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2014)

giantroot2015. 2. 1. 00:27



맵 투 더 스타 (2014)

Maps to the Stars 
6.1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줄리안 무어, 미아 와시코브스카, 사라 가돈, 존 쿠색, 로버트 패틴슨
정보
미스터리, 스릴러 | 캐나다, 미국, 독일, 프랑스 | 112 분 | 2014-12-25
다운로드


헐리우드를 다루고 있는 미국 영화는 이미 많이 나왔다. 그 유명한 [스타 탄생], [선셋 대로]라던가 [이브의 모든 것] 같은 걸작들이 있었고 최근으로 가면 [플레이어]라던가 [헐리우드 엔딩] 등등이 있다. 어느쪽이든 이 화려한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멜로드라마거나 건조한 풍자극이였다. 화려함에 빠진 사람들의 과잉된 감정을 그리거나 아니면 그 화려함에서 한 발 떨어져 조롱하거나. [코스모폴리스]에서 자본주의의 지옥도를 유랑하던 크로넨버그가 [맵 투 더 스타]에서 도착한 곳은 바로 헐리우드다.

영화의 시작이 한 인물의 '도착'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전작 [코스모폴리스]를 파멸 직전의 영원한 방황으로 마무리했던 크로넨버그는 [맵 투 더 스타]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꿀맛을 대변하는 헐리우드를 한 인물의 종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온  인물, 애거서는 화상을 입은 소녀다. 어디서 왔냐는 리무진 기사 제롬(재미있게도 이 역은 [코스모폴리스]에서 리무진을 타며 유랑하던 에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에게 돌아간다)의 대답에 애거서는 '목성'이라고 대답한다. 목성의 영어명이 제우스의 이름에서 왔다는걸 생각해보면 이 생뚱맞은 애거서의 대답은 영화 제목 '별을 향한 지도'와 연관됨과 동시에 이야기가 신화적인 메타포를 가지고 진행될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것이다. 크로넨버그는 이 두 사람이 대화할때 컷과 시선을 서로 마주보지 않게 배치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있다는걸 보여준다. 그게 어떤 영역인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렇게 애거서가 도착한 헐리우드는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과거의 망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인물들이 모여서 화려하지만 썩어가는 삶을 구가하는 곳이다. 우리는 두 스타를 중심으로 헐리우드에 모여든 군상을 보게 된다. 먼저 아역 스타인 벤지가 있다. 거만하게 자신의 스타성을 과시하며 살아가는 벤지는 그러나 실상은 약물 중독에 빠져서 서서히 가치가 하락하면서 엑스트라 소년에게도 질투를 불태우는 불안정한 정신상태의 소유자다. 또 한쪽에 있는 하바나는 늙은 퇴물 스타다. 어머니 클라리스로 대표되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면서도 어머니에게 강간당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하바나는 여러모로 떠오르는 벤지하고 다른 존재다. 그러나 자신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하바나는 여러모로 벤지의 거울쌍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남자-여자, 소년-성인 여성) 이 거울쌍 관계는 이후 맵 투 더 스타의 전개와 미적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애거서의 도착은 곧 화약고의 심지에 불을 던져놓은 꼴이 된다. 지저분한 화상을 크게 가리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애거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거서의 '소박한 당당함'은 헐리우드의 화려함 아래에 묻혀있는 지저분함을 드러내는 불꽃이 된다. 그렇기에 애거서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팜 파탈이 된다. 애거서의 도착 다음에 등장하는 벤지의 첫 등장 시퀀스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벤지는 병으로 죽어가는 소녀 캐미에게 병문안을 간다. 이 병들어 죽어가는 캐미의 모습은 분장부터 시작해 퀭한 눈빛 등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우리가 크로넨버그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병의 이미지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그런 캐미에게 벤지는 여러가지 호의를  베풀어주겠노라고 입발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캐미에게 '에이즈에 걸렸냐'라고 물어본다. 소녀는 어이없다듯이 자신은 매우 희귀한 병에 걸렸다고 대답한다. 감독과 각본가의 악의마저 느껴지는 이 시퀀스는 표면적으로는 헐리우드 스타에 대한 풍자기도 하지만, 이후 캐미가 사망하고 벤지의 환영으로 등장하면서 좀 더 복합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 이 소녀는 매우 크로넨버그적으로 이미지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지는 단초기도 하다.

