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

giantroot2015. 1. 27. 00:23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 
8.4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케어 둘리아, 개리 록우드, 윌리암 실베스터, 다니엘 리치터, 레오나르드 로시터
정보
SF, 어드벤처 | 영국, 미국 | 139 분 |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SF 영화의 걸작으로 꼽으라면 항상 꼽히는 영화였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걸작에 대한 평가는 드높아지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고 심지어 어떤 장면은 광고나 만화에도 차용되어 모르는 사람들조차 알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게 '정석적'인 걸작인가? 몇몇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분명 우주 장면의 저중력 묘사라던가 우주선이 보여주고 있는 디테일은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와 같은 후대 영화에게도 영향을 미친 오파츠급 묘사이라 할 수 있다. 분명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 부분을 지적하는게 아니다. 차라리 서사의 논리라고 해야 할까. 그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하는 것이다. 그 부분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 내용에 대한 얘기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영화로든 소설이든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첫 장면부터 놀랐을 것이다. 우주 얘기라면서 정작 만나는 것은 왠 원숭이들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원숭이들이 왜 등장하는지 대충이나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인류의 시작에서 그 오디세이아를 출발하고자 한다. 왜 인류는 지성을 얻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화의 뼈대를 세운 아서 C. 클라크는 여기서 검은 돌덩어리를 던져놓는다. 원숭이들이 어떻게 지성을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초월적인 이미지를 먼저 준다는 점에서 클라크는 철저한 진화론자가 아니라는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다음 우리는 그 유명한 검은 돌덩어리가 원숭이들에게 지성을 주고 원숭이들이 도구를 발명해 사냥과 폭력을 행세하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클라크가 인류의 진화를 초월적인 존재에 개입시킨다는 점에서 어떤 종교적인 관점이 들어갔다는걸 알아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시적 폭력은 큐브릭이 이미 이 시절부터 영상의 마법을 깨우친 천재였다는걸 보여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을 컷의 리듬에 맞춰 쓰러지는 동물과 내려찍는 뼈다귀를 연결한 몽타쥬 시퀀스는 상승과 하강이라는 기본적인 운동 방향을 단순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변주시켜 (쓰러지는 동물은 마치  땅바닥에 튕기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반대로 원숭이의 뼈는 '내려쳤다'가 '올라간다'.)폭발시킨다. 영상과 음향의 몽타쥬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좋은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큐브릭은 또다른 컷의 마술을 하나 부려낸다. 뼈다귀가 위로 올라가자마자 다음 컷에서 우주선으로 변하게 하고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장면이다. 그리고 큐브릭은 여기서 다른 슈트라우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불러온다. (참고로 둘은 혈연적 관계가 없다.)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는 여성적인 이미지에 가까운데 아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의 남성적인 이미지와 대비되어 폭력과 부드러움으로 대표되는 두 세계의 대조와 시간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게 정작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보먼은 도입부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등장하는건 플로이드 박사다. 사실 플로이드 박사는 멀끔하게 따라가긴 좋아도 이 영화 내에서는 그렇게 흥미로운 캐릭터도 아니고 (실은 보먼 쪽도 그렇게까지 인상적인 캐릭터라곤 할 수 없는데 자세한건 후술하도록 하겠다.), 검은 석판을 발견하는 장면의 압도감을 제외하면 차라리 과시적인 이미지의 전시와 앞으로 일어날 전개를 위해 들어간 파트처럼 보일 정도다. 지금 보면 시대의 흔적이 남앙맀는 냉전 설정이라던가 집요를 넘어서 광기마저 엿보이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수준은 분명 충분한 구경거리긴 해도 전반적으로 '달에 이상한 검은 비석이 발견했고 그것이 인간들을 인도하고 있다' 라는 이어질 전개를 설명하기 위해 의무로 넣었다는 느낌도 있다. 실제로 플로이드 박사는 보먼 박사와 달리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 캐릭터는 아니다. 이 점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차라리 파트가 두 개로 나눠지는 두 편을 엮었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리고 인간 캐릭터에 대해서도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럼 보먼 파트로 넘어가보자. 여기서부터 우리가 아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나오기 시작한다. 2년 후  목성탐사용 우주선에서 HAL9000이 오류를 일으켜 우주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프랭크가 죽고 사투 끝에 보먼은 HAL9000을 처치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도 클라크와 큐브릭은 인물을 두 명으로 축약시켜버리고 대신 HAL9000이라는 인공지능을 가져다놓는다. 이 HAL9000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고 분명한 갈등과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더글라스 레인의 침착하지만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 연기와 중간에 등장하는 간결하게 표현된 살해 장면 때문에 HAL9000은 훌륭한 호러 영화의 몬스터의 역할을 수행해낸다. 임무에 대한 비밀을 혼자 간직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지다가 결국 혼돈을 일으켜 모두를 배제한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치닫는 HAL9000은 이후 나온 미치광이 인공지능의 표본이 된다.

