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인톨러런스 [Intolerance] (1916)

giantroot2015. 2. 23. 21:08


인톨러런스

Intolerance 
6.8
감독
D.W. 그리피스
출연
샘 드 그라세, 베시 러브, 툴리 마샬, 도널드 크리스프, 랄프 루이스
정보
드라마 | 미국 | 163 분 | -

D.W.그리피스는 여러모로 원죄같은 이름이다. [대열차강도]와 [달나라 여행]에서 태어난 내러티브 영화의 예술은 D.W.그리피스에서 본격적으로 마술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리피스는 한 장면에 한 씬이 아니라, 다양한 컷으로 장소와 시간을 줄였다 늘리는걸 본격적으로 영화에 도입했다. [대열차강도]나 [달나라 여행]가 컷 하나에서 자기완결되어 다음 장면의 시퀀스로 넘어가는 수준이였다면 [국가의 탄생]에서 D.W.그리피스는 한 컷이 다른 컷과 연계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게 되는 혁명을 선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D.W.그리피스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던 세상 인식에 대한 무지함은 [국가의 탄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기엔 곤란한 영화로 만들었다. [인톨러런스]는 한동안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동으로 알려져온 영화다. 

이야기는 옴니버스 식으로 네 파트로 나눠진다. 첫번째로는 1920년대에 살아가는 가난한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두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이야기를 꺼내며, 세번째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네번째는 바빌로니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국가의 탄생]과 달리 [인톨러런스]의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다. 각각의 파트들은 따로 따로 이어져 있으며 영화가 끝날때까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요람을 흔드는 여성이라는 컷을 통해 공통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움직인다. 바로 사랑과 평화에 대한 찬가다. 영화 자체가 일종의 공시성(싱크로니시티)을 가지고 움직인다고도 볼 수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인톨러런스]는 어찌보면 그리피스가 평생 완성하고자 했던 영화 언어를 서사에 반영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즉 그리피스는 개별적인 이야기/샷은 독립되어 있지만 붙여놓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된다는걸 주장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인톨러런스]에서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에서 만개한 영상 언어를 마음껏 주무르며 관객을 희롱하는데, 이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피스는 어느 순간에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킬것인지, 영화 속 인물들이 내뿜는 운동 에너지를 어떤 컷으로 잡아 보여줘야 효과적일지 (산골 소녀의 마차와 현대 파트의 기차 컷 간의 조합은 지금봐도 경탄스럽다.) 잘 알고 있다.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톨러런스]는 '불관용'이 극의 주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영화다. 영화가 나왔던 1920년부터 예수의 탄생 이전 바빌로니아까지 다양한 시간축을 횡단하면서 그리피스는 불관용에 고통받고 저항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재미있게도 그리피스가 그려내는 '불관용'으로 대표되는 적들은 철저히 계급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장장들이라던가 위그노 학살을 지시하는 카트린 왕비, 바리새인들, 벨 마르독이 이런 계급 의식을 기반한 악역들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 악역을 그릴떄 그리피스는 누구보다도 불관용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1920년대 파트에 나오는 여성권리 운동가들이나 성 바르톨로메오 파트에 나오는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와 자막은 창작자의 악의가 담겨 있다. 심지어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인톨러런스]에 등장하는 그리피스의 시선은 거칠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불편한 순진함은 사라졌지만 자본가들은 나쁜 놈들이고 노동자는 착하다라는 단순한 구도는 여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다. 이 단순굵직하고 순진한 악의에 가득찬 선악 구도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적인 감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훗날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그리피스의 작품들을 찬양하게 되는 강렬한 선동성도 획득하게 된다. 과거 파트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지만 현대 파트의 선한 부부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와 불관용의 부르주아 세대를 뛰어넘겠다는 프로파간다적인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순 굵직한 선악 묘사로 얻는 이점도 있다. 일단 한쪽의 캐릭터가 단순해지자 영화는 악역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선역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지금 봐도 상당히 인상적인데 특히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름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지만 바빌로니아의 산골소녀라던가 현대의 보스의 여자친구 역 같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이라던가 생생한 갈등은 지금봐도 놀라울 정도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페미니즘 운동을 혐오하는듯 하면서도 정작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를 걷어차지 않는 기묘한 형태의 캐릭터 메이킹을 보이고 있는 영화가 된다. 이런 D.W.그리피스의 캐릭터 메이킹은 분명 논쟁적인 캐릭터 메이킹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적어도 그리피스는 이 캐릭터들에게 존중심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생생한 선한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에 그 불균형적인 사상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영화가 주창하는 선과 사랑을 찾아나서려는 자들의 멜로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적어도 그리피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거기에 속한 사람에겐 정직하고 선의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건 [인톨러런스] 내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인톨러런스]는 [국가의 탄생]으로 자신감에 찬 그리피스의 비전이 극한에 다다른 시각적 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헐리우드 영화의 화려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평을 가해왔지만 적어도 [인톨러런스]를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왔던 '스펙타클'이 함부로 폄하될수 없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톨러런스]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지금봐도 놀랍다. 다른 부분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흥행이 실패하자 그리피스는 바빌로니아 파트만 따로 빼 개봉하려고 했다는데 그 말대로 영화의 제일 놀라운 부분은 바빌로니아 파트에 담겨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에 무지막지한 물량으로 쏟아부은 엑스트라의 숫자라던가 바빌로니아 공성전의 무모할 정도로 치밀한 묘사에 담긴 박력은 '스펙타클'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한 예술가의 광기마저 느껴져서 무서울 정도다. 제작 과정에 대한 책도 나왔을 정도로 [인톨러런스]는 무성 영화가 단순히 낡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복잡한 감정이 들수 밖에 없는 영화가 된다. 이야기의 구조와 영화의 구조를 실험하면서도 '스펙타클'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고자 했던 위대한 영화감독의 집념과 불관용을 이겨낼 사랑의 힘을 역설하고 있는 담겨있는 걸작이면서도 그 사상의 순진함과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느껴지는 시대의 한계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사상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기에 지금 관점에서는 곧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영화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더욱더 생명력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불관용의 극복을 다루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불관용이 묻어나온다는 흥미로운 아이러니야말로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전 일그러진줄도 모르고 순진함과 진지함마저 느껴지는 낙관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인톨러런스]의 민중이 승리하는 낙관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서글픈 감정마저 들게 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유산을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