[맵 투 더 스타]의 이런 병에 대한 이미지는 종종 매우 지저분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바로 똥에 대한 문제다. 의외로 [맵 투 더 스타]는 똥과 오줌에 대한 대화가 인물들 입에서 자주 오르며 (벤지는 자신의 똥을 팔아버린 한 사생팬에 대해 동료 배우랑 잡담을 나눈다.) 심지어 하바나는 설사로 변기에 앉아서 방귀까지 끼며 애거서를 부려먹는, 배우로써는 보여주기 싫은 꼴불견도 보여준다. 하지만 크로넨버그와 훌륭하게 캐스팅된 배우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이 직설적이고 지저분한 이미지와 대사들을 어떤 망설임이나 쭈뻣거림 없이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대화는 단순한 화장실 유머가 아닌 스타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지저분함에 대한 상징으로 작동하게 된다. 병균과 지저분함이 스타 이미지와 결합되어 상품화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를 흥미롭게 보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실제로 두 영화에는  사라 게이던이 스타 이미지를 병적으로 확대생산하는 스타로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아직 장르 문법에서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을 탐구하고 있다면,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후기작들이 그렇듯이 은밀한 방식으로 이 화두를 다루고 있다. [맵 투 더 스타]는 그래도 [데인저러스 메소드]나 [코스모폴리스]보다는 훨씬 그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을 찾아보기 쉬운 편이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이 글 초반에 헐리우드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과잉된 멜로드라마나 건조한 풍자로 간다고 언급했다는걸 생각해보자. [맵 투 더 스타]가 두 전략을 모두 취하고 있다는걸 떠올리면 간단하다. 바로 과잉된 멜로드라마에서 이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이 등장한다. [맵 투 더 스타]는 이미지의 변이와 재생산, 돌출에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인 근친상간을 끌여들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초반에 이미 드러난 하바나의 근친상간적 강간 (사실 이 강간은 누가 주체가 되었는지 조차도 모호하다. 세상은 하바나의 말에 따라 엄마인 클라리스가 하바나를 강간했다고 믿지만 클라리스가 지적하듯이 새 아버지가 하바나를 강간했는데 트라우마로 책임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벤지와 애거서 사이에 있었던 일이 뭔지를 알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모대에서 시작한 어처구니 없는 우연과 감정의 끌림으로 발생한 장엄한 가족 비극이자 막장 드라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에게 다시 끌렸다가 파괴되어간다.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애거서와 제롬의 분리된듯한 미장센 내 배치도 제롬이 '근친상간'의 자식이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바나와 제롬이 만나 섹스하는 장면도 자세히 보면 섹스를 하기 전까지 하바나와 제롬이 미장센 내에서 분리되서 그려지고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근친상간이 인물간의 관계가 아니라 영화 내 이미지 생산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벤지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프랜차이즈의 후속작에 출연하기로 한다. 마약에 중독되어 사고만 치고 다니던 벤지의 재기작이 새로운 영화도 아니고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벤지가 아닌 척 해도 그 근친상간적인 프랜차이즈 후속작에 얼마나 집착하고 의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하다. 가장 흥미로운 대사가 엑스트라 소년에게 돌아가자 벤지는 미쳐서 그 소년을 공격하러 든다. 한편 하바나도 그 근친상간적인 이미지 재생산 과정에 중독되어 있다. 하바나가 가장 원하는 것은 클라리스가 출연했던 영화의 리메이크에 자신이 클라리스가 맡았던 역으로 출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 하바나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 하바나는 아주 운좋게 그 역을 얻는데 성공하긴 하나, 이 역시 파멸을 낳게 된다. 벤지와 달리 그 파멸이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서 온다는게 다르지만 말이다. 기실 둘의 차이는 근친상간적인 자식 (벤지)이나 아니면 부모의 자가 분열 (하바나)이냐 밖에 없다. [맵 투 더 스타]에서 진정으로 '독립된 새로운 이미지'라는 것은 없다. 그걸 만들어가는 배우들이나 제작자들은 모두 화면 밖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 점에서 [맵 투 더 스타]는 헐리우드가 숨기고 싶어했던 가장 더럽고 추악한 면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준다. 그리고 이 폭로가 사회적인 금기와 거울쌍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맵 투 더 스타]는 샴쌍둥이의 이중적인 사랑과 분열을 담고 있던 걸작 [데드 링거]의 훌륭한 변주곡이 된다.

