을 차단하는 셔터의 움직임에 의해 중복 되어, 두 번 노출된다. 그래서 프레임라인은, 두 배로 보이지 않는, 환등기의 반복되는 꺼짐 뒤에 숨겨진 어둠이다. 사진 이미지와 1895년과 1896 년 뤼미에르의 쇼 시작 부분에 상영된 싱글 프레임은 빛에 민감한 분자들의 임의적으로 튄 자국이다. 스틸 이미지는 래스터 이미지의 발명 전까지는 격자 이미지가 없었으며, 그 발명은 일반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레이더 모니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는, 뤼미에르 시네마토그래프의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 렌즈의 전면 프레임의 정확한 촬영에 종속되어 격자 이미지로서 삶을 시작한다.
프레임라인은 과거와 현재, 네거티브와 영화 운동의 순간을 나타나도록 구별한 프레임에서 프레임을 분리하며, 현재를 그들의 순수한 차이처럼 영화적 순간으로 구분한다.
하나의 축이 시간을 표시하는 그래프에서 원점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것도 그렇다고 그 구별도 아닌, 0으로 표시된다. 우리는 이미지를 수학적으로 부호화 된 시대를 다시 돌아보고,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더 이상 수학에 대한 문외한으로 남지 않으며, 영화적 현재와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프레임은 보이지 않도록 머무르는 프레임라인에 대한 분리 대신, 공간적이며, 일시적이지 않은 중대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픽셀로 간주 될 수 있다.
0이란 관계나 수량이 아니다. 우리는 “4” 자체를 4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0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반면에 0은 형용사로서 사용할 수 있다:“숫자 0은, 그렇기에, 모든 개념들이 예시화되는 것의 부정의 연장선상으로서 확인될 수 있다.”(Zalta, 2000)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명사로서 0 자체는 예시화의 실패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 어떠한 것도 ‘자신 이외에는 특징적이지 않은’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지 않기에, 나는 0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0이란 그 자신 이외에는 동일하지 않다는 개념에 속해있다”(Frege 1974: 87) 동일하지 않음이라는 개념은 0의 내부적인 다름, 차별성이라는 특질을 드러낸다. 0은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관계’인데, 이는 그자체로 언제라도 비동질적인, 차별성인 것이기 때문이다. 0은 행동한다,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봐야하는데 그 자치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또한 0은 다른 정수들(1,2,3,4...)과의 관계속에서 행동하는데, 이는 그 정수들의 반대 존재가 바로 0이기 때문이다. 그 아무것도 영화의 시작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0은 이미지-차이점들, 환경이나 지지기반들, 그리고 분명한 행위를 유발하는 기제들-가 시작되기 전의 비동일함(비특질적인), 혹은 움직이지 않은 것의 불안정성들(현재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될것인가 사이에서 발생하는)이다. 0은 좌표공간에 있어서 원점, 모든 좌표의 축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원점으로서, 0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이는 차이의 척도로서의 특권이다. 점묘화 방식으로 구성된 이미지에서, 원점-(0,0)으로 표시되는-은 스크린 맨 위 왼쪽에 위치하며, 이를 통해서 컴퓨터 화면상의 모든 화소들은 그 지점을 원점으로 삼아 자신의 좌표를 끌어낸다. 각각 5 픽셀 단위 좌표들은 0이란 구별불가능한 차이점(비어있는 좌표인 0,0)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있느냐에 따라서 상징화된다. 그리고 최초의 ‘차이점’으로서 이 텅 비어있는 좌표이자 기원인 (0,0)은 필수적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것의 불안정한 속성의 결과는 끊임없는 움직임의 기원으로서 작용한다.