그렇다면 HAL9000은 왜 실패했을까? 이는 클라크의 시선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데, HAL9000의 이성 위주의 사고 방식이 우주의 진리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이는 HAL9000의 최후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HAL9000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피해가 어떤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사과만 하면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클라크는 이 이성 위주의 사고야말로 보먼 심지어 HAL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매우 논리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목소리로 죽음의 공포를 토로하며 '데이지'를 부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무서움과 안타까움이라는 복합적 감정이 들게 만든다. 인간보다 훨씬 복합적인 갈등을 HAL9000이 인간 캐릭터들을 밀어내고 최고의 인기 캐릭터가 된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보먼 캐릭터의 매력도 캐릭터 자체의 매력보다는 HAL9000간의 관계 때문에 기억되는 쪽에 가깝다. 보먼은 자세히 뜯어보면 선량하고 일 잘하는 승무원이라는 점 빼고는 그렇게까지 큰 매력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까놓고 말하자면 보먼이 죽고 프랭크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작품은 무리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보먼이 프랭크 대신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외지만 그가 미혼에 가족이 언급되지 않는 캐릭터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프랭크가 살아남아 이후 이어질 전개를 겪었다면 생길 여러 불편한 감정과 상념들을 차단하기 위해 클라크가 의도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우주에서 허망하게 죽은 프랭크의 가족들이 괜찮을지 여부는 뒤로 하도록 하자.) 가족이 있는 플로이드 박사가 목성행 우주선을 타지 않은 이유도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인터스텔라]의 쿠퍼 박사는 캐릭터 메이킹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보다 한층 낫다고 할 수 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보먼 선장은 인류가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야 할 당위성과 감정이입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기초적인 인간미를 지닌 기능적인 캐릭터다.

이처럼 클라크나 큐브릭은 인간 캐릭터는 아주 기초적인 매력만 묘사한 뒤, 비인간적인 요소들에 집착한다. 미래적인 세트, 음악과 음향, 미장센, 원숭이, 모노리스, 인공지능 HAL9000....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을 자세히 따져보면 다들 비인간적인 요소들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다들 좋은 연기를 펼쳤음에도 이후론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는데 기실 그들이 큐브릭의 비인간적인 '미학'에 봉사하는 꼭두각시로 충실했기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본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들은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명작에 오르게 되었지만 배우 인생을 박탈당했다. 큐브릭이 에고가 가득한 명배우들과 작업하면 충돌이 일어어났다는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명배우의 에고는 큐브릭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명배우들에게서 명연기를 뽑아내는 재능도 큐브릭에겐 있지만. 그 점에서 큐브릭의 작법은 의외로 미학적으로 상궤를 긋는 오즈 야스지로랑 맞닿는 부분이 있다. 이렇듯이 지독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두 창작자의 태도는 주제 의식하고도 연관을 맺고 있는데 이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후일 [트리 오브 라이프]에도 참여하게 되는 특수 효과의 전설 더글라스 트롬본이 만들어낸) 블랙홀을 빙자한 사이키델릭한 우주 득도로 대표되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당황해할수 밖에 없다. 이 부분에 들어서면 대사는 사라져버리고 큐브릭은 그나마 넣었던 설명도 그냥 빼버린다. 그야말로 순수한 시청각적인 공격인 것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부분이 사실하고 맞지 않다는건 이미 과학자들과 후배 영화인들이 증명했기에 이 부분이 가져주는 경외감은 현실성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지 오래고 오로지 철저히 미적 쾌감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전달하는 미적 쾌감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서 전개에서 지성'만' 있는 존재 'HAL'이 인류를 목성으로 불어들인 초월적인 존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걸 생각해보면, 그 존재가 지성으로 도달할수 없는 무언가라는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 지성로 이해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오감으로 만나야 하는 이 초월적인 존재는 무엇인가? 여기서 큐브릭과 클라크의 입장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이 부분에서 조금이나마 그것이 지성을 지녔지만 훨씬 지혜롭고 육체를 뛰어넘은 초월자이며 그들이 인류를 선택해 새로운 단계로 이끌것이라는 암시를 넣는다. 하지만 큐브릭은 그런 설명조차 넣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소설과 달리 그 신적인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걸 주저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큐브릭은 그저 그 과정을 시청각의 과잉으로 채워넣어 어떤 숭고한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어느쪽이든 이 작품의 철학이 실로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일신론적인 믿음에 기반을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 되겠다. 의문은 매우 단순하다: 이 초월적인 존재들은 어디서 왔는가? 하지만 큐브릭은 물론이거니와 클라크는 이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작품 내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후속작에서도 이 질문은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저 인류만 초월적인 존재에 감화받아 변모하게 된다.