그리고 그 가족 비극엔 헐리우드에 희생된 사람들이 환영으로 등장해 그들을 괴롭힌다. 이 환영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이미지 변주가 이뤄지고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유령은 세 명이다. 병으로 죽은 캐미나 사고로 죽은 아지타의 아들 미카, 그리고 하바나의 엄마 클라리스. 캐미나 미카는 조금 생뚱맞긴 해도-도대체 미카는 왜 연관되어 있는 하바나가 아니라 벤지에게 나타나는가?-전형적인 호러 영화적인 유령으로 볼 수 있다고 해도 클라리스 같은 경우 '클라리스 본인'이 아니라 클라리스가 주연한 영화의 주인공이 유령으로 나온다는게 흥미롭다. 본인이 아니라 본인이 연기한 이미지가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클라리스의 유령은 [나이트메어 3]라는 호러 영화 각본을 쓰기도 했고 신비 사상가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랑 연관되기도 했던 브루스 와그너와 무신론자이자 귀신 같은 현상을 그닥 믿지 않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미적인 관심사가 서로 섞여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근친상간과 근친상간적인 이미지로 뒤덮인 헐리우드에서 인물들은 주박처럼 끌려다니며 서서히 파멸로 치닫는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급속도로 분열하는 욕망의 이미지에 허우적대다가 최소한의 양심마저 잡아먹어버린다. 이 와중에 애거서는 사람들에게 팜 파탈로 비난받지만 애거서는 사실 [데드 링거]의 클레어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 마지막을 제외하면 별다른 걸 하지 않았다는걸 알아야 할 것이다. 애거서는 불안정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등장 인물 중에서 가장 순수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어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싶어하는 애거서의 욕망이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오물과 같은 과거를 드러내는 트리거가 되었을 뿐. 그렇기에 영화에서 제일 위선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가장인 스태포드다. 그는 백인 남성으로 정상과 이성의 대변인처럼 굴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제일 비틀려 있으며 마지막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망쳐 영화 마지막의 파국에 불씨를 던지는 존재다. 크로넨버그는 스태포드가 하바나를 마사지로 정신치료하는 장면을 마치 섹스 장면처럼 묘사해서 스태포드와 하바나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만든다. 하바나의 마사지 정신치료는 여러모로 정신의 물화라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심사가 잘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석이라는 행위이 자체의 한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태포드와 하바나는 둘 다 근친상간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의사와 환자를 '연기'하면서 정신인과 병이 호전되어가는 환자라 믿고 있다.

이는 후반부 하바나가 충동적으로 제롬을 유혹해 섹스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하바나는 애거서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질투를 토로하며 애거서와 미묘한 감정에 빠져 있는 제롬을 유혹한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로 허우적대던 하바나에게 애거서는 그야말로 창조적이며 편안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다. 창조적이지만 트라우마와 집착을 자극하는 어머니 클라리스하고는 다른 존재인것이다. 하지만 애거서는 반대로 그렇기에 하바나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다. 애거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화상이 있음에도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반대로 하바나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애거서랑 달리 늙고 시들어가고 있다는걸 본인도 잘 안다. 그렇기에 하바나는 제롬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는 애거서에게 집착하고 질투한다. 

