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giantroot2015. 1. 18. 01:44



나의 아저씨

My Uncle 
9
감독
자크 타티
출연
자크 타티, 장 피에르 졸라, 아드리안느 세르반티, 루시엥 프레지스, 베티 슈나이더
정보
코미디 | 프랑스, 이탈리아 | 117 분 | -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은 개다. 우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놀고 있는동안 한 남자가 등장해 그들과 놀아주는걸 보게 된다. 타티는 이 장면에 대사를 넣지 않는다. 대신 키가 큰 멀대같은 남자가 자전거를 출근을 하고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타이밍들을 조절해 어떤 이완과 수축으로 이뤄진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느긋할 정도로 헐렁하고 순진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조밀하게 짜여진 [나의 아저씨] 도입부는 곧 영화와 자크 타티의 매력을 설명하는데 중요 포인트가 된다.

윌로 씨의 일상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프랑스 어드메에 있는 동네에서 이뤄진다. 쓰레기도 제대로 치우지 않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타티는 시장과 카페를 위시한 낡은 장소들에 조밀한 사람들의 군상을 배치해 프레임 바깥에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평등하게 프레임과 미장센을 구성한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 같은 느낌이랄까. 윌로 씨는 이 속에서 딱히 튀어보거나 두드러보이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있는 엑스트라들과 교류한다. 윌로 씨를 위해 세상을 존재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있고 윌로 씨가 거기에 있다는 느낌일까. 이런 타티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윌로 씨의 집일것이다. 한창을 꼬불꼬불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윌로 씨의 집은 척 봐도 불편해 보이지만 윌로 씨는 그런 불편함과 상관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간다. 창문을 이용해 카나리아랑 소통하는 장면 같은게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윌로 씨의 누나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50년대 말 프랑스 중산층의 삶은 더욱 기괴해보인다. 이 세계는 윌로 씨의 세계랑 대조되는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 우선 아르펠 부부의 세계에서는 부부 가족과 그 지인들을 제외하면 집 주변엔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쓰레기 같은 이물질 같은건 전혀 없는 진공포장된 세계의 화룡정점은 바로 아르펠 부부의 집이다. 아마 영화사에 등장한 집 중에서 강렬한 집 베스트에 꼽으라면 꼽힐 아르펠 부부의 집은 한마디로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주의적 건축관을 극단적으로 반영한 집이다. 모든 공간은 열려 있으며, 방에 놓여진 가구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최첨단 기기들이 부부의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절대로 편하지 않다는건 처음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방문객이 오면 문을 열여줘야 하는 현관문을 지나면 인물들은 지나칠정도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불편하게 배치된 디딤돌을 철저히 따라 움직인다. 기계들은 가끔 오작동을 일으켜 주인들을 가둬버리거나 윌로 씨랑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한다. 이런 아르펠 부부의 초현대적인 삶이 가지고 있는 괴상함은 영화 사상 괴이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는 설치조각을 꼽으라면 분명 꼽힐 푸른 물을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죽은 고등어 분수대로 나타난다. 이 고등어 분수대는 부부의 삶을 비출때마다 등장해 엉뚱한 리듬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관객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아르펠 씨의 직장에서도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전반적으로 아르펠 부부의 삶을 묘사할때 타티의 초현실적인 심미안과 유머 감각이 강렬해져 거의 이말년 병맛 만화 수준의 괴랄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아르펠 부부의 집들이 장면일것이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직적인 권력 관계, 윌로 씨의 엉뚱함이 겹쳐져 만들어내는 이 황당할 정도로 웃긴 시퀀스에서 타티는 거의 흥겨울 정도로 치밀한 난장판을 유도하고 엉망이 되버린 집과 인물들을 모른체 하며 관객에게 은근슬쩍 윙크한다.

그렇지만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긴 해도 배척되야할 대상은 아니다. 타티의 시각은 종종 강렬해지긴 해도 날카롭진 않다. 차라리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할까? 우선 윌로 씨와 아르펠 가족과의 관계가 나름 좋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제라드야 윌로랑 거의 동급인 캐릭터이니깐 넘어가자. 아르펠 부인은 현대적인 삶을 매우 추종하긴 하지만 아들 제라드가 윌로랑 나가서 노는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거나 말리지 않으며 (물론 먼지 투성이의 아들에 대해서는 질겁하긴 한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질투하는거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르펠 가족은 무시무시한 자본가의 대리인 이런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채 윌로 씨가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가깝다. 물론 그 와중에 그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아르펠 씨가 유독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건 어쩔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선은 차라리 제라드에게 맞춰져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제라드가 영화 내내 자신의 집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투정부리는데 나오는데 이 [나의 아저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윌로 씨가 만드는 혼돈은 이 투정하고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거대한 아이인 윌로 씨는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대해서는 그닥 불만이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 씨의 삶은 도무지 현대 사회와 잘 맞춰지지 않고 윌로 씨가 생리적인 불편함에 몸을 비틀다가 카오스가 발생한다. 그 카오스는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치는 장난과 유사한 수준에서 이뤄진다. 이 카오스는 가끔 재치있는 발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불편한 소파를 눕혀서 침대처럼 사용한다던가) 대부분은 우스꽝스러운 폭발로 이뤄진다. 타티는 그런 자신의 유희 감각을 꺼내 스크린에 흩뿌려대고 영화는 흥겨운 난장이 뿜어내는 느슨하면서도 헐거운 휴식으로 가득차게 된다. 물론 그렇게 느슨하고 헐거워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모두 타티의 치밀한 계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말은 그렇기에 타협과 화합의 기묘한 이중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윌로 씨는 아르펠 씨의 소개를 받아 지방에 있는 세일즈맨으로 취직하게 된다. 적어도 윌로 씨가 [나의 아저씨]에서 누렸던 기묘한 자유는 영화의 끝에서 종결된다. 하지만 윌로 씨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장소는 아르펠 부부의 미학으로 뒤덮인 곳이 아닌, 자신처럼 느긋하고 시끌벅적한 유머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버스 정류장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윌로 씨가 못마땅해왔던 아르펠 씨가 마지막에 제라드와 함께 장난을 치고 웃는다. 적어도 윌로 씨가 영화 내내 벌였던 소동이 완전히 무의미 하지 않았단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사라지는 아르펠 씨와 제라드를 뒤로 개가 장식한다. 인간이 프레임이 퇴장한 자리에 개들이 즐겁게 논다. 타티는 이런 수미일관을 통해 자신의 영화가 진지한거나 심각한 것이 아닌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아저씨]는 긴 말보다는 그냥 즐기는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자크 타티는 훌륭한 영상 작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희극인이자 삶의 진리를 체득한 현인이였고 그 체득한 깊은 유머를 어떻게 영상에 녹여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의 자크 타티가 윌로 씨랑 달리 과묵하고 경제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나의 아저씨]를 비롯한 그가 남긴 영화들이 담고 있는 내공 깊은 유머는 절대로 거짓으로 만들어낸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보이는 통찰력은 온전히 그의 삶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