아니 클라크는 해소할 생각 자체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의 작품 세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유년기의 끝]에서도 그 초월적인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쏙 빠져 있는걸 생각해보면, 클라크는 피안 너머에 있는 우리를 뛰어넘은 신적 존재에 매료되어 있고 그것은 인류의 궁극이라 보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일신론적인 메시아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구원해 행복으로 인도하리라, 라는 강한 믿음으로 깔리게 되며 그 믿음과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동반하게 한다. 거기엔 어떤 이성적인 반론이나 추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가 미쳐서 패배하는 HAL9000이 그렇다.) 클라크가 2차 세계 대전 이전 세대이며 이 작품이 나왔던 시절이 1960년대라는걸 생각해보면 이런 클라크의 철학은 당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 대한 기억을 애써 망각한 채 행복한 낙관으로 젖어들었던 한 시대가 낳은 사상과 전망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클라크의 소설에서 '백인의 의무'를 읽어내는 평도 있는걸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들이 많았다는걸 증명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큐브릭은 그런 클라크의 비전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이식하고 있는 셈이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클라크의 낙관적인 전망이 영화가 나오던 1968년 혁명을 기점으로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도 남아있던 팍스-에 대한 일말의 헛된 기망도, (너무나 잔인하게도)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깨달아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큐브릭은 이 때문에 작품의 뼈대를 제시한 클라크보다 영생을 얻게 된 걸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낡아버리기 쉽지만 이미지는 쉽게 낡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큐브릭은 이 영화 이전에도 그 낡지 않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도가 튼 사람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이견이 없는 시청각 공격으로 이뤄진, 강렬한 '비인간미'로 가득찬 걸작이긴 해도 (특히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접한 관객이라면 그 힘은 막강하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한 영화가 되었다. 사실 어느 영화가 안 그렇겠냐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유달리 이미지의 힘에 많이 기대고 있고 매우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기에 그 경계의 날을 세워야 하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특히 이 영화를 SF의 '정석적'인 걸작으로 보는건 매우 위험한 짓이다. 이 작품(소설과 영화 모두)은 상술했다시피 비주얼과 고증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논리'에서는 많은 구멍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무비판적으로 접한 사람들은 영화가 선사하는 표면적인 부분에 혹해 논리도 완벽해보인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 점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소설과 영화의 중요한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자 영상매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을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라 할수 있다.

실제로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가 되려 후대 SF 영화를 망쳤다는 비판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에 영감을 받은 감독들이 큐브릭의 이미지즘'만' 받아들여 논리는 신경쓰지 않고 강렬한 '센스 오브 원더'로 가득찬 이미지를 남발하는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SF 영화는 아니지만 가스파 노에의 [엔터 더 보이드]야말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후배가 만들어낸 끔찍한 참사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데, 노에는 티벳 불교의 철학을 그냥 사이키델릭한 일본 서브컬처 이미지와 막장 드라마로 범벅하는데 그쳤으며 결국 영화는 끔찍한 160분짜리 영상 자위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노에의 실패는 앞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감명받은 후배 감독들이 저지르지 말아야 할 실수를 알려주는 훌륭한 경종이 되고 있다. 앞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만날 관객들은 이런 주화입마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 영화라는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