그렇다면 제롬은 어떤가? 제롬이 각본가이라는걸 알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는 예술가다. 그는 과거의 상처를 가졌음에도 자유로운 애거서에게 애정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하바나의 유혹도 떨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과거라는 대상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예술적인 영감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바나와 제롬의 섹스는 창조성을 얻지 못해 어떻게든 갈취하고 싶어하는 과거의 피해자와 창조성을 얻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예술가가 시도하는 가열찬 오쟁이질이라 할 수 있다. 얄궃게도 그 오쟁이는 애거서에게 들키고 곧 하바나 자신의 파멸로 이어지고 만다.

그럼 애거서의 창조성이 진정 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엉뚱하게도 애거서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인용하는걸 보여준다. 애거서가 항상 언급하는 이 '자유'라는 시는 그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저항 과정에서 나온 나치즘에 '저항'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왔다. 표면적으로는 영화의 배경과 전혀 상관없는 이 '자유'는 그러나 애거서가 언급하면서 새로운 맥락을 부여받는다. 바로 근친상간적인 시스템에 대해 자유를 찾으려는 시도다. 한 예술작품이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맥락을 찾아가는 이 과정에서 크로넨버그는 애거서를 통해 근친상간적인 이미지 생산 과정을 거부하려고 들고 이내 벤지도 감화받아 언급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크로넨버그는 아이들이 얼마나 그 근친상간적인 생산 과정에 물들어있는지, 그리고 근친상간에서 벗어나 있는 창조성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자유와 창조성을 찾으려는 애거서의 시도는 결국 굳건한 시스템를 부수지 못한 채 비극으로 끝난다. 폭로된 과거로 근친상간으로 맺어진 가족의 어머니는 분신 자살을 택하고 아들은 모든 영예를 잃는다. 딸은 자신을 모욕하는 또다른 딸을 죽여서 죄인이 되고 자신을 사랑했던 아들과 함께 자살을 택한다.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영원히 유예된 지옥이 마침내 [맵 투 더 스타]엔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 지옥에 파멸을 택한 근친상간의 병자들을 비웃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동정한다. 결말을 다시 보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소한 감정과 무지에서 시작된 근친상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남매는 부모가 가진 죄의 증거를 모조리 들고와 옛 집 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부모의 근친상간이 무지로 비롯되었다면 남매의 근친상간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애거서와 그 창조성에 감화받은 벤지는 부모와 자신의 죄를 기꺼이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진 그들은 악순환을 끊기 위해 자살한다.

이 결말에서 크로넨버그와 촬영감독인 피터 서스키치는 마지막 컷을 부감으로 찍어서 운명에 갇혀 파멸을 택한 가련한 피조물들을 바라보는 전능자의 시선처럼 처리한다. 이 마지막 부감 컷이 가져다 주는 허무함과 슬픔은 [데드 링거], 박찬욱의 [박쥐],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결말과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다.이 허무함과 슬픔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상투적이지만 절절한 고백 대사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들이 죄를 대속하는 동안 아버지는 불타 죽어가는 어머니를 물 속에 던져 살린다. 결국 부모는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고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바나의 죽음도 어찌보면 구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속할 부모가 없는 하바나는 결국 애거서를 통해 끝나지 않을 지옥에서 해방된 걸지도 모른다. [맵 투 더 스타]의 파국에는 이처럼 잔인하지만 그래도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한 희망을 찾아볼수 있다는 점에서 기묘한 감동마저 있다. 마치 [공포의 계단]에 나오는 계단 밑 괴물들이 해방되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맵 투 더 스타]는 몇몇 캐릭터가 생각보다 깊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지만, [코스모폴리스]보다 새롭지만 익숙하게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심사와 비틀린 사람들에 대한 씁쓸한 이해를 품고 있는 성숙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영역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크로넨버그가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