0은 또한 최저선이자, 14세기 복식 부기의 발명 이후로 모든 회계장부의 총합으로서 기능해왔다. 빛과 신용의 관계 사이에서(낙천주의자의 행복으로), 0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평등이었다. 이는 단순한 돈의 부재가 아닌, 지출과 소비가 일치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열역학 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도 0은 똑같은 지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하나의 안정된 시스템으로서, 시간에 걸쳐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모든 총합과 총손실은 원 에너지의 0의 총합인 것이며, 만들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에너지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0의 개념은 20세기 세속주의를 특징짓는, “끝내주는 것과 소름끼치는 것들은 더 이상 가장 완벽한 존재의 외피를 뒤집어 쓰지 않는다;그 대신에 공허를 향한 믿음으로서, 우리의 패배를 위한 열망으로써 작용한다. 부정적인 이론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영화에 있어서 숫자 0은 비어있거나 비활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다:모든 행위의 총합. 이러한 0의 개념은 원점으로서의 0의 개념을 보완한다. 역학적인 평등으로서의 최종 결과물이자 보존물인 0과 모든 좌표평면의 원점으로서의 0개념이 혼합되면서, 0은 모든 평등계와 함께 데카르트적 사상 영역에 그 존재를 확장한다. 그렇기에 0은 행위가 일어나는 지점의 순수한 관계적인 지점인 것이다. 원점으로서의 0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좌표평면에서의 표현은 모두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복식부기에 있어서 0에서부터, 그리고 0으로부터의 방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영화 제작을 향한 어떠한 현금의 흐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질적인 프레임들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는 영사 슬라이드의 보이지 않으며, 인지불가능한 계속됨이란, 그럼으로 역설적인 지점에서, 차이의 계속됨, 0이란 공허가 아닌 모든 다름의 총합임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차원으로서, 0이란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하나의 ‘동사’이다. 간헐적인 이미지의 깜빡임이 행위를 구성하지 않는 지점들을 제외한 아무 가치 없는 행위. 버릴리오는 우리가 신의 0의 시간으로부터 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였다:“신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건들의 경관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어떠한 것을 이어받지 아니한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Virilio, 1996, 9) 이 동시성은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통시성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특히 겔러리에서, 하얀 라이트박스에 위치한 영사 슬라이드에 걸려서 전시된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란, 움직이는 이미지란 현존하지 않지만-반면 영사 슬라이드는 실존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영사 중에서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동시에 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희생함으로서 그것이 현존하게 된다. 버릴리오의 신은 필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영사 슬라이드를 인지할 뿐이다. 성스러우면서 변함없는 현실로서, 라이트 박스를 통해서 보여지는 영화 필름의 테두리는 오로지 존재할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의 전시는 박물관에 박제된 나비와도 같다;사랑스럽지만, 그것은 죽어 있다. 성스러운 현존에서, 그들의 시간은 정지해있으며 동시에 0은 공허가 된다. 그러나 0의 시간은, 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모든 시대에 동시에 현존하는 듯하지만, 하나의 신은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원리이다. 그리고 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의 존재가 불완전하고 타자화된 존재들만이, 오로지 객체가 된 자들만이, 다른 의미로는 비구분적인 것이, 그것이 바로 0이다, 그리고 그 0만이 시간 속에서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수 있다.
영화의 시간을 만드는 필름 테두리의 0의 시간은 인간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별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를 성스러움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은 성스러움 자체가 스스로 자체 충족 가능하다는 점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기는 하지만-솔직히 우리는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와 그 표현 사이의 내적인 차이를 찾아내지 못하는데-이 불안정한 전체성과 평등함의 부재는 우리를 집에 혼자 묶어두지 않게 하며, 우리를 사회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초기 순간들은 이런 지점들에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정지되어 있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뤼미에르 시절의 영화들은, 모든 이미지들은 고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이미지를 이용해서 비구분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였다. 정적인 사진의 이미지들을 원용하기 보다는, 영화는 자기 자신으로 완결된 하나의 이미지의 원용을-콜드리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영화가 왜 영화인가? 라는 지점들이 여기서 드러난다-끝낸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항상 다르다.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불안정성은, 인간의 자율성으로부터 얻어낸 테크놀로지의 성취이며 동일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객체성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영화의 발명 이후로 몇십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통치적인 개념과 의사소통 네트워크의 종결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관계적인 원칙-기술에서 이미지, 이미지에서 이미지, 객체에서 객체, 이미지에서 객체, 객체에서 테크놀로지-이 모든 